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선 편집인
역사 교과서를 둘러싼 역사전쟁 시즌 1은 교학사 교과서의 완패로 끝났다. 이런 결과를 낳은 일차적 책임은 함량 미달인 교과서 자체와 그런 함량 미달을 무책임하게 눈감아준 교육부에 있음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최소한의 상식이 있다면 끝없이 오류가 쏟아지고 친일과 독재 등 역사에 대한 오도된 관점의 기술로 일관한 교과서를 선택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엉터리 교과서가 교육 현장에서 퇴출당한 것은 우리 사회에 상식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그러나 안심하기엔 아직 이르다. 엉터리 교과서를 밀어붙였던 정부 여당과 수구 언론 등 수구 우파들 때문이다. 그들이 전폭적으로 밀었던 교과서가 철저하게 외면받았다면 우선 스스로의 잘못을 돌아보는 게 상식이고 순리다. 하지만 그들은 국민의 상식을 좌파의 결집 탓으로 매도할 뿐 자체의 문제점은 아예 외면했다. 우파와 국민 상식 사이의 거리는 이렇게 아득하다.
도대체 왜 그럴까? 미국의 언론인 크리스 무니가 쓴 <똑똑한 바보들>(원제는 공화당원의 뇌)에서 그 해답의 일단을 찾을 수 있었다. 과학과 정치의 관계를 탐구해온 무니는 심리학 등 과학적 연구 결과를 통해 보수주의자들, 그 가운데서도 권위주의자들은 새로운 정보에 덜 개방적이고 자신의 신념에 방어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들은 자신의 신념을 위한 추론에 있어 정확성은 신경을 쓰지 않고, 신념에 모순되는 증거나 논박을 보면 오히려 더 집요하게 자신의 틀린 관점을 고수하려 한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 이후 역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란에 그의 주장을 대입하면 꽤 그럴듯하다. 박 대통령이 기존 역사교육에 비판의 포문을 연 지난해 7월 발언을 보자. 그는 우리 학생들의 69%가 6·25 북침설을 믿고 있다는 여론조사를 인용하며 이를 왜곡된 역사교육 탓이라고 호통을 쳤다. 하지만 그 결과는 북침이 북한의 침략인지 북한에 대한 침략인지 알 수 없게 만든 조사 문항 탓이었다. 6·25가 북한의 침략으로 시작됐음을 부인하는 교과서는 단 하나도 없고, 제대로 된 여론조사에서 남한의 북침설에 동의하는 학생은 0%대에 머무는 게 정확한 사실이다. 연초 신년 기자회견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박 대통령은 기존 교과서 편향의 예로 불법 방북 처벌을 ‘탄압’이라고 썼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에 검정통과된 교과서 가운데, 이렇게 쓴 교과서는 하나도 없다.
수구 우파의 대표 논객인 김대중씨의 논법은 더 괴이하다. 교학사 교과서를 정도라고 강변하는 그는 전체 학교가 8종 가운데 7종의 교과서를 나눠 선택했음에도 좌파의 세계에는 독점만 있다며 “‘2352 대 0’은 공산주의·전체주의 국가에서나 있음 직한 ‘만장일치’의 본보기”라고 주장했다. 또 정권을 장악하고, 언론 지형의 90% 이상을 점유할 정도로 우리 사회에 대한 우파의 지배가 강고한데도 우파가 좌파에 역부족이라 말한다. 둘 다 전형적인 사실 왜곡이다. 이렇듯 우파에게 중요한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들은 그릇된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서 틀린 사실이건 사실 왜곡이건 상관하지 않는다.
김씨는 칼럼 말미에 “세계는 다 아는데 우리만 몰랐던 항목에 ‘올바른 역사의식의 정립과 역사 교육에 무관심한 것’을 추가해야겠다”고 했다. 그러나 <뉴욕 타임스>는 그들이 말하는 ‘올바른 역사의식 정립’은 “역사의 교훈을 저지하려는 위험한 기도”라고 경고했다. 이것이야말로 세계는 다 아는데 그들만 몰랐던 항목에 추가해야 할 내용 아닐까? 그러나 우파들은 이런 상식의 소리에 귀를 막고 있다. 그들은 오히려 국정 전환까지 들먹이며 교과서에 대한 정권의 통제를 강화하는 역사전쟁 시즌 2에 나설 태세다.
문제는 그들의 막무가내식 주장을 사실 검증만으로는 막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무니는 역사적 사실에 바탕해 진보적 가치관을 강조해주는 강력한 과거의 서사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키기 위한 우리 국민의 투쟁을 그려 1000만 관객을 모은 ‘변호인’처럼. 픽션이 가미된 영화와 달리, 역사에서도 우리가 진정 자랑할 만한, 사실에 바탕한 우리의 경험을 매력적인 서사로 들려주자.
권태선 편집인 kwonts@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