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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문우답>을 읽고

등록 2011-06-13 17:11

백성호의 《현문우답》을 읽고 성인의 말씀을 끌어오고 권위있는 학자의 설을 장황하게 인용하는 이유가 뭘까? 거기에는 결국 내 말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을려는 속내가 갈려있다. 그런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음은 결국 남의 입을 빌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력이 붙고 내공이 쌓이게 되면 자연스럽게 이런 전개방식 자체가 싫증난다. 내 입으로 나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날 것으로 내밷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종교취재를 오래 한 백성호 기자도 그런 경지가 나타난 것이다.

그는 오랜 세월 여러가지 경서류(經書類)주변을 기웃거렸고 또 많은 성직자를 만났다. 종교기자로서 객관적 위치에서 그간 보고 들은 말의 화려한 잔치를 있는 그대로 전달했다. 하지만 어느 날 그런 역할에 식상하게 된 것이다. 앵무새 노릇이 더이상 성에 차지않은 까닭이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는 스스로 일으킨 궁금증을 더 이상 해갈시킬 수도 없었다. 주저없이 신문지상에 〈현문우답〉이란 코너를 만들었다. 그리고 용감하게‘자기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현문우답〉은 기사와 컬럼 그리고 개인적인 사색의 결과가 잘 버무러진 맛있는 비빔밥 이다. 기사라기에는 이미 날이 너무 섰고, 컬럼이라기에는 펼치는 풍경이 너무 다채롭다. 그렇다고 수행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재밋거리를 구색있게 갖추어 놓았다. 나름대로의 독특한 신문글의 새로운 쟝르를 개척한 셈이다.

종교기자단의 인도성지 취재시에는 순례 온 사람들과 맞닥뜨렸을 때‘백성호 기자도 왔느냐?’고 묻는 팬까지 있을 정도로 그의 글은 늘 대중의 기대이상으로 화답했다. 단순한 사실기술이 아니라 자기생각까지도 객관화시켜 과감하게 반영한 덕분이다. 그런 위험한(?) 글이 오히려 독자에게 어필한 것이다.

언론사 문화부 기자단들과 함께 중국의 선종사찰 답사 때에는 선불교를 중흥시킨 혜능선사의 어록인 육조단경을 옆구리에 끼고서 심각한 표정으로 버스 안에서 읽고 또 읽었다. 아무리 성지순례라는 타이틀을 붙여도 반쯤은 관광성 유람이기 마련이이다. 그럼에도 그는 놀이를 외면한 채 처음부터 끝까지‘진지모드’를 유지했다고 후일담은 전하고 있다. 다종교국가인 한국사회에서 종교기자는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부처님오신날은 연등을 찬탄해야 하고 크리스마스 때는 성탄트리를 칭송해야 한다. 또 만나는 성직자마다 ‘자기 종교를 믿고 있겠지’라는 지레짐작도 기자를 피곤하게 만들고 또 은근한 기대 역시 늘 부담스럽다. 설사 내 종교가 있다고 할지라도 내색하지 않는 것이 취재에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처신법이다. 아울러 취재원이 신부, 목사, 교무, 스님으로 바뀔 때마다 카멜레온처럼 종교적 변신을 거듭할 수 있는 방편도 아울러 필요한 위치이다. 아예‘무종교’라는 종교를 가지는 것도 또다른 대안일 것이다.

어쨋거나 그는 연륜이 쌓이면서 과연 ‘진짜 종교란 무엇인가?’하는 물음이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현문우답〉 속에 이런 고민의 편린들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특히 “종교는 뱀이다”는 어떤 교역자의 도발적인 정의에 대해 퍽 공감하고 있다. 뱀을 잡을 때 머리를 잡지 못하고 허리나 꼬리를 쥐게되면 도리어 뱀에게 물리는 것처럼 종교 역시 곁가지를 잘못 잡으면 도리어 종교에 물리고 만다는 말씀이다. 그 결과는 망신패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라망신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익히 듣고 보아 온 터이다. 종교라는 뱀의 꼬리를 잡고 있다가 도리어 물려버리는 종교의 이중성을 신랄하게 꼬집으면서도 ‘도대체 내가 잡고 있는 곳은 과연 어떤 부분인가?’하고 반문하는 종교지성으로서 고뇌도 함께 읽힌다.

