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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벗님글방

눈 내리는 날의 비장함과 편안함

등록 2008-01-15 18:05

[소엽산방] 수도 서울살이 ‘수도승’ 원철 스님

낮눈이 진종일 내린다. 이것도 드문 풍광이다. 틈만 나면 창 밖으로 눈과 마음이 돌아가기 마련이다. 눈을 가장 좋아하는 것이 강아지와 어린애들이라 하지만 어른 역시 동심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도심에 옮겨 심은 소나무도 흰눈을 이고 서있다. 이런 날은 모두가 시인이 된다. 눈 밟으며 한밤중이라도 걸음걸이를 어지럽게 하지 말라

청허휴정(淸虛休靜1520-1604)선사의 ‘눈을 밟으며(踏雪)’라는 선시를 가만히 읊조린다. 당신께서 묘향산(일명:서산)에 오래토록 머문 까닭에 서산(西山)대사라는 이름으로 대중에게 알려졌다. 답설야중거(踏雪夜中去)

불수호란행(不須胡亂行)

금일아행적(今日我行績)

수작후인정(遂作後人程)

눈을 밟으며 한밤중이라 하더라도

모름지기 걸음걸이를 어지럽게 하지말라.

오늘 내가 남겨놓은 이 발자국은

마침내 뒷사람들의 이정표가 되리니. 이 시가 유명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백범 김구 선생의 좌우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 자체가 누구나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을 다시한번 되돌아보게 만들어주는 명문인 까닭이다. 인천대공원 백범광장에는 이 선시를 돌에 커다랗게 새겨놓고 오가는 이들에게 무언의 가르침을 내리고 있다. 이노무스키,이 죽일 놈의 보드…,기발한 스키장 가게 이름들 벌써 올 겨울들어 몇번 째 흰눈을 만났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그래도 적다고 할 수 없을 만큼이다. 올해는 눈이 귀한 편이라고 했다. 전국의 스키장이 성업 중이라는 소식도 들려온다. 주말법회를 하기 위해 들른 사찰 근처에 있는 스키장 역시 붐비기 시작했다. 인근 스키대여점은 말할 것도 없고 주변 상가까지 생기가 돌고 있다. 가게의 간판이름도 주인의 개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조선스키’는 짚신분위기의 조선시대와 첨단의 스키가 조합된 부조화의 이미지 조화가 돋보인다. 'SKY'는 스키와 하늘이 함께 어우려져 장쾌함을 느끼게 해준다. ‘이노무스키’는 일본어투이지만 쌍소리를 연상시키는 자극성으로 인하여 그 이름을 오래토록 기억하게 만든다. ‘에스키모’는 ‘스키’라는 글자가 중간에 있는 것을 발견해내는 대단한 통찰력을 자랑한다. ‘이 죽일 놈의 보드’는 그 거르지 않는 표현 때문에 돌아가는 길에 그 간판을 다시 한번 보게 만들어 준다. 눈 오는 날 세 종류의 납자 원통법수(圓通法秀 1027-1090)선사는 눈 내릴 때 세 종류의 납자가 있다고 했다.

가장 못난 승려는 화롯가에 둘러앉아 먹고 떠들면서 놀고, 중간쯤 되는 승려는 먹을 갈아 붓을 들고 시를 지으며, 가장 우수한 승려는 승당 안에서 좌선을 한다고 했다. 덧붙인다면 대중을 시봉하기 위하여 후원에서 살림하는 원주스님은 눈치우고 길 뚫을 일부터 걱정할 것이다. 해인사 극락전의 도견노장님은 오대산 월정사에서 사시다가 가야산 해인사로 내려온 결정적인 이유가 정말 지겹도록 내리는 눈이 너무 싫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내 눈에는 해인사 눈도 오대산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역시 만만찮다. 선각자는 사부대중을 위해 눈을 치워야 하는 걱정 뿐만 아니라 후학을 위한 공부 근심 역시 가득하기 마련이다. 눈길을 걸으면서도 남는 발자국까지 걱정해야 한다. 사실 그냥 당신 갈 길만 유유히 바르게 가기만 하면 될 일이다.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판단은 뒷사람의 몫이다. 설사 앞사람의 발자국을 똑같이 그대로 따라 간다고 할지라도 그건 같은 길이 아니라 뒷사람이 새로 가는 길일 뿐이다. 너무 서산 같고 백범다운 무거움으로 인하여 그 선시가 때론 부담스럽다. 그래서 사람들은 편안함의 언어를 찾게 된다. 개가 달려가니 매화요, 닭이 걸어가니 대닢이라 작야초설박(昨夜初雪薄)하니

금조후정소(今朝後庭素)로다

구주매화락(拘走梅花落)이요

계행죽엽성(鷄行竹葉成)이라

지난 밤에 첫눈이 엷게 내리니

오늘 아침 뒤뜰이 하얗게 되었네.

개가 달려가니 매화꽃이 떨어지고

닭이 걸어가니 대닢이 생기는구나 뒤의 두 행 ‘구주매화락(拘走梅花落) 계행죽엽성(鷄行竹葉成)’은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실려있다. 세조실록을 편찬하는데 간여한 채수(蔡壽)가 그의 손자 무일(無逸)과 주고 받은 댓구이다.

어찌보면 대결구조인 두 행에 누군가 앞의 두 행을 더하면서 내용자체를 아주 부드럽게 바꾸어 버렸다. 흰눈 위에 새겨진 강아지 발자국을 매화가 떨어지는 것에, 닭발자국이 찍힌 것을 대나무잎이 피어나는 것이 비유한 그 의미가 더욱 서정적으로 되살아난다. 눈 내리는 날, 두 선시를 함께 음미하며 비장함과 편안함이라는 양변의 세계를 동시에 거닐어보자. 그렇게 하면 제대로 된 중도(中道)세계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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