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어디든 함께 다니던 예삐. 우리가 10년간 함께 다닌 카페는 100곳이 넘는다.
* 이 이야기는 ‘지독하게 힘든 개 키우기’가 아니라 작은 개 한 마리가 부서지지 않는 단단한 동물보호활동가를 만든 이야기다.
절대 오지 않을 것 같던 그 날이 왔다. 집으로 돌아 왔는데 현관 앞에서 반겨야할 ‘예삐’가 보이지 않았다. 다급한 마음에 이 방 저 방 빠른 속도로 예삐를 찾아 헤맸다. 따뜻한 바닥과 닿아 있는 큰 베개 밑에서 예삐를 발견했다. 싸놓은 대소변이 흐트러지지 않은 상태였다. 나의 소울메에트는 엎드려 자는 모습으로 세상을 떠났다.
2007년 8월, 동물자유연대에 입사한 첫 날 예삐를 만났다. 작은 몸집에 귀여운 얼굴, 딱 봐도 정말 예쁜 개였다. 그런데 예삐는 이 날 입양간 지 1년 반 만에 파양이 되어 동물보호소에 다시 돌아 온 것이었다. 파양의 결정적인 이유는 애착하는 사람과 떨어지면 심하게 불안을 느껴 이상 행동을 하는 분리불안이었다. 매일 안약을 넣어야 하는 안구 건조와 치료기간이 오래 걸리는 지루피부염도 한 몫 했다.
첫눈에 반한 건 나만이 아니었다. 녀석도 분리불안을 맘껏 표출할 애착 상대로 나를 찜한 듯 보였다. 그래 이것도 인연이다. 나는 첫 출근, 너는 파양된 날. 우리 함께 지내보자.
“개 키워요? 동네에서 난리 났으니 빨리 해결하세요!” 7년간 자취 생활을 하며 처음으로 집주인에게 항의 전화를 받았다. 집에 남겨진 예삐가 하루 종일 현관문을 긁으며 울었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두꺼운 원목 옷걸이가 넘어져 두 동강이 나 있었고 집 안은 아수라장이었다. 화장실 변기 안에서 첨벙첨벙 물장구 치고 있는 예삐를 보니 ‘개 싸이코가 이런 거구나’ 실감했다. ‘이젠 괜찮겠지’ 하다가 몇 번 더 호되게 당하고 난 뒤, 예삐는 나와 매일 출퇴근을 같이 했다. 관절이 안 좋아 걷는 것이 힘들어진 2년 전까지는 종일 그렇게 붙어 지냈다.
신혼여행, 해외여행을 제외하곤 예삐와 항상 함께 다녔다. 예삐를 데리고 들어갈 수 없는 곳은 과감히 포기했고 때론 숨겨서 들어가기도 했다. 고급 레스토랑, 호텔, 노래방.…심지어 극장까지.
처음에는 예삐 혼자였다. 지독하게 돌보기 힘든 예삐와 살다보니 왠만한 개들은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돌봄이 필요한 보호소 동물들을 한 마리씩 계속 데려왔다. 앞이 보이지 않아 손만 대도 물던 ‘켠이’가 왔고, 피부를 뚫고 진물이 철철 나던 중증 피부염 ‘대국이’가 왔다. 얼굴 한쪽이 뜯겨 구조된 떠돌이 개 ‘빽돌이’와 하반신 마비인 ‘땡군이’가 왔다. 푸대자루에 담겨 산 속에 버려 진 ‘랭이’도 왔다. 우리 집엔 늙고 병들어 입양 갈 확률이 5%도 안 되는 개들이 상시 7마리 이상 우리집에 있었다.
나이 들어 다리에 힘이 빠져 혼자 균형을 잡기도 힘들어했던 예삐.
같이 사는 동물들이 늘어도 예삐는 질투하지 않았다. 항상 첫째였고 항상 ‘갑’이라는 걸 녀석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예삐와 함께한 10년, 내 평생 가장 치열하게 살았고 제대로 일했다. 동물보호소 동물들의 나은 삶을 위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천했다. 좀 더 많은 동물들을 도와주기 위해 그들의 스토리를 대중에게 알렸다. 매번 고약한 입 냄새 풍기고 애교도 없는 늙은 개들 데려가도 나보다 더 좋아해주는 남자 사람 소울메이트도 만났다. 매 순간 예삐가 함께 했다. 나를 다독이고 단련시키며.
고마워 예삐. 너를 떠나 보내며 덜 아파하고 덜 미안해야 더 많은 동물들을 지켜주는 애니멀 호스피스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았어. 곁에 있을 땐 사랑 뿜뿜, 떠나 보낼 땐 조금 캐주얼하게 말이야. 너의 뿌리이자 나의 뿌리인 동물보호소의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멈추지 않을게. 친구와 동료였고 자식이고 가족이었던 내 소울메이트, 예삐.
글·사진 윤정임 동물자유연대 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