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님 글방/박기호 신부]
앉아서 설교나 설법으로 수행 ‘효과’만 좇아
과정 생략되고 결과에만…자기를 잃어버린 삶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에 우리 예수살이공동체 운동을 함께 하는 40여명의 가족들이 서울에서 단양 산위의 마을까지 걸어서 오고 있습니다. 초·중·고 학생도 있고 청년과 어른 부부도 있습니다. 4일째인 어제 밤에는 충주 입구 목감에서 민박을 하고 오늘은 천등산을 넘어 박달재 아래 마을에서 묵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공동체는 금년에 창립 10주년을 맞습니다. 스스로 오늘의 우리 공동체 자신을 성찰컨대 많이 나태해졌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강론이나 묵상으로만이 아니라 삶의 실천성으로 현현(顯現)시키자며 시작하던 때의 열정이 많이 시들어졌습니다. 공동체를 떠난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지금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예수님의 삶을 증거하고 있어야 했는지 성찰하고 새 힘을 얻고자 기도하는 피정의 시간을 갖고자 10주년을 준비하던 그룹들의 도보 순례에 나선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에 참여하러 가면서 고속의 교통수단으로 이동
저도 사실은 딱 2년 전에 이곳 산위의 마을에 살고자 들어오던 때, 서울에서 5박6일 동안 줄곧 혼자 걸어 왔습니다. 참 은혜로운 시간이었고 좋은 피정이었습니다.
길을 걷는 것은 고요히 앉아 명상하는 것과는 좀 다를 것입니다. 스님들이 깊은 골짜기 암자를 찾아가는 길, 수도자들이 사막의 은수처를 찾아가는 길,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수 십리, 수 백리 길을 걸어가는 것이나 모두가 길 위의 수행이었을 것 입니다.
현대인들은 길 위의 수행을 잃어버렸습니다. 피정이나 선수행에 참가하거나 기도원이나 산사를 찾아 갈 때는 승용차로 그곳으로 간 후에 프로그램에 따라서 명상의 시간을 가집니다. 시간에 쫒기지 말자며 시계를 맡겨놓기도 합니다.
심지어 위빠사나 수행에 참여하러 가면서 고속의 교통수단으로 이동합니다. 찾아가는 길 자체가 위빠사나 수행이 되고 기도가 되고 명상이 되게 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교 수도자들이나 불교의 수행자들에게 뭔가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길 위의 수행이 사라져버리는 데 원인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길을 나서서 길을 묻지 않고, 앉아서 설교나 설법, 효과적인 정보로 효과적인 수행을 하려고 합니다.
길을 묻고자 할때는 길에 나서서 물어야
과정이 생략되고 최대 효율적인 결과와 목적을 이루어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세대입니다. 그런 현대인의 삶이 우리 수행자들의 의식을 지배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빠른 자가용 차량을 통해서 같은 시간에 많은 곳을 방문하고 여러 곳에서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모임과 회의를 엽니다.
회사에서도 바쁘게 일하는 것이 제대로 일하는 것이고 더 큰 역할을 하는 것이고 바쁜 일정으로 사는 것이 사회적 지위처럼 여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지 못하고 명상하지 못하고 무엇보다 자기를 잃어버린 채로 살아갑니다.
길을 묻고자 할 때는 길에 나서서 물어야 합니다. 깨달음은 ‘길-道’자를 씁니다. 도(道)는 이상(理想)이되 길은 현실(現實)입니다. 그래서 현실과 이상이 합일되려면 길에서 도(道)를 구해야 합니다. 고속의 푹신한 승용차로 달려 안락한 처소에서 명상의 시간을 갖는 것은, 아마도 이상과 현실이 이미 분리되어버린 상태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생활이 바쁜 것은 내가 이곳저곳에 바쁘게 참여하는 것에 동의하기 때문입니다. 약속에 동의하지 않으면 덜 바쁠 것입니다. 대중교통만 고집한다 해도 일정들은 놀랍게 줄어들 것입니다. 줄어든 일정은 중요한 것 우선으로 편성될 것입니다. 길을 많이 걸어야 하겠습니다. 먼 길을 걷고, 오래 걷는 사람은 사유가 깊은 사람일 것입니다. 걷는 사람이 많은 나라 국민들은 철학과 정신세계가 문명인들과는 많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문명·반소비·반이기로 사는 게 사람 중심 세계 회복 지름길
공동체 가족들이 걸어서 오는 데 걱정도 됩니다. 제가 걸어 와보니 걸을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지도에 나와 있는 국도는 거의가 자동차 전용도로로 바뀌었고, 기존의 국도마저 양쪽 차선 밖의 길은 50센티도 안되는 곳이 태반입니다. 대형 화물 트럭들이 팔을 스칠 듯 폭풍을 몰고 괴성을 지르며 지나갑니다. 조심해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그래도 그런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늘어나야 사람 다니는 길이 생깁니다. 걸어가는 사람이 없으니까 보도를 만들지 않습니다.
사람이 만든 이기(利器)에게 사람의 길과 자리를 빼앗겨버린 기술 문명과 소비문화의 시대, 이런 때는 반문명 반소비 반이기(利器)로 살아가는 것만이 사람 중심의 세계를 회복하는 지름길 입니다.
먼 길을 걸으며 공동체 삶을 성찰하고 새로운 영과 기운을 얻으려 하는 도보순례자들로 인해서 우리 공동체는 다시 일어설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제 곧 산위의 마을에 도착하게 될 우리 공동체의 사랑하는 더부네들을 따뜻이 맞이하여 사랑으로 안아줄 것입니다. 물집 잡힌 발에 사랑의 키스를 해주려고 합니다. 발 씻어줄 물을 데워야 하겠습니다.
박기호 신부 (2008.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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