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짱철도 사진 <한겨레> 자료
칭짱열차의 철길 그리고 오체투지의 흙길
티벳으로 가는 칭짱열차의 시발점은 칭하이(淸海)성 시닝(西寧)이었다. 지인은 차표를 예매해놓고 대합실 입구에서 우리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따라 한문으로 ‘청진(淸眞)’이라고 표기된 무슬림이 운영하는 식당으로 갔다. 그들은 이슬람 모스크도 청진사(淸眞寺)라고 불렀다. ‘사(寺)’라는 글자는 종교의 영역을 가리지 않고 차용되고 있었다.
식당 벽에는 ‘술을 팔지않는다’고 보란 듯이 큼직하게 써놓았다. 지역을 대표하는 음식이며 또 출신지에 관계없이 누구나 먹을만하다는 국수를 추천했다. 한 그릇을 맛있게 비우고 나니 쌀쌀한 날씨로 인한 경직된 몸과 여행이 주는 들뜬 마음이 함께 누그러졌다.
밖은 이미 깜깜하다. 도대체 얼마나 멀길래 24시간 동안 기차를 타야한다는 것인지 제대로 실감나지 않았다. 서울과 부산 사이를 3시간 안에 달려야만 직성이 풀리는 우리들에게 호기심 반 긴장감 반을 불러일으켰다. 침대칸에 여장을 풀고 잠을 청했지만 쉬이 눈이 감기지 않는다. 비몽사몽간에 그 열차는 나그네들의 잠을 깨우지 않을 만큼 조용히 밤새 편안하게 달려 주었다.
칭짱철도 사진 <한겨레> 자료
창밖에는 추석이 가까워졌음을 알리는 약간 이지러진 보름달이 허공에 매달린 채 계속 열차를 따라왔다. 해발 수천미터의 고산지대인지라 간식으로 준비한 과자봉지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이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고 일행 중 일부는 두통과 어지럼증을 호소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참배해야 할 의무가 있는 성지인지라 그 정도의 수고로움은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일이였다. 티벳불교의 중심지 라싸(拉薩)는 이런 통과의례를 치루어야만 갈 수 있는 ‘높은(?) 곳’이었다.
이른 아침에 들른 시내 중심가의 조캉사원(大照寺) 앞에선 수많은 남녀노소가 모여 0.5평의 자기 방석 위에서 온몸을 바닥에 내던지며 절을 하는 오체투지(五體投地)의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한 명 혹은 서너 명이 하는 오체투지 모습은 이전에도 여기저기서 더러 보았다. 하지만 이처럼 대규모 인원이 한 공간에서 절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 경이로움이었다. 뿐만 아니라 사원의 참배코스인 둘레길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온몸으로 절하며 돌고 있는 순례객을 만나는 일도 다반사였다.
티벳에서 오체투지는 별스러울 것도 없는 일상화된 수행법인 탓이다.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 살면서 절 수행을 통해 녹록치 않는 현실을 이겨냈고, 때론 시절이 만들어 낸 정치적 모순을 향해, 침묵의 시위 아닌 시위를 해왔던 것이다. 그것은 티벳불교가 가진 또다른 힘이요, 내재된 생명력이었다.
칭짱철도 사진 <한겨레> 자료
낡은 헝겊가죽으로 앞치마를 두르고 무릎과 팔꿈치 그리고 손바닥에 덧된 보호장구를 갖추었다고 할지라도 땅바닥에 부딪히는 이마에는 이미 굳은 살이 박혀 있는 스님. 그와 결국 눈이 마주쳤다. 절을 하면서도 입에서는 연신 ‘옴 마니 반메 훔’이 끊어지지 않았다. 그의 오체투지는 우리를 대신하여 발 디디고 서 있도록 해주는 땅를 향한 감사의 표시처럼 느껴졌다.
대지는 그 화답으로 흙 위에 존재하는 사람에게 영감(靈感)의 원천을 제공해 왔을 것이다. 그런 경건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순례객이 아니라 관광객으로 전락해버린 내모습을 자꾸만 돌아보도록 만들었다.
그 순간 몇 년 전에 봤던 작품이 뇌리를 스쳐갔다. 달리는 열차와 절을 하면서 기어가는 순례자의 모습을 동시에 포착한 어느 외신기자의 사진 한 컷이었다. 새로 만든 철도 위로 번쩍이는 기차가 그 위용을 자랑하는데, 철길과 나란히 뻗은 길을 따라 오체투지로 성지순례에 나선 남루한 참배객의 모습이 그림처럼 정지된 사진이었다.
정치와 종교, 기술과 신앙이라는 두 명제가 모순과 조화를 이루면서, 21세기 대륙 한 켠에서 볼 수 있는 삶의 양면을 한 장으로 압축한 명품이었던 까닭이다.
정치 경제의 쇠바퀴가 아무리 빠른 속도로 구른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티벳의 현안을 일거에 해결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느리디 느린 오체투지 기도 역시 그들이 원하는 바를 찰라에 얻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칭짱열차는 오늘도 씩씩하게 달린다. 더불어 먼지 폴폴 날리는 길 위의 오체투지 행렬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