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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사랑한다 말할걸” 제천 참사 한달…아물지 않은 상처

등록 2018-01-19 17:04수정 2018-01-19 19:37

생업 접고 대책위 활동하는 유족 “진상규명 돼야 희생자 잠들 수 있다”
참사 트라우마에 악성 글로 상처…403차례 심리 상담·치료
구조 책임 비난·압수수색·직위해제 등 소방관도 힘겨운 나날
제천 화재참사 유가족들이 18일 합동 분향소 옆 벽에 게시한 생전의 희생자들을 보며 단란했던 한 때를 추억하고 있다.
제천 화재참사 유가족들이 18일 합동 분향소 옆 벽에 게시한 생전의 희생자들을 보며 단란했던 한 때를 추억하고 있다.
“엄마 나 이거 가져도 돼?”

“그건 뭐하려고?”

“할머니 물건 하나 갖고 싶어서. 그럼 앞으로도 계속 가깝게 이어질 것 같아서…”

민아무개(28)씨 왼손 약지에는 가느다란 은반지 세 개가 끼워져 있다. 할머니 물건 하나 간직하고 싶어 할머니 고 김현중씨의 은반지를 끼고 산다. 김씨는 지난해 12월21일 충북 제천 노블 휘트니스 앤 스파 화재 참사 때도 반지를 끼고 있었다. 김씨는 이날 딸 민윤정씨, 외손녀 김지성양과 이곳에서 함께 변을 당했다. “할머니는 ‘우리 손녀 사랑해’를 입에 달고 사셨는데, 제가 먼저 ‘할머니 사랑해’라고 못한 게 너무 미안해요. 이제 제가 ‘할머니 사랑해’라고 하지만 답이 없네요.”

고 김현중씨의 유족 민아무개씨가 할머니에게 보낸 손편지.민아무개씨 제공
고 김현중씨의 유족 민아무개씨가 할머니에게 보낸 손편지.민아무개씨 제공
민씨는 지난 17일 할머니께 부치지 못한 편지를 썼다. “할머니 제 곁에서 멀어진 지 벌써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가요. 너무 사랑해요. 꿈에라도 한 번만 나와주세요.” 민씨는 고종사촌 지성을 보고 싶어 날마다 카톡에 편지 쓴다. “지성이 아이돌그룹 인피니트 너무 좋아해 대학 합격한 뒤 공연가려고 예매까지 했었는데…”

지성양이 좋아한 그룹 인피니트가 건넨 사인 시디와 함께 편지를 보낼 참이다. 서울에서 생활하는 민씨는 주말마다 제천을 찾는다. “가족이 모두 너무 아파요. 제가 잘 버티는 것처럼 보여야 가족이 견디잖아요.”

18일 오후 제천 화재 참사 합동분향소에서 민씨 아버지를 만났다. 깎지 않아 희끗희끗 덥수룩한 수염, 충혈된 눈이 먼저 들어온다. 그는 매제 박아무개씨, 류건덕 대책위원회 대표 등 6~7명과 거의 매일 합동분향소와 유가족 대책위원회에 나와 진상규명에 힘쓰고 있다. 육가공업을 했던 박씨는 아예 생업을 접었다. “참사 원인만 제대로 밝히면 소방관 처벌 같은 일은 바라지 않았죠. 그런데 자꾸 말을 바꾸고 진실을 은폐하려고 해서 두고 볼 수가 없어요. 그럼 희생자들이 고이 잠들지 못할 것 같아요.”

제천 스포츠복합센터 유가족대책위원들이 18일 오후 대책위 사무실에서 진상 규명을 위한 자료를 살피고 있다.
제천 스포츠복합센터 유가족대책위원들이 18일 오후 대책위 사무실에서 진상 규명을 위한 자료를 살피고 있다.

제천 스포츠 복합센터 화재 유가족대책위원회가 합동 분향소 옆 벽에 설치한 소방당국의 구조 관련 사진.
제천 스포츠 복합센터 화재 유가족대책위원회가 합동 분향소 옆 벽에 설치한 소방당국의 구조 관련 사진.
소방 합동조사단이 지난 11일 화재 원인, 소방당국의 현장 조처, 구조 지연과 실패, 재발 방지 대책을 담은 조사 결과를 내놨지만 유족은 미덥지 못하다. 유족 대책위는 구조대가 2층 비상구로 제때 진입하지 못한 이유 등이 석연치 않다며 분향소 옆 벽에 소방당국 구조 등을 문제제기하는 사진을 전시했다. 국회 차원의 재조사도 요구한 상태다. 안아무개 전 유가족 대책위 언론담당은 “소방당국 조사 발표가 너무 미흡해 국회 진상 요구 활동에 기대를 걸고 있다”고 말했다.

