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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벗님글방

하나님나라를 찾는 길은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등록 2020-06-05 10:29수정 2020-06-05 10:47

동짓날 아침, 내 앞의 또 다른 나를 마주했다. 어제 저녁, 문구점에 가서 구입한 일기장을 한동안 바라본다. 정지된 생각을 글로 적는 일은 날마다 일어나는 변화의 과정에서 순간을 잠시 보관한다는 의미에서 호기심과 설레임을 갖게 한다. 신나는 일이다. 앞으로 매일, 매순간 글이 쓰고 싶어질 땐 메모하리라. 낙서하리라. 나만의 시간, 고백 그리고 표현이 일기장에 남겨지겠구나. 범용일기(凡溶日記)라 하자.

새벽에 눈이 떠짐은 나의 의지와 무관한 일이다. 의지와 무관하게 주어지는 자연스러움은 커다란 축복이자 은혜다. 고요한 새벽, 나와 마주한 채 호흡을 가다듬고 또 다른 세계를 맞이하는 일. 그리고 가족에게 남기는 영적 여행 과정의 독백은 영적 울림의 공감대를 공유하는 귀한 일이다. 나의 떨림이 때론 울림이 되는 것이니. 읽고 싶은 책을 읽고 밑줄 한 번 긋는다. 그리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긴다. 곱씹는다. 수학 내용을 다시 한 번 바라보며 집약된 사고의 또 다른 움직임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본다. 이 내용으로 아이들에게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까? 언어와 기호 그리고 각종 생각의 표현들이 오롯이 순간 정지된 일기장에 담겨 삶의 여정 틈새를 바라보게 한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이다. 동짓날 아침. 낮이 짧게 느껴지지 않을 거란 기대는 왜 생기는 걸까?

내게 있어 자유란 무엇인가?

氣, 프뉴마, 성령 등 다양하게 불리는 나의 또다른 나의 근원과 완전한 하나됨, 아니면 하나 되는 과정, 그걸 자유라 부를 수 있을까? 너무 추상적인가? 수학자들 중 일부는 수학의 본질을 자유라 칭하면서 자유로움을 향해 사고의 영역을 지속적으로 확장시켰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처럼.

신앙을 갖고 있는 나는 신앙에서 자유로운가? 수학을 공부하면서 학생들과 마주한 나는 수학에서 자유로운가? 도대체 자유로움은 실체가 있기나 한 것인가? 관념 속에 스스로 만들어 놓은 자유로움의 언어에 얽매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요한복음 7장에 실린 내용을 묵상한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서의 말씀대로 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자유에 목마른 나.

신앙과 수학의 영역에서 호기심과 궁금함이 자꾸 솟아나오는 것을 보면 목마른 모습이 뚜렷하다. 예수께서 함께하자 그러신다.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 나와 목마름을 해소시켜 주신단다. 이거 믿을 만하지 않나?

생명(生命)이라는 단어가 고정되어 있다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겠지만 끊임없는 氣의 흐름이자 성령과의 교제가 생명의 또 다른 본질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면 나의 목마름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위고 샘솟는 물은 내가 발견하는 것으로 나를 적시게 될 것 아니겠는가? 여행자에게 이처럼 기쁜 소식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전남 순천사랑어린학교 공동체의 밥상 모임
전남 순천사랑어린학교 공동체의 밥상 모임
어제 늦은 밤, 큰소리에 잠에서 깼다.

잠에서 깬 상태에서 상황을 보니 아내와 큰딸이 서로 한치 물러섬 없이 서로의 입장을 작지 않은 소리와 감정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싸우고 있었던 거다. 결국 큰딸의 울음과 아내의 설득의 과정으로 잠잠해졌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잠에서 깨서 이를 바라보았던 가장인 나는 20여분 동안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서로의 감정을 추스르기를 바라면서…

밖에서 추위에 떨고 나서 집에 들어오니 올라왔던 에너지 수준이 비슷해졌다. 상황을 듣자하니 큰딸의 입장도 이해가 되고 아내의 입장도 이해가 되었다. 둘다 서로를 위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해가 서로 부족한 상황에서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서 일어난 충돌이었다.

