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계 학교에서 종교 교육하는 것은 인권침해
종교라는 제도가 아닌 신앙이라는 정신이 중요
▶관련기사/ 내 종교만 절대적으로 옳다는 건 우상숭배
지난 2004년 당시 서울시교육쳥 앞에서 종교자유를 위한 1인시위중이던 강의석군 <한겨레> 자료사진
종교자유정책연구원은 우리 사회의 갈등 요인 가운데 하나인 종교에 의한 차별과 인권침해 문제 등에 대해 연구하고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로서, 대광고등학교의 강의석 군 사건을 계기로 해서 우리 사회에 첨예하게 제기되기 시작한 학교 내 학생들의 종교 자유의 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이번 심포지엄도 이러한 관심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비록 강의석 군(지금은 “씨”라고 해야 하지만)이 대광고등학교에서 입은 정신적 피해에 대해 학교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2004년)에서 대법원의 승소판결을 얻어냈지만(2010년 4월22일), 종교계 사립학교 내 종교자유의 문제가 교육 현장에서 단시일 내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종교 교육이 무엇이며 학교에서 꼭 필요한가
이 날 심포지엄에서는 종교계 학교의 종교교육의 권리보다는 개인의 신앙의 자유가 우선한다는 취지의 대법원 판결이 지닌 역사적 의미에 대한 발표를 비롯해서 학교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문제들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모임 내내 나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이 복잡한 문제에 대해 제시된 제도적, 법적, 교육행정 상의 해결책 내지 대안보다는 도대체 “종교교육”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이 과연 학교에서 꼭 필요한 것인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였다.
평소 신념이기도 하지만 이 심포지엄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던 결론은 현재 종립학교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과 같은 “종교” 교육은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아는 한 현재 종교계 학교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종교교육의 목적은 학생들에게 특정 종교에 대한 신앙을 고취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목적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달성되고 있는지의 문제는 차치하고, 교육을 본령으로 하는 교육기관에서 선교 목적의 종교교육을 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일인지 심각한 의문이 든다.
학교가 학교인 한 교육이 목적이지 선교가 목적일 수는 없으며, 아무리 부차적이라 해도 선교 활동을 교육의 범주에 포함 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아는 한 어떤 종립학교도 노골적으로 “선교”를 학교설립의 목적으로 내세우지는 않는다. 아무리 신앙심이 강한 학교 설립자라 해도 교육을 선교의 방편으로 하겠다고 선언할 정도로 몰상식한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설립 허가조차 받지 못할 것이다. 확인해보아야 할 사항이지만, 아마도 대부분의 종교계 학교 설립자들은 자기가 믿는 종교의 “정신” 같은 것을 교육 이념으로 표방했을 것이다. 기독교 계통의 학교 설립자는 기독교 정신, 불교계 학교 설립자는 불교 정신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다 아는 대로,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학교 내 종교교육이나 종교 행사들은 사실상 선교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변명할 것이다. 경전이나 교리를 가르치지 않고, 또는 기도나 예배 같은 종교 행사를 통하지 않고, 어떻게 우리 종교의 정신을 고취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한겨레>자료 사진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로 봐야
하지만 바로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나는 성경이나 불경 같은 경전에 대한 지식의 주입이나 예배나 기도 같은 “종교적” 행위 같은 것을 전혀 하지 않고도 “기독교 정신”이나 “불교 정신”에 입각한 교육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하며, 사실 이것이 진정한 종교교육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교육이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뿐 아니라 오히려 종교교육이 전혀 없는 일반 공립학교보다도 더 참다운 교육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의 정신, 부처님의 정신에 입각한 교육은 강요되거나 관습화된 선교적 종교교육보다 실제로 학생들의 인격과 인생관을 변화시키는 데 훨씬 더 효과적일 뿐 아니라 그러한 정신이 배어 있지 않은 교육보다 더 참다운 인간 교육이 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정한 종교교육이 이루어지려면 종교의 이해에 과감한 전환이 요구된다. 단적으로 말해, 종교를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로 보는 시각이다. “기독교”, “불교”라는 일정한 경계와 테두리를 지닌 제도 내지 집단으로서 종교를 이해하기보다는 “기독교적,” “불교적”이라는 형용사로 이해하자는 것이다. 위대한 영적 운동을 시작한 분들의 이름에 걸 맞는 “정신”을 나타내는 형용사로 종교를 이해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경우 “크리스챤”이라는 말이 본래 지녔던 뜻이 그러했다. 크리스챤이라는 말은 본래 기독교라는 교회집단에 소속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같은”, “그리스도를 닮은”, 혹은 “그리스도를 따르는”이라는 형용사적 의미를 지닌 말이었다.