김아무개씨가 제천체육관에 마련된 제천 화재 참사 합동분향소 벽에 설치된 딸의 사진과 딸에게 보낸 글 등을 보고 있다.
김아무개씨가 제천체육관에 마련된 제천 화재 참사 합동분향소 벽에 설치된 딸의 사진과 딸에게 보낸 글 등을 보고 있다.

제천 화재 참사 때 희생된 김다애양의 묘소. 18일 오후 김씨의 아버지가 설치한 작은 액자와 커피 한잔, 빵 한봉지가 애처롭다.
제천 화재 참사 때 희생된 김다애양의 묘소. 18일 오후 김씨의 아버지가 설치한 작은 액자와 커피 한잔, 빵 한봉지가 애처롭다.
‘다애 아빠’ 김아무개씨 등은 20명이 숨진 채 발견된 2층 외 다른 층에서 숨진 희생자 구조지연 등 진상규명에 힘쓰고 있다. 18일 다애양 묘소엔 작은 액자와 커피 한잔이 놓여 있다. 그가 두고 온 것이다. 그는 분향소 벽면 사진 속 딸만 보면 몸과 마음이 굳는다. 사진 옆엔 ‘숙명여자대학교 합격통지서. 장학내용(수업료 전액)이 붙었다. “학원 한 번 안다녔어요.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는데 이렇게, 이렇게….” 말을 잇지 못했다. 한 방울 눈물이 바닥에 떨어졌다. “딸을 위해서도, 여기 분향소에 있는 29명 희생자와 유족을 위해서도, 진상은 제대로 밝혀져야 해요.”

제천 화재 참사 때 희생된 김다애양의 대학 합격 통지서.
제천 화재 참사 때 희생된 김다애양의 대학 합격 통지서.
애써 생업으로 돌아간 이도 있다. ‘봉사 천사’로 불린 아내 고 정송월씨를 잃은 반아무개씨는 아내가 7년 동안 운영한 음식점을 지난 3일 열었다. 화재 현장에서 300m 남짓 떨어진 곳이다. “밤에 혼자 있으니까 자꾸 눈물이 나요. 그래서 아내 숨결 배어 있는 가게를 열기로 했죠.” 가게를 연 데는 다른 이유도 있다. 가게는 유가족에게 퍼붓는 근거 없는 악성 글·소문의 피난처다. 제천 화재 참사 유족은 악성 소문에 시달리다 청와대에 악성 글 금지 청원을 내기도 했다. 반씨는 “아내를 그리워하던 이들이 가게를 찾아요. 적어도 이들은 아내와 유족에게 나쁜 말을 하지 않아요. 우리 참 많이 힘들어요. 몸무게도, 기운도 모두 빠지고 담배, 눈물, 한숨만 늘었어요”라고 하소연했다.

제천 시내 곳곳엔 애도 펼침막이 걸렸다. 유가족과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부상자는 제천보건소 등에서 심리 상담·치료를 받고 있다. 유족뿐 아니라 소방관 또한 힘겨운 나날을 보낸다. 구조 책임을 두고 비난이 잇따른 데다, 충북경찰청 수사본부가 충북소방본부 등을 압수수색하고, 현장 지휘 소방관이 직위해제되면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제천소방서는 인원을 124명에서 130명으로 늘리고, 30%에 이르는 신입 대원 비율을 조정하는 등 개선안을 마련하고 있다.

윤용권 제천보건소 건강관리과장은 “유가족과 부상자를 대상으로 지금까지 403차례 심리 상담·치료를 진행했다. 소방·경찰은 자체 관리를 하고 있다. 불안·초조·불면·자책·우울 같은 반응이 나타난다. 유족과 부상자를 넘어 시민에 이르기까지 단계적 치료를 진행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제천/글·사진 오윤주 기자 st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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