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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벗님글방

당신은 대화할 때 어떤 타입?

등록 2013-08-14 10:25

소백산 산위의마을.   사진 조현

‘지상에서 천국처럼!’ 우리 공동체의 격문(檄文)이다. 그러나 정작 마을의 삶에 천국은 없다. 소유를 풀어버린 생활임에도 몸을 쓰는 노동과 인간관계의 갈등으로 쉽지 않다. 가족들은 ‘지상에서 천국처럼!’을 ‘몸은 힘들어도 마음만은 평화롭게!’로 바꾸자고 한다.

 공동체의 평화로운 삶의 엔진은 ‘좋은 대화생활’이다. 서로 미워하고 뒷말로 허물을 들추기까지 한다면 공동생활은 벅차다. 영국의 브루더호프 마을에는 ‘사랑으로 직접 말하기’라는 원칙이 있다. ‘자리에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일절 화제로 올리지 말고 본인과 직접 이야기하자!’는 약속이다. “네게 잘못한 형제가 있거든 그와 단둘이 만나 화해하라. 듣지 않거든 다른 사람을 데리고 가고, 그래도 거절하거든 공동체에 알려라.” 예수의 산상설교 가르침을 공동체 헌장으로 삼은 것이다.

 오래전 필자가 그 공동체에 갔을 때였다. 작업을 하던 중 약간 멀찍이서 일하는 이를 가리켜 물었다. “저분은 어느 나라 출신인가요?” “본인에게 직접 물어볼 수 있습니다.” 당황했지만 ‘직접 말하기’ 수행의 치열함을 느끼게 했다. 공동체 마을이나 직장에서, 혹은 부부간에 서로 감정이 틀어졌을 경우 우선 말을 안 하게 된다. 

섭섭하거나 괘씸한 감정으로 타인에게 그를 비난한다면 관계는 더 고약해지지 않겠는가? 그러지 말고 둘이 만나 자초지종을 듣고 말하고 풀고 화해하라는 강제조항이 ‘사랑으로 직접 말하기’이다. 우리 마을에서는 ‘부재불급’(不在不及)이라 부른다.

 그런데 솔직함은 좋은 것이지만 감정이 생길 때마다 직접 말한다는 것이 우리 정서에도 맞을까 의문이다. 나는 그렇게 못하고 산다. 유교적 전통에서는 순명만 있지 대화는 없었다. 기분 상하고 심기 불편하다고 해서 하고 싶은 말 다 하면서 살아갈 수 없다. 나름의 문제해결 방식도 있다. 우선은 당분간 숨을 고르고 감정의 호흡을 재운다. 시간의 흐름이라는 자연소멸을 믿는 지혜다. 그렇더라도 ‘흉금을 털어놓고 말하는’ 것에 버금갈 수는 없다. 흉금(胸襟)이란 ‘가슴속 흉, 생각 금’으로 마음속에 쌓인 심정을 솔직하게 풀어놓는 가슴앓이 치유법이다.

<한겨레> 그림 자료

 생각건대 대화의 원리와 소통의 핵심을 깨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가르쳤다. “씨를 뿌렸는데 어떤 것은 길바닥에, 어떤 것은 가시덤불에, 또 다른 것은 흙에 떨어졌다. 길에 떨어진 씨는 즉시 새가 쪼아 먹었고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은 싹은 텄지만 자라날 수 없었고, 흙 위에 떨어진 것만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었다”는 이야기다.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이해에 관한 원리로서, 경전을 듣건 사건을 경험하건 사람마다 체험하게 되는 감수성이 다르다는 것이다. 무엇이 좋은 대화고 나쁜 대화인지 알 것이다.

 씨는 흙에 담겨야만 싹을 틔우듯이 대화라는 것도 듣는 이와 교합되어야 소통된다는 점에서 같은 이치다. 씨 뿌리는 자가 밭을 보지도 않고 아무렇게나 뿌려서는 안 된다. 말하는 사람이 싫으면 말이 들리지도 않게 된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글쎄, 그래도 난 싫어!” 하면 그만인 것이다. 왜? 아무튼 싫어! ‘어쩐지 싫다’는 막연함보다 더 큰 판단은 없다.

