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 산위의마을 촌장 박기호 신부 사진 조현
서울 잠원동 성당에서 혼인미사를 주례하기로 약속되어 있어서 마을을 나섰다. 송근종 다미아노 형제의 아들이 결혼한다. 다미아노 형제는 벌교중학교 동기인데 그가 서울 생활 중에 세례를 받을 때 당시 신학교에 다니던 내가 대부를 섰고 세례명도 나와 같이 다미아노로 했다. 그래서 친구지만 늘 ‘대부님’이라고 불러준다.
다미아노 형제는 보일러 설비와 소규모 리모델링 사업을 하는데 성당 일에도 열심이다. 예수살이 공동체가 서울 합정동에 150평짜리 낡은 수도원 건물을 빌려 사용하게 됐을 때 수리를 도맡아했고, 산위의 마을이 자리를 잡았을 때도 단양까지 오가면서 일을 해주었다. 설비가게를 새로 낼 때는 상호를 ‘예수살이 공동체’의 약자인 ‘예공설비’라고 붙일 만큼 우리 공동체의 팬이다. 오랜 세월 늘 신세만 지고 살았는데, 그가 며느리를 보게 되었으니 마땅히 주례를 서야 할 일이다.
서울에서 회의나 모임이 있을 때면 오후 약속이 아닌 경우 마을에서 당일 날 출발하기가 부담스럽다. 그래서 약속에 늦지 않으려고 꼭 하루 전날 상경하는데, 주례를 서는 경우라서 출발 전에 이것저것 챙기고 있다. 특별히 의복과 신발 등을 신경 쓰게 된다. 이발은 사우나에 가서 하면 될 거라 생각하고 로만칼라 셔츠와 양복을 챙겨 입었다.
산촌에 들어와 산다고 해도 신분이 가톨릭 신부이니, 신부 복장을 해야만 결례가 안 되는 자리가 있다. 그래서 춘추복 한 벌과 구두 한 켤레를 남겨두었는데, 1년에 두세 번 정도 입는 것 같다. 금년 들어 두 번째 챙겨 입는 중이다.
늘 흙과 함께하는 생활이기 때문에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진흙탕이고, 건조하면 건조한 대로 먼지가 풀풀 난다. 어떻거나 구두는 몇 걸음도 못가서 흙으로 뒤덮이니 도저히 신발 구실을 못한다. 구두를 얼마 만에 꺼내는지 까만 구두에 희끗희끗 꽃이 피어 있다. 구두에도 곰팡이가 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물파스처럼 구부러진 구두약을 꺼내 바르고 있는데 뒤에서 가족 누군가가 “험, 곰팡이가 슬었네여! 구두님 대접을 안 하니까 말이지……” 하며 킥킥댄다.
암튼 양복이건 구두건 평소에는 문제가 없는데, 오늘처럼 격식을 차려야 할 때는 정말 구차스럽다. 어쩌다 한번이니까 그러려니 하고 챙기지, 일주일에 한 번씩 하라고 하면 못할 것이다. 편하게 사는 것이 최고다.
격식을 무시하고 사니 마음이 편하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마을에 와서 사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누구나 그렇게 된다. 서울과 대도시에서 살던 아이들이 부모를 따라 입촌하거나 생활유학을 오게 되면, 마을에 살러 들어온 순간부터 형식이란 것이 해체되어버린다. 고무신을 신고 학교 가는 것을 예사로 여기는가 하면, 날이 쌀쌀한 아침에 간이 담요를 배트맨처럼 어깨에 두르고 가는 애들도 있다.
어떻게 보면 자유이고 자연이고 야성이고 내가 평소에 그렇게 강조하는 생활인데, 곰팡이 핀 구두를 보니 그래도 이건 좀 지나치지 않나 싶다. 책임자 신부인 나의 폼생이 좀 그러면 가족들이나 아이들이라도 깔끔하고 스마트해야 할 텐데, 이건 뭐 그 신부에 그 식구들이다. 하기야 각자 마음을 내려놓고 제 폼대로 살려고 온 사람들인데…… 아이든 어른이든 내 입맛대로 요구할 수는 없다.
