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센 찬 바람에 자켓을 여미고 짚 앞을 지나니 조그마한 대 여섯 살 된 아이들 서 너명이 추위엔 아랑곳 하지도 않고 신나게 놀면서 멀리서 나에게 인사를 합니다. 뭘 하고 있나 가까이 가보니 옆집 사는 초등학교 5학년 야곱 형이 만든 이글루에 들어갔다 나갔다 하며 놀고 있는 거네요. 얼마전 내린 눈이 쌓이자 야곱은 아빠와 함께 네모난 플라스틱 통에 눈을 눌러 벽돌을 만들어 하나하나 정성스레 쌓아 이글루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는 영국 토트넘 팬이라며 손흥민을 아주 좋아한다면서 이글루 위에 토트넘을 상징하는 파란색을 물을 드리고 깃발도 만들어 꽂습니다.
하빈이와 유빈이도 어렸을 적 눈이 오면 플라스틱 통 들고 밖에 나가 이글루 벽돌을 찍어내던 기억이 납니다. 눈으로 벽돌을 찍어내려면 눈이 잘 뭉쳐져야 하는데 기온이 영하 바로 아래로 떨어질 때가 가장 좋습니다. 온도가 너무 내려가면 눈이 서로 접합되도록 하기 위해 더 많은 힘을 가해 야 합니다. 스키어들이 꿈꾸는 가볍고 통풍이 잘되는 눈 가루가 눈싸움을 하기 위해 눈을 뭉칠 때는 쓸모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눈 벽돌을 쌓아 올리다 보면 압력을 받고 있는 얼어 붙은 물이 녹는데 이 물이 다시 얼어 눈 벽돌을 고정시키는 결합제 역할을 합니다.
둘이서 열심히 이글루를 완성하고는 그 안에서 잠을 자고 싶어 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추운데 어떻게 자니?” 하니 이글루 안은 밖의 온도보다 훨씬 안 춥다며 아랑곳하지도 않습니다. 사실 아이들에게 배워 안 것이지만 이글루에서 자는 것이 생각보다 더 편안하고 이글루 안은 밖의 온도보다 훨씬 따뜻하다고 합니다. 바깥 온도가 섭씨 영하 45도가 되는 추위에도 이글루 안은 영하 7도에서 영상 19도까지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이글루가 얼음이 아니라 압축된 눈으로 만든 벽돌로 만들어져 벽돌에 많은 작은 공기 주머니를 허용하므로 벽과 단열재 역할을 모두 수행하여 열을 유지합니다. 북국의 원주민들은 땅을 파 그 위에 이글루를 지어 눈으로 침대도 만들어 나뭇가지나 물개 가죽을 깔고 생활했다 하니 그 지혜가 놀랍습니다.
아이들의 이글루를 지나 마을 광장에 들어 서는 언덕 위에선 유치원 아이들이 선생님과 함께 S자로 눈 위에 길을 내고 한쪽으로 눈으로 벽을 쌓아 눈썰매 트랙을 멋지게 만들어 신나게 눈썰매를 타고 있습니다. 이 아이들에겐 봅슬레이 슬라이딩 트랙이 부럽지 않겠네요. 우리집 건너편에 사는 4학년된 쿠퍼도 아빠와 함께 열심히 장작을 패더니 눈썰매 트랙를 만들어 장작들을 트랙 위에 놓고 밑으로 내려 보냅니다. 쿠퍼의 집은 비탈진 길 위에 있는데 지하실이 언덕 아래 있어 지하실 옆 언덕 위에서 장작을 패서 눈썰매를 트랙을 이용해 장작을 나르는 것이었습니다. 열심히 일도 하고 신나게 재미도 보고, 정말 님도 보고 뽕도 따는 부자네요.