 논리와 객관은 이성이지만 수용은 감성이다. 이게 지역감정, 정치의식, 투표행위에서 ‘정의’가 무력하고 소외되는 이유의 정체다. 정보통신기술(IT)은 세상을 지배하지만 감성(IS)은 마음을 소유한다. 씨만 뿌렸지 길바닥이나 가시덤불에 떨어진 거와 같다. 그래서 진리도 정의도 인정과 친분 앞에 무력한 것이다.

 ‘언이인격’(言而人格)이라 했다. 공동생활에서의 대화 수행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직장도 공동체다. 시간이란 일생 동안 매 순간 단 한 장씩만 사용하는 쿠폰과 같다. 20년 동안 같이 일해왔다면 동행한 시간만으로도 공동체 생활 10년 이상이 되는 것이니 직장은 마땅히 관계의 공동체이다. 일터에서 귀하게 만난 이는 서로 인정과 배려를 나누는 공동체로 살아갈 의무가 있다! 좋은 공동체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 겸손과 섬김의 대화 기술 습득에 애쓸 일이다.

 대화에는 예의와 배려가 요구된다. 자신은 ‘착한 경청자’여야 한다. 말이 모두 끝날 때까지 말을 자르지 않고 듣는 훈련으로 하나의 촛불을 돌려가며 자기 앞에 촛불을 놓고 있는 사람만 말하도록 하기도 한다. 표현이 서투른 구성원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공동체에 대한 그들의 애정까지 서투른 것은 아니다. 논리성이 없고 다소 횡설수설하는 형이라면 더욱더 애정과 인내로 들어주고 알아들은 내용을 확인해두는 것도 배려다.

소백산 산위의마을.  사진 조현

 대화하고 있는 자신의 태도를 관조할 수 있어야 한다. ‘좀더 친절하게 말하는가?’ ‘말을 툭툭 자르지는 않는가?’ ‘희망적인 의기투합보다는 회의적으로 말하지 않는가?’ 자기 말의 정당성 입증을 위해 계속 들이대는 습관, 공격적인 말투, 모든 해답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장광설, 이런 습관들에는 모두 말이 많다는 특징이 있다.

 대화의 자세는 인격 존중이며, ‘생각의 공유’가 대화의 목적임을 잊지 말자. 그러므로 말의 내용은 충분히 검토된 것이어야 하고, 표현은 낮으면서도 분명하게, 태도는 겸손하고 친절하면서도 절도가 있어야 하겠다. 대화는 삶의 나눔이고 즐거움이다. 유머는 공동생활의 허브다. 내 마음이 열려 있음의 반영이기도 하다. 한국의 한 수도원에는 “수도자는 대화에서 유머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규칙이 있다. 이색적이다. 유머가 있어 더욱 유쾌한 대화는 농부가 고운 땅을 보면서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 그는 어떤 것을 뿌리고 제안해도 구성원들이 마음을 열어 받아주며 도움도 주려고 할 것이다.

 자는 일, 젖 빠는 일, 성교, 욕심, 존재감, 그리고 말(언어)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태생적 본능으로서 배우지 않아도 작동되는 능력이다. 그래서 교육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가정, 학교, 어디에서도 대화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필자도 그런 교육을 받은 경험이 없다. 맹자께서는 “옷은 단정히 입고, 걸음은 똑바로 걷고, 말은 바르게 하라”고 가르치셨다.

 제도교육이 없던 시대에도 가정에서, 마을에서, 서당에서 어른들에게 야단맞고 벌을 받으며 말버릇과 예의를 배우고 익혔다. 이제 전국민 고학력 시대인데 어찌 예의와 염치도, 소통도 없고, 왜 영화와 인터넷에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욕설이 난무할까? 다시 학교를 없애야 하지 않을까? 인생을 살아가는 데 영어는 필수라고 여기면서, 관계적 삶의 기술인 대화법을 배우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은 생의 불행에 대해 무지를 방관하는 것과 같다. 교원 양성에는 물론, 초등학교부터 대화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본다.

 참, 생각났다! 사교육이 빠르다. 수시모집 면접이나 기업체 입사시험에서 대화법을 검증하면 되겠다. 토익을 제치고 대화학원이 선풍을 일으킬 것이다. 그렇다고 강사나 교수는 대화가 되는 사람일지는 알 수 없다.

  박기호 신부(소백산 산위의마을 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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