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89년 국회 청문회 대응
민정당과 교감 속 비공개 창설
국방부·육군본부·국방연구원 등
법적 근거 없이 1년6개월 가동
집단발포 등 쟁점 답변 지휘
민정당과 교감 속 비공개 창설
국방부·육군본부·국방연구원 등
법적 근거 없이 1년6개월 가동
집단발포 등 쟁점 답변 지휘
“보안사 편제상에는 그런 기구는 없다.”
5·11연구위원회(5·11분석반)는 1988~89년 국회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가 연 광주청문회에서 ‘5·11연구단이라는 것은 무엇을 하는 단체인가?’라는 예상질문에 ‘정답’을 미리 준비했다. “다만, 광주사태 당시 취급인원이 근 2700명에 달하는데 국회 광주특위 조사활동이 개시됨에 즈음하여 방대하고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수사사항을 정리할 필요가 있어서 그 당시 수사 관계자들이 기억을 더듬어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작업을 편의상 511작업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알고 있다.” 5·11분석반은 애초 이 답변을 준비했다가, ×자를 그었다. 그리고 손글씨로 “사령부에서 요즘 부대 기능과 편제를 연구하는 팀을 잠정 운영하고 있는데 그걸 511연구단이라고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거짓말’을 한다.
이 답변은 당시 5·11분석반이 설치 근거가 없는 불법 기구였고, 이를 실질적으로 ‘보안사령부’가 주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보안사는 전두환이 79년 12·12(군권 장악)와 80년 5·17(계엄 전국확대)이라는 두번의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하는 데 ‘일등공신’이었다. 1988년 노태우 정부 출범 이후 정치 환경이 바뀌면서 5·18 학살을 정당화하는 데 또다시 보안사가 나섰다. 1988년 4·26 총선에서 여소야대의 구도가 만들어진 뒤 야3당은 ‘광주문제조사 특별위원회’ 구성과 국정조사 등의 방침을 합의했다. 곤혹스러워진 여당인 민정당은 88년 5월9·10일 당정대책회의를 열어 ‘야당이 국회광주사태진상조사 특별위원회의 구성을 결의하면 이에 참여한다’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다음날인 88년 5월11일 보안사 등은 5·11연구위원회를 비밀리에 설립했다.
보안사령부 주도로 국방부, 합동참모본부, 육군본부, 한국국방연구원(KIDA)이 꾸린 5·11분석반은 안기부(현 국가정보원)와 민정당과도 협의했다. 5·11분석반의 회의자료를 보면, 국방부 동원예비군 국장 소장 최홍걸, 국방부 법무관리관 전창열 준장, 보안사 700부대장 장호경 준장, 육군 기획민사처장 서건홍 준장, KIDA 담당관 김경수 연구관 등이 위원으로 참여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활동 기간인 88년 7월부터 89년 12월까지 총 32회 전체회의를 개최했다.
5·11분석반은 그동안 군에서 갖고 있는 5·18 수사기록 등을 취합해 5개 분야별로 나누어 조작·왜곡 방안을 연구·분석했다. 이들은 국회 광주청문회에 군당국 쪽 증인을 누구로 내세울 것인지, 각종 쟁점에 대해 어떻게 답변을 할지 등을 조율했다. 무장 난동 실태, 군의 자위권 행사 불가피성, 실탄 분배 시기와 과정 등의 예상 질문과 답변서를 치밀하게 작성했다. 5·18 연구자 정수만 전 5·18민주유공자유족회장은 “5·11분석반의 5·18 왜곡 논리는 95년 12·12와 5·18 검찰 수사 당시 신군부의 대응 논리로 이어졌고, 97년 대법원 유죄 판결로 사법적 처벌이 끝난 뒤에도 5·18을 북한군 소행으로 모는 극단적 5·18 폄훼 논리로 확장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광주/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보안사는 1988년 5월 국회 광주 특위에 대비해 5·11분석반을 만들어 광주 특위 활동이 끝나는 1989년 12월까지 32차례 전체 회의를 열어 5·18 사실 왜곡과 계엄군 정당화 논리를 만들었다. 사진은 1989년 12월31일 국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광주 사태와 무관하다’는 전두환씨에게 이철용 평화민주당 의원이 “살인마 전두환”이라고 외치는 모습. <한겨레>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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