꽃피는 봄날, 뜨거운 여름, 화려한 가을 모든 계절이 나름 아름답고 재미난 일들이 많이 있지만 겨울 또한 이곳 아이들에겐 신나는 계절 중에 하나입니다. 눈이 오면 어린 아이들은 엄마랑, 할머니랑 열심히 눈썰매 타고 큰 아이들은 형들과 아빠와 함께 손수 스키도 만들고, 스노우 보드도 만들어 신나게 눈을 즐깁니다. 제 고향도 눈이 많이 내리는 강원도 평창이어서 어렸을 적 형들과 함께 참나무를 베어 얇게 켜서 물을 끓여 나무를 휘게 만들어 스키를 만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날씨가 점점 추워져 볼이 빨개지고 찬바람이 얼굴을 에이면 물이 꽝꽝 얼은 연못가에는 어린 아이들 손을 잡고 스케이트 타는 가족들로 가득 하고 유빈이 같은 큰 아이들은 직접 만든 하키 스틱으로 쌩쌩 얼음판을 달리면서 땀을 뻘뻘 흘리며 ‘추위야 저리 가라!’ 외칩니다. 유빈이가 가장 좋아하는 얼음 낚시도 한 겨울에나 가능한 일이지요.
그 중 제 아내와 제가 좋아하는 것은 겨울 아침의 산책입니다. 한 겨울날 숲을 거닐다 보면 차갑고 청량한 공기가 온 몸을 감싸는 것이 다른 계절엔 맛볼 수 없는 상쾌함이 있습니다. 눈이라도 올 것 같으면 숲은 온통 나니아의 세상으로 변한 것 같고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녹다가 다시 얼어 붙으면 찬란한 빛을 발하는 크리스탈로 덮힌 나뭇가지들이 늘어져 있는 것이 동화 속 나라를 걷는 것 같아 내 마음도 수정같이 맑아질 것만 같습니다.
한동안 아이들을 신나게 하던 동장군도 이제는 기가 죽어 어느 날은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 갑니다. 꽁꽁 얼던 연못도 녹고, 쌓였던 눈도 녹아 이제는 스케이트도, 눈썰매도 탈 수 없게 되었네요. 그렇다고 기 죽을 우리 아이들이 아니죠. 바야흐로 메이플 시럽 만드는 기간이 왔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밤에는 영하로 낮에는 영상으로 기온이 오르내리면 메이플 나무들은 수액을 내뿜어 나무에 구멍을 내 수액을 받아다 종일 끓이면 메이플 시럽이 됩니다.
나와 함께 복분자를 키우고 있는 알렌은 올해도 메이플 시럽을 만들기 위해 분주합니다. 몇 해 전부터 알랜은 숲 입구에 자기 가족만의 아지트를 만들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나무로 멋진 헛간도 만들고 헛간 안에는 장작을 때서 메이플 수액을 끓일 수 있는 시설도 만들었습니다. 한쪽엔 다락으로 올라가는 사다리도 설치해 아이들의 신나는 놀이터가 되었습니다. 헛간 밖에는 나뭇가지 모양을 살려 난간도 만들고 정말 멋지네요. 알렌은 형인 조 가족과 함께 메이플 시럽을 만드는데 요즈음 한창 메이플 수액을 날라 끓이느라 아주 바쁘고 즐거운 날들을 보내고 있더니 어느 날 지나가다 말합니다. “언제 한번 저녁에 우리 아지트에서 시간을 함께 보내요. 라면 같이 끓여 먹으면서 형제애를 나누어야지요” 알렌과 조는 매운 한국 라면을 아주 좋아하는데 특히 짬뽕라면 맛에 반해 버렸습니다. 둘 다 남미에 산 경험이 있어 매운 음식을 좋아해 매년 할라피뇨 같은 매운 고추를 심어 피클을 만들어 우리에게도 나누어 주는데 우리 아이들도 좋아해 병을 열면 금새 동이 나고 맙니다.