다시 말해, 기독교가 채 제도화되기 이전의 이른바 “원시 기독교” 시대 기독인들을 지칭하던 말로서, 기독교라는 제도나 조직의 일원이라는 외적 모습보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며 그의 인격을 닮고자 하는 사람이라는 내적 정신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종교를 명사로서 이해하는 것과 형용사로 이해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 명사화된 종교가 제도화된 종교, 물상화된 종교, 명확한 배타적 경계선과 울타리를 지닌 단체 내지 조직으로서의 종교라면, 형용사로서의 종교는 내적 정신으로서의 종교, 마음의 성품과 삶의 태도로서의 종교이며, 한 종교의 신자들뿐 아니라 비신자들, 심지어 타 종교의 신자들까지도 포함될 수 있는 종교이다. 가령 기독교를 그리스도의 정신, 기독교적 정신을 뜻하는 말로 이해한다면,
기독교인과 기독인의 차이
우리는 어떤 독선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목사님보다는 자비로운 성품과 청정한 모습을 지닌 스님이 더 그리스도를 닮고 기독교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반대로 어떤 탐욕스러운 스님보다는 청빈하고 겸손한 목사님을 더 부처님을 닮은, 그래서 더 불교적인 사람으로 간주할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종교를 형용사적으로 이해한다면 기독교계 종립학교의 종교 교육은 성경을 가르치고 기독교 교리를 주입해서 기독교 신자를 만들려는 교육보다는 그리스도의 정신, 기독교적 정신과 가치를 심어주는 교육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럴 경우, 한 학생의 인격을 존중하고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일은 무슨 특별한 일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느님이 원하는 것,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정신에 부합하는 일일 것이다. 원하지도 않는 학생을 억지로 성경 공부 시키고 예배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과, 그의 인격과 종교의 자유를 존중하고 그리스도의 정신에 따라 이해와 배려, 사랑과 인내로 교육하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더 그리스도적이고 기독교적일까? 어느 것이 진정으로 그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을 지닐까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지난 2007년 대광고 앞에서 시위중인 시민단체 회원들. <한겨레>자료 사진
이는 불교나 그 외의 다른 종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불교는 기독교에 비해 비교적 덜 제도화된 종교이며 불교계 학교는 기독교계 학교보다 훨씬 수가 적지만, 명사로서의 불교 역시 일정한 틀과 규율을 갖춘 제도 종교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진정한 불교적 종교교육이 어떠해야 할지 답은 분명하다.
나는 약 한 달 전에 강화도에서 종교 간의 울타리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영성을 추구하는 <심도학사>라는 공부와 명상을 위한 센터를 열고 강좌와 경전/고전 함께 읽기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그 첫 번 강좌는 “기독인을 위한 불교 강좌”였는데, 거기에 참가한 한 사람의 말이 퍽 인상적이었다. “기독교인”이 아니라 “기독인”이라는 말을 사용해서 좋았다, 감사했다는 말이었고, 다른 참가자들도 공감하는 분위기였다. 두 단어 사이에 어감 상 무슨 차이가 있기에 그분이 그렇게 느꼈을까? 분명 “기독교인”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그 말이 어떤 교파나 교회에 소속된 충실한 멤버를 뜻하는 것이라면 자기는 그런 범주에 속하지 않다거나 속하고 싶지도 않다는 뜻에서 그렇게 말했을 수 있다.
충실한 신자는 차고 넘치지만…
반면에 “기독인”이라는 말은 좀 달리 들렸던 모양이다. 그리스도를 좋아하고 그를 닮고 그의 정신에 따라 살려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해했을 가능성이 크고, 그런 의미라면 자기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면서 덜 불편하게 느꼈을지 모르겠다. 혹은 단순히 “기독교인”이라는 말이 부정적 이미지가 많다고 느껴서 그런 “딱지”에 거부감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더 나아가서, 기독교라는 울타리를 넘어 타 종교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려는 마음으로 강좌에 참여하는 사람이었기에 “기독인”이라는 말이 “기독교인”이라는 말보다 더 형용사적이어서 - 그분이 실제로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는 않았겠지만 -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다.
여하튼 그분의 생각이나 느낌은 정확했다. 실제로 나는 이런저런 이유에서 강좌 이름에 “기독교인”이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기독인”이라는 말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점은, 명사로서의 종교인이 되기보다 형용사로서의 신앙인이 되기가 훨씬 더 어렵다는 사실이다. 한 종교 단체의 일원이 되어 일정한 규칙을 따르고 의무에 충실한 신자로 생활하는 일은 조금만 부지런하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상당한 물질과 시간을 요하겠지만 거기에 따른 각종 이득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늘 우리 종교계는 그러한 신자들로 차고 넘친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닮거나 부처님을 닮은 자, 인격과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거나 부처님의 자비의 정신을 실천하는 자는 성직자이든 일반 신도들이든 그리 많지 않다. 우리 종교계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명사화된 종교 신자는 엄청 많은데, 진정으로 자기 종교의 정신에 따라 사는 형용사적 종교 신자는 매우 드믈다는 것이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