독일 9유로짜리 무제한 대중교통 티켓. 자료사진
모든 대중교통을 한 달에 1만원으로 무제한 이용할 수 있다?
황당한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지만 이미 전 국민을 상대로 이런 실험을 마치고, 저렴한 대중교통 정기권을 만든 나라가 있다. 바로 독일이다. 독일은 지난해 한 달에 9유로(약 1만2천원)만 내면 고속열차를 제외한 모든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제도를 시범운영한 뒤 올해 5월부터 정기권 금액을 올려 상시 도입한다.
국내에서도 이와 유사한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시민단체들은 ‘1만원 교통패스’, 정의당은 ‘3만원 교통패스’ 도입을 주장한다. 정기권 적정 가격에 대한 눈높이는 다르지만 취지는 비슷하다. 대중교통의 의미를 기후위기 시대에 맞춰 재발견해야 하고 국민의 이동권을 보장하는 차원에서 ‘값싼 정기권’이 필요하다는 게 이들 주장의 핵심 줄기다.
이런 주장은 서울시를 비롯한 주요 지방자치단체가 경영 수지 악화를 해소하기 위해 대중교통 요금 인상을 추진하고 있는 터라 대중교통과 대중교통 요금 체계 논의를 좀 더 풍성하게 한다. 한국에서도 ‘9유로 티켓’과 같은 값싼 대중교통 정기권이 가능할까.
독일 국민 5명 중 1명이 구매한 ‘9유로 티켓’
‘서울시 대중교통요금 인상 반대 및 1만원 교통패스 도입 요구 시민 캠페인’이 2월3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역 1번 출구 앞에서 열리고 있다. 행사를 주최한 ‘1만원교통패스연대’는 서울시 대중교통 요금 인상의 문제점과 ‘1만원 교통패스’를 비롯한 대안적 교통정책 도입의 필요성을 알리고자 이번 행사를 열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독일의 9유로 티켓 시범운영은 지난해 6월부터 3개월간 진행됐다. 당시 독일 정부는 시범운영 이유로 에너지 위기와 고물가 대응, 대중교통 이용 활성화를 내세웠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시범운영 기간 동안 팔린 티켓 수는 5200만장에 이르렀다. 독일 인구(약 8300만명)를 염두에 두면 5명 중 1명꼴로 매달 이 티켓을 산 셈이다.
제도 도입 취지는 달성했을까. 사회공공연구원의 ‘독일 9유로 티켓 정책의 제도적 기반 분석과 시사점’에 인용된 독일운송회사협회와 독일연방통계청 등의 자료를 보면, 9유로 티켓 도입으로 물가상승률은 0.7%포인트 감소하고, 대중교통 수요는 25% 늘었다. 탄소배출량도 180만톤 줄었다. 대기오염 수준도 6% 남짓 감소했다. 소비자의 물가 부담을 완화했을 뿐만 아니라 대중교통 활용도가 늘어나 에너지 소비는 줄고 환경은 개선됐다는 뜻이다. 교통 혼잡도가 줄었다는 보고도 있다. 같은 자료를 보면, 조사 대상 26개 도시 가운데 23개 도시에서 교통 혼잡이 개선됐다.
부정적 평가도 물론 있었다. 저렴한 정기권을 유지하기엔 재정 부담이 크고 대중교통 산업 노동자의 높아진 노동강도도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의견이다. 독일 정부는 이런 평가를 고려해 정기권 가격을 49유로로 끌어올려 오는 5월부터 ‘49유로 티켓’을 판매하기로 했다. 49유로 티켓 운영을 보조하기 위해 독일 정부가 책정한 예산은 15억유로(약 2조원)다.
‘서울시 대중교통요금 인상 반대 및 1만원 교통패스 도입 요구 시민 캠페인’이 2월3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역 1번 출구 앞에서 열리고 있다. 행사를 주최한 ‘1만원교통패스연대’는 서울시 대중교통 요금 인상의 문제점과 ‘1만원 교통패스’를 비롯한 대안적 교통정책 도입의 필요성을 알리고자 이번 행사를 열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우리나라에서는 9유로와 비슷한 금액인 1만원으로 한 달 동안 지하철, 버스 등 대중교통을 제한 없이 이용할 수 있게 하자는 주장이 있다. 이른바 ‘1만원 교통패스’다. 서울환경연합, 민주버스본부 등 9개 시민단체가 모인 ‘1만원교통패스연대’가 그 주인공이다.
