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연인에게 집요하게 전화를 걸었더라도 상대방이 받지 않았다면 스토킹으로 볼 수 없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여성계는 스토킹 처벌법을 무력화하는 판결이라고 반발했다.
인천지법 형사9단독 정희영 판사는 스토킹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ㄱ(54)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고 6일 밝혔다. ㄱ씨는 지난 4월9일 법원으로부터 전 연인 ㄴ(40대 여성)씨 집으로부터 100m 이내 접근 금지, 휴대전화 등을 이용한 통화·문자 송신 금지 등을 명령받고도 이를 이행하지 않은 혐의로 기소됐다.
ㄱ씨는 지난 4월10일부터 6월3일까지 ㄴ씨에게 반복해서 전화를 걸거나 문자메시지를 보냈고, 다른 사람의 전화나 ‘발신표시 제한’ 기능을 이용해 통화를 시도한 것으로 조사됐다. ㄴ씨의 직장 주차장에 찾아가거나 극단적 선택을 암시하는 문자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 ㄴ씨가 전화를 받지 않자 4시간 동안 10차례 연속으로 전화를 건 적도 있었다.
하지만 법원은 이를 처벌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지 않아 ‘부재중 전화’로 표시됐더라도 스토킹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정 판사는 “‘상대방 전화기에 울리는 벨 소리는 정보통신망을 이용해 상대방에게 송신된 음향으로 볼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에 비춰, 피해자와 통화를 하지 않은 ㄱ씨의 발신 행위가 정보통신망을 이용해 말, 부호 또는 음향이 도달하게 하는 행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피해자의 휴대전화에 ‘부재중 전화’로 표시됐더라도 이는 휴대전화 자체 기능에서 나오는 표시에 불과하다”고 덧붙였다.
여성계와 법조계에선 스토킹 처벌법의 입법취지에 어긋나는 판결이라고 비판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여성인권위에서 활동하는 오선희 변호사는 “판사가 법에 명시된 ‘도달’의 의미를 지나치게 좁게 해석한 것”이라며 “이렇게 되면 스토킹 처벌법의 입법 목적 자체가 무너져버리게 된다”고 했다.
오 변호사는 “피고인의 행동은 수신 거부 의사를 밝힌 피해 여성에게 전화해 ‘신호’가 도달하게 만든 것이다. 만약 소포를 보냈는데 수신인이 뜯지 않았다면 도달하지 않은 것으로 볼 것이냐”고 반문했다. 입법 취지를 구현하려면 법원이 법률의 자구와 앞선 판례를 지나치게 기계적으로 해석해 판결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이정하 박고은 기자
jungha98@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