사실 한국 라면을 좋아하는 사람은 알렌과 조 뿐만 아닙니다. 공동체에 한국 손님들이 많이 방문하면서 한국 라면 역시 서서히 이곳 형제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어떤 자매들은 이곳 식품 담당하는 형제에게 자기 남편이 감기에 걸렸으니 라면 좀 달라고 하더니 “그런데 미국 라면 말고 꼭 한국 라면으로 주세요” 하더랍니다. 한 할머니 한 분은 지나가시면서 자기가 감기에 걸렸는데 한국 라면을 먹고는 땀을 뻘뻘 흘리고는 바로 감기가 뚝 떨어졌다고 합니다. 신라면을 드셨나? 이곳에서 컴퓨터를 담당하고 있는 형제 르엘은 내가 사용하고 있는 컴퓨터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친절히 고쳐 주었는데 내가 정말 감사하다고 하자, 정말 고마우면 한국 라면 좀 보내라고 합니다. 제 아내는 오후에 할머니 한 분을 돌보는 일을 했었는데 가끔씩 순한 진라면에 브로콜리, 양파, 당근 등 야채를 잔뜩 넣고 끓여 간식으로 드린 일이 있습니다. 그러면 할머니는 한국 라면이 제일 맛있고 영양가 있다고 하면서 국물도 남기지 않고 드시면서 너무 좋아 하셨습니다. 대부분 한국에서 오신 분들은 라면이 건강에 좋지 않다고 해서 드시기 꺼려해 일 년치 먹을 것을 오늘 다 먹었다고 하시는 분도 있는데 이곳에 와서는 한국 라면이 최고의 스낵으로 둔갑 되었으니 참 놀랄 일이네요.
사실 미국 라면은 맛이 밋밋하고 면도 찰기가 없는데 반해 한국 라면은 면이 쫄깃하면서 말린 야채와 함께 국물 맛이 끝내 줍니다. 특히 매운 맛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단연코 인기 최고입니다. 몇 년 전 뉴욕 타임즈에서도 꼭 먹어 보야 할 식품 중 하나가 한국 라면으로 꼽혔고 작년에는 세계 라면 중 1위가 한국 블랙신라면으로 뽑혔으니 한국 라면의 맛은 세계적으로도 입증이 된 셈이죠. 이곳 월마트에서도 신라면과 너구리는 손쉽게 살 수 있으니 미국 대중의 맛을 잡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겠죠.
내일 저녁 알렌의 아지트에 가서 아늑하게 불을 때고 메이플 수액을 끓이며 시럽이 만들어져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옹기 종기 앉아 얼큰한 짬뽕 라면을 먹을 것을 생각하니 입에 침이 도네요.
오늘은 우리 공동체에서 ‘메이플시럽 이벤트 드라이브 스루’ 행사를 여는 날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이웃들이 매주 토요일에 있던 오픈 저녁 만찬에 올 수 없게 되자 이웃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메이플 시럽 만드는 과정을 자동차를 타고 돌면서 보는 행사입니다. 자동차를 타고 입구에 들어서면 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메이플 시럽을 수십 년간 만들어온 어니 선생님이 메이플 통나무를 여러 개 갖다 놓고 어떻게 구멍을 뚫어 수액을 받는지 자세히 설명해 줍니다.
어니 선생님의 설명이 끝나 숲으로 들어서면 “뉴욕에서 메이플 수액이 제일 빠르게 흐르는 곳”이라는 표지판과 함께 커다란 나무에 양동이가 걸려 있고 메이플 수액이 수돗물 같이 콸콸콸 흘러 넘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동차에서 한 이웃이 소리칩니다. “아이고 아까워라, 거기 빨리 양동이를 새로 바꿔야겠어요. “가까이 가서 보니 메이플 나무에 박은 파이프에 펌프를 달아 물이 계속 흐르도록 한 무대 장치였네요. 아무튼 재미 있었습니다.