김영준 1만원교통패스연대 활동가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1만원 교통패스가 교통 분야에서 기후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주요한 정책이 될 수 있다”며 “나아가 교통사고 등 교통 분야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과 비교하면 이 정책이 더 경제적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전면 시행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일부 구간을 대상으로 시범 사업을 한 뒤 그 효과를 평가해볼 수 있다고 본다”고 그는 덧붙였다.
정치권에서도 비슷한 주장이 나왔다. 정의당이 제안한 ‘대중교통 3만원 프리패스’다. 김용신 정의당 정책위의장은 “대중교통 요금 부담은 소득 취약계층이 더 크다. 3만원 프리패스를 도입하면 소득 불평등 해소에도 도움이 되고, 기후위기 시대에 탄소배출을 저감하기 위한 의미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정의당은 한발 나아가 3만원 프리패스 도입에 필요한 예산 추정치도 내놓았다. 연간 약 4조632억원, 한 달에 약 3386억원이다. 국토교통부의 대중교통 현황조사를 바탕으로 전국 월평균 대중교통 이용요금(7만1398원)에서 3만원을 뺀 차액을 일평균 대중교통 이용 인원(약 818만명)에 곱해서 나온 수치다.
이들은 재원 조달 방안도 대략 내놓고 있다. 두 갈래다. 우선 유류에 붙는 교통·에너지·환경세에서 필요 재원의 절반 정도 확보할 수 있다고 이들은 말한다. 최근 3년(2019~2021년) 연평균 교통·에너지·환경 세수는 15조원 정도다. 여기서 약 2조원 정도 떼어 값싼 정기권 제도에 활용하자는 취지다. 현재 교통·에너지·환경세는 교통시설특별회계(교특회계)로 관리되는데 세수의 30% 남짓은 정부가 채권 시장 관리 등을 위해 조성·운용하는 공공자금관리기금에 전입된다. 이 전입금을 줄이면 2조원 정도는 마련할 수 있다는 게 이들의 셈법이다. 지난해 전입금은 약 5조2천억원이다.
나머지 절반은 지자체가 부담할 수 있다고 이들은 본다. 지자체 세수인 교통유발부담금과 기존의 대중교통 기관에 대한 손실 보전금을 활용하면 된다는 것이다. 교통유발부담금의 연간 세수는 약 4500억원 정도로 그중 절반이 서울시에서 나오고 있다. 서울시가 시내버스와 지하철에 준 손실보전 지원금은 지난해 기준 약 1조1600억원이다.
대중교통을 무상으로 전환하거나, 비용을 지원하는 흐름은 여러 나라에서 나타나고 있다. 사회공공연구원의 보고서를 보면, 룩셈부르크와 미국 캔자스는 2020년부터 대중교통을 무상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미국 보스턴은 2021년부터 저소득 동네와 시내를 연결하는 버스 노선에 무상 이용권을 도입했다.
네덜란드의 철도 전문 미디어 ‘레일테크’에 따르면 스페인은 지난해 9월부터 시작한 철도 무료 이용권을 올해 연장했다. 이 이용권은 수도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외곽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통근할 때 많이 이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국은 대중교통 운영비용에서 승객이 내는 요금이 차지하는 비율이 40~50% 정도다. 나머지 절반은 국가에서 재정을 충당한단 의미다. 반면 우리나라는 요금으로 운영비용을 충당하는 비율이 70%가 넘는다.
이들 국가가 무상교통 및 대중교통비 지원을 시작한 이유는 코로나19 사태로 줄어든 대중교통 수요를 자극하고, 탄소배출 저감 등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또 에너지 위기로 불어난 생활비 부담을 줄이려는 의도도 있다. 예산은 도로혼잡료, 교통세 등 다양한 교통 관련 재원을 활용했다. 에너지값 급등으로 큰돈을 번 에너지기업에 부과하는 횡재세도 대중교통 요금 인하를 위한 재원으로 거론된다.
이영수 사회공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우리나라에 마땅한 대중교통 정책도 없고, 코로나19 이후로 줄어든 수요를 회복하려는 움직임도 없다”며 “대중교통 정액제로 수요를 확대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중교통 인프라도 확대하는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손지민 기자
sj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