사실 나도 읍내나 서울로 나가면서 털고무신을 신고 나설 때가 종종 있다. 얼마 전에는 연세대 신학대학 특강 초대와 CLC의 목요신학 강좌가 있어서 전날 상경하려고 마을을 나섰는데, 가곡면 가까이 갔을 때에야 내가 털고무신을 신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했다. 다시 마을로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가버렸다. 생활한복을 입고 있으니까 패션에 맞는 선택으로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다행히 두 강의 모두 수강생들은 내 용모의 수려함에 반했는지, 얼굴만 쳐다볼 뿐 신발을 보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가 생각난다. 1967년 서울로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는데, 비가 오는 어느 날 고무신을 신고 학교에 갔다. 그 시절 고등학생들은 발목까지 올라오는 학생화를 신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나도 그랬다. 그런데 아침부터 비가 오자 자연스럽게 고무신을 신고 바지를 두 켠 정도 걷은 채 집을 나선 것이다.
교문에 들어서자 생활지도부 선배들이 나를 불러 세우기는 했으나 기가 찼는지 할 말을 잊었고, 친구들은 “한번 신어보자”며 웃고 난리를 쳤다. 그렇게 비가 오는 데도 나 외에는 모두가 구두를 신고 왔다. 덕분에 완전히 ‘컨추리 보이’로 찍히고 말았지만, 나는 실용주의자였다고 생각한다.
시골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는 비가 오면 마땅히 운동화를 아끼고 고무신을 신고 학교에 갔다. 모두 그랬다. 나처럼 작은 애들은 검정 고무신, 덩치 큰 애들이나 고등학교 선배들은 흰 고무신을 신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우리 반으로 전학 온 도시 아이가 있었는데, 여름인데도 하얀 양말을 신고 있었다. 우리는 겨울에만 양말을 신는데 도시에서는 여름에도 양말을 신는다는 것이 참 신기했다. 물론 그 친구도 얼마 안 가서 맨발로 다녔는데, 몇몇 친구들은 오히려 그 친구를 따라서 양말을 신고 오기도 했다.
고무신을 신고 학교에 가는 아이들의 순수한 판단은 마을에서의 자기 삶을 찾는 과정일 수 있고, 스스로의 생존 노하우를 터득하는 학습일 수 있다. 군청 기술센터나 면사무소 근무자들이 마을을 방문할 때는 대부분 작업화를 신고 오는데, 더러 단화를 신고 오는 경우에도 흙이 묻은 것을 신경 쓰지 않는다. 단화를 신고 밭두렁에 들어가 작물을 만져보기도 한다. 생활이다.
언젠가 군청에 갔는데 직원들 책상 밑에 작업화가 한 켤레씩 있었다. 지역 방문 때나 비상구호 작업에 동원될 때 신는 용도일 것이다.
우리 가족들도 주일미사에는 생활한복 등으로 단정한 복장을 한다. 규칙은 없지만 예를 갖추려는 마음일 것이다. 동네 할머니와 노인들도 장날 읍내에 가거나 결혼식에 갈 때는 반듯한 점퍼나 정장을 하고 나온다. 공공 예의를 갖추는 것을 도리로 여기는 세대들이다. 텔레비전의 영향인지 몰라도 요즘은 시골 아낙네들도 매우 컬러풀하게 입고 산다.
의식주는 실용이 먼저고 격식은 나중이다. 농부는 여름에 양말이나 구두를 신을 필요가 없고, 회사원은 여름에도 넥타이를 매고 나설 이유가 있다. 사는 곳마다 저마다의 삶의 처지와 꼴이 있으니 그것을 문화라 할 것이다. 문화의 독창성을 인정하고 상대성을 존중하는 것이 공존과 평화의 길이다.
“군자는 말은 바르게 하고, 걸음은 똑바로 걷고, 옷은 단정하게 입는다”고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지만 양복에 구두를 신고 다니는 서울의 시간은 아무래도 포박당한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마을로 돌아와 신발을 벗을 때까지…….
산위의 마을은 자유로운 영혼의 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