동산(洞山)선사는 구도길에 물을 건너며 수면에 비친 자기 그림자를 향해 “부디 밖에서 구하지 말라. 그럴수록 나와는 더욱 멀어지리라.”라는 장탄식을 했다. 지도 위의 ‘땅끝’만 찾아갈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 깊이 숨어있는 불완전함의 오지인 땅끝도 같이 살펴야 한다. 사실 지구 상의 땅끝이 문제가 아니라 내 안의 땅끝이 더 문제인 까닭이다. 그리고 천국이 내 안에 있을 때 천국은 내 밖에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천국이 내 안에 없으면 내 밖에도 없는 것이라는 등의 나름대로 숙고 끝에 내린 결론은 저자자신을 향한 답변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한국학연구원의 한형조 교수는 얼마 전에 ‘붓다의 치명적 농담’‘허접한 꽃들의 축제’라는 시니컬한 제목을 붙인 금강경 해설서를 내놓았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면서 ‘약발이 잘 받는다고 의약신(醫藥神)에게 감사의 표시로 (이미 죽어버린)나를 대신하여 닭 한 마리를 갚으라’고 친구에게 부탁하는 유언을 ‘현자의 마지막 농담’이라고 둘러대는 화려한 수사(修辭)도 양념처럼 재미를 더해 주었다.

종교도 이제 필요에 따른 소비재인 시대가 되었다. 왜냐하면 지구촌 그 자체가 이미 커다란 종교백화점인 까닭이다. 교통.통신의 발달과 정보의 대중화는 이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그‘가르침’은 좋아하면서 그‘조직’에 포함되는 것은 원치않는 이들도 적지 않다.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필요한 것’만 여기저기에서 취하는 퓨전시대로 이미 진입했다. 수행법도 골라서 먹는 뷔페형을 추구할 것이다. 그런데도 성직자들만 이 사실을 애써 모르는 척 하는 것 같다.

‘일생보다 일상이 더 버거운’ 우리들에게 그 해법을‘공(空)의 논리’속에서 찾으라고 이 책은 권하고 있다. 쉽게 말해 ‘비움과 창조’다.〈현문우답〉의 문제풀이 제1법칙은‘응당 머무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應無所住 而生其心)’고 하는 틀이다. ‘깨어있음’이라는 것도 늘 마물지 않는 것(無住)이라고 해석했다. 머무는 순간 누구라도‘수구(守舊)’라는 화석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사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안주(安住)와 변화라는 두 마음간의 긴장과 갈등이다.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것은 순전히 개인의 몫이다.

아이패드로 유명한 스티브 잡스는 몇 년 전 스탠포드 대학 졸업축사에서 “(변화를)주시하라. 머물지 말라.”라고 힘주어 역설한 바 있다. 마음이란 마음 먹은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 나를 비우는 일보다 더 큰 기적은 없다. 그렇게 비웠을 때 우리는 무한한 창조성을 쓸 수 있게 된다. 고정된 내가 없기 때문에 어떠한 나(我)라도 다시 만들어 낼 수있는 까닭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우리 안에 담긴 일상의 창조성을 쉼없이 일깨운다.

비움과 창조를 통해 우리가 행복해진다. 일상 속에 문제가 있고 일상 속에 답이 있다. 문제 속에 이미 답이 있고 답 속에 문제가 있다. 그러니 그걸 멀리서 찾을 일은 아닌 것 같다. 이 책은 ‘일상이 버거운’우리들 곁에서 담담하게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버거운 일상’이 ‘창조적 일상’이 되게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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