4명의 가족 중 홀로 남성인 나는 아내와 딸이 충돌할 때 참으로 처신하기 힘들다. 편을 들었다가는 쌍방에게 공격당하기 일쑤고, 가만히 앉아 있다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판단을 강요당하기 일쑤여서 상황을 지켜보다가 밖으로 나가는 경우가 잦다.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왜 나갔는가 라며 나를 당황하게 만드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지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모습에 어리둥절하다. 거 참…

나는 우리 가족이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건강하니까 서로 부딪히고 움직이며 활동하는 거 아닌가? 이런 부딪힘과 움직임 그리고 활동함에 적응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아직 적응중이지만 지나고 보면 웃음이 난다. 싸울 때는 ‘이거냐? 저거냐?’인데 싸우고 나서는 ‘이것도! 저것도!’로 바뀌어 있다. 그만큼 단단해지고 유연해지며 수용의 울타리가 넓어지고 있다는 거겠지? 주여! 우리 가족의 건강함을 오래 지속시켜 주시되 제가 밖으로 나가야 하는 황당한 상황은 되도록 적게 벌어지게 해주옵소서!

성탄 전야 예배는 두 딸이 다니는 교회에서 드렸다. 아내와 내가 다니는 교회는 두 딸이 다니는 교회와 다르다. 두 교회의 성격이 다르고 분위기도 많이 다르지만 낯설지 않다. 온 천지가 교회요, 예배처라는 내용은 듣는 이에게 심한 비약일 수 있겠으나 서로 다른 예배 장소가 친근하고 어색하지 않음은 감사한 일이다. 두 딸이 다니는 교회에서 예배드리며 이런 기도를 드렸다. ‘저를 통해 세상을 보시고 일을 하시되 저도 신바람 나게 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사람들이 모인 곳, 생명이 있는 곳, 모든 만물이 있는 곳은 어디나 하나님의 숨결이 스며 있다. 그 숨결의 파장이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한 것은 그걸 바라보는 나의 관점의 문제일 뿐! 다양한 안목으로 그것들을 바라보는 안목이 생긴다는 것은 기적이요, 은혜다. 주께서는 그런 안목을 내게 허락해 주시고 계심을 느끼기에 감사하다. 내 힘만으로는 살 수 없다. 주께서 주시는 힘으로 살 때가 더 많아지고 있다. 자연스럽게 그 과정으로 진행되고 있다. 신비와 비밀을 조금씩 조금씩 알아차리며 살아지는 일. 복된 소식에 바울과 마가의 해석이 달랐던 것은 오히려 내겐 감사다. 바울과 마가 모두는 각자의 생각으로 예수를 해석했고 바라보았다. 그 두 사람의 시각이 달라 내겐 감사한 일이다.

성탄절 아침, 큰 선물을 받았다.

바울 선생이 고백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 나라와 예수께서 선포한 하느님 나라는 같은 의미일까? 아니면 서로 다른 나라일까? 몇 줄의 설명으로 대신할 수 있는 성질의 질문이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질문을 던져본다. 숫자 ‘1’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지를 묻는다면 서로 다른 얘기를 하지 않을까? 물 한방울과 바닷물 전체가 같은 의미일 수는 없으나 ‘하나’라는 개념으로 접근하면 같을 수 있다. 숫자 ‘1’은 추상화된 기호이기에 다양한 생각들을 담아낸다. 상징이기도 하다.

공과 도너츠는 눈에 달리 보인다. 그런데 개수로 보면 똑같이 한 개다. 그런데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즉, 연결 상태가 같은가 다른가로 본다면 완전히 다른 두 물건일 수 있다. 바울 선생이 고백하고 선포한 하느님 나라와 예수께서 선포한 하느님 나라가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나’다. 즉, 내가 보는 하느님 나라는 어떤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일 수 있기에 그러하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나의 고백이어야 한다는 말이겠다. 누군가에 의해 설명되어진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나의 고백에 의해 선포되어진 하느님의 나라여야 한다는 말이다.

바울선생이나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를 그들의 시각으로 바라보았고 경험했으며 체험했다. 그 하느님의 나라는 나와 관련이 있다. 언어에 담겨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지금 여기에, 내 앞에 있지 않는가? 하느님의 나라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나’를 찾는 여행이겠고,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는 과정은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인가를 찾아가는 과정이기에 현재 진행형이다. 끊임없이 확장되는 하느님의 나라! 신난다. 감사한 일이다.

순천사랑어린학교공동체 박진호 글

이글은 글 기부를 모아 순천사랑어린학교 김민해 목사가 펴내는 <월간 풍경소리>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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