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울린 이사람]
한 전기공을 공사를 하는 모습. 사진 박종식 기자
필자인 소백산 산위의마을 촌장 박기호 신부. 사진 조현
‘야곱’ 형제를 만난 것은 본당 주임신부 때였다. 고압 전신주에 올라가 일하는 노동자였는데. 어느 날 감전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수개월 뒤 지체장애자가 되어 돌아왔다. 불편하고 답답한 몸도 추스릴 겸 함께 낚시를 가곤 했다. 입질이 끊겨 막걸리를 한잔 나눌 때 그가 말했다.
“막걸리만 보면 생각나요. 어릴 적 광산촌에 살던 우리는 너무 가난했어요. 어머니가 양조장 술지게미를 얻어다가 죽을 써주곤 했는데, 한번은 우리 형의 담임이 형을 보고 ‘술을 먹고 왔다’면서 마구 때렸어요. 나는 화가 나서 선생님을 찾아가 막 울면서 항의했었어요. 신문까지 났다 하더라고요.” 아 순간, 청년 시절 그 기사를 보며 눈물을 훔쳤던 기억을 떠올리며 전율했다.
야곱 형제는 나로 하여금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심어준 사람이다. 순박하고 정직하면서도 성실한 그를 대할수록 성자가 따로 아니다고 느껴진다. 학교를 못 간 소년으로 상경했던 그는 신문팔이로 시작해서 전기공이 되었다. 집안의 기대주였던 형은 총학생회장도 했다. 장애자로 살아오며 병을 앓던 여동생이 있었는데 작년에 세상을 떠났다. 여동생의 죽음에 어찌 그렇게도 서럽게 울던지… 노동일로 모은 월급은 종종 형님의 카드빚과 노모를 돌보는 데 들어갔다.
묵묵한 그는 정석으로 사는 순리의 사람이다. 일용노동자라면 소득신고도 제대로 안 하던 시대에 그는 수당까지도 모두 신고할 만큼 원칙주의였다. 감전 사고를 당했을 때 납세 근거에 따라 고액의 산재보상을 받게 되어 집도 마련했으니 인과응보다. 그에겐 자녀가 없었다. 좋다는 보약도 치료도 효험이 없었다. 직업병이 분명했지만 그는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상의 끝에 딸을 입양해서 살고 있다.
하늘의 축복이란 자신의 삶으로 짓는 것이라 믿게 된다. 지금도 종종 우리 공동체를 찾아온다. 그를 만나면 내게 좋은 일이 일어나는 예감을 받는다. 누가 사제인지 모르겠다.
박기호 신부(예수살이공동체 산위의 마을)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