짝퉁 메이플 수액이 흐르는 곳을 지나 숲 깊숙이 들어가니 ‘COVID CAVE’란 사인이 보이고 그 옆 쪽으로 동물 뼈다귀와 함께 집채 만한 바위 옆에 반바지에 짐승 털 가죽을 몸에 둘러싼 나이든 원시인 두 명과 소년 원시인 한명이 앉아서 불에 열심히 소시지를 굽고 있습니다. 장난기 많은 이안 할아버지 작품입니다. 쏘시지 옆에 토마토케첩이 보이 길래 내가 “원시인도 케첩은 좋아하나 봐요?” 하고 놀리니 껄껄걸 웃으시며 “그렇구 말구”합니다.
원시인을 지나니 숲 오른쪽 길에 초기 개척자의 모습을 한 가족들이 불을 피워 냄비를 놓고 수액을 끓이는 모습이 보입니다. 숲 왼쪽 길에는 나무에 걸린 수액이 담긴 양동이를 열심히 나르는 가족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반대편 숲 길에서는 한 가족이 말이 끄는 수레로 메이플 수액을 드럼통에 담아 나르고 있습니다.
숲에서 빠져 나오면 학교 앞 메이플 시럽 만드는 헛간에 다다르게 되는데 헛간에 김이 무럭무럭 나면서 커다란 팬에 메이플 수액이 보글보글 끓고 있고 한 쪽에서는 몇몇 아이들이 완성된 메이플 시럽을 예쁜 유리 병에 담고 있습니다. 클라이 선생님은 문 앞에 서서 지나가는 손님들에게 어떻게 메이플 수액을 끓여 시럽으로 완성되는지 설명하십니다. 클라이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앞으로 조금만 가면 드디어 바로 만든 메이플 시럽을 볼 수 있습니다. 해맑은 여자 아이들이 “Happy Spring!”하며 따뜻한 인사와 함께 바로 만들어 따끈따끈한 메이플 시럽 병을 자동차에 있는 이웃들에게 선물로 건네면 다들 행복해서 어쩔 줄 모르십니다.
메이플 시럽을 받아 나가면 한쪽에서 웨스트 버지니아 출신의 존 할아버지가 “ Country road, take me home to
the place I belong, West Virginia, mountain mama……” 를 부르시고 그 이어 톰이1970년대를 풍미한 피트 시거 의 포크송 “
This land is your land, this land is my land, From California to the New York island……” 를 부르면 옆에서 다른 형제들이 벤조, 바이올린, 기타, 더블 베이스, 클라리넷등으로 함께 연주하며 흥을 돋습니다. 역시 벤조, 바이올린이 빠지면 포크 송 맛이 안 납니다.
정겹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포크 송을 함께 흥얼거리고 나오면 참나무 장작을 때 갓 만들어낸 맛있는 팬케이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빈이도 팬케이크 대열에 합류해 열심히 만듭니다. 다시 한번 “Happy Spring!”하며 밝은 웃음으로 자매들이 자동차에 팬케이크을 건네면서 오늘의 메이플 시럽 이벤트는 막을 내립니다.
오늘 하루 250대의 차가 다녀 갔습니다. 행복한 미소로 가득 찬 자동차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며 추위로 움츠렸던 제 마음도 따뜻한 봄날의 행복으로 가득해 지면서 이 맘 때가 되면 제가 제일 즐겨 부르는 스웨덴 노래를 흥얼거립니다.
“봄바람 불고, 새싹이 돋고 따스한 햇살 눈 녹이네
실개천 급히 흘러내리고 빛나는 바다 향해 가네
내 혼아 깨어 노래하라 새로운 삶이 꿈틀이네
슬픔과 추위 가버리라고 나팔소리 울리네
내 혼아 깨어 노래하라 대지가 새로 태어나리
슬픔과 추위 가버리라고 노래소리 들리네”
박성훈/미국 부르더호프 공동체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