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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벗님글방

세상은 버렸지만 하느님이 아껴 둔 땅

등록 2008-01-15 18:00

[산 위의 마을에서 온 편지] 박기호 신부 2신

천혜의 풍경 그림 같은 집, 그런데 왜 오래 못 살까

휴심정에 올라오신 더부네님들 안녕하세요? 우리나라 정자들은 대부분은 주변 가운데 좀 높고 앞이 탁 터진 곳에 지어져 있지요. 뻐근한 다리도 풀 겸 걸터 앉으면 시름도 근심도 모두 사라져 버리고 너무 행복합니다. 특별히 높은 산허리 등에 지어진 정자들은 더욱 그러합니다.

제가 살고 있는 ‘예수살이공동체 산위의 마을’ 은 소백산과 남한강이 만나는 단양지역 산골인데 전망이 탁 터져 있으면서도 구봉팔문(9개의 산봉우리 사이 계곡이 8개의 문과 같다는 뜻이죠)이 정면에 있어서 적당하게 시야를 멈추게 해주는 곳입니다.   소백산 구봉팔문을 바라보며   거의 대부분 사찰의 가람은 산속에 푹 안기는 곳에 앉혀져 있습니다.

아마도 수행자들이 대처를 바라보지 않게 하려는 배려가 아니었을까? 저 나름대로의 해석도 해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 산위의 마을 가족들도 수행의 삶을 사는 사람들인데 아주 멀리까지 터지지는 않고, 그렇다고 답답하게 막혀 있지도 않아서 이래저래 참 좋은 곳이라는 감사의 마음입니다.

저희 마을을 방문한 분들은 마을을 찾아 올라올 때는 가파른 계곡에 그나마 계곡물도 시원하게 흐르지 않고 너무 답답한 곳처럼 느낀답니다. 그런데 도착해서 올라온 길을 돌아다 보시면서는 좋은 경치에 감탄하십니다. 버스나 기차 승용차로 길을 갈 때 시원한 강이나 기암괴석으로 싸여 있는 계곡이나 아주 경치 좋은 곳을 지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농가나 별장으로 보이는 집이 있습니다. “야, 정말 저런 그림 같은 집에 사는 사람은 참 좋겠다” 하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경치라는 것이 서로 바라보는 대상이 다르다는 것이지요. 차를 타고 지나가는, 내가 바라보는 경치와 그 집에서 길 위에 미끄러져 가는 차량을 바라보는 경치가 같지 않다는 말입니다. 

바라보는 눈은 서로 같지 않으니…   그래서 그런지 퇴직을 하고 전원생활을 꿈꾸며 귀농하거나 하는 사람들은 정말 좋은 경관의 땅을 구입하고 유럽풍의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잔디밭의 정원도 꾸립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며 “참 경치도 좋고 명당자리에 들어 앉은 집이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집에 오래 살지를 않아요. 지나가는 사람들이 볼 때는 좋은 집인데 정작 그곳에 살면서 날마다 내다보는 경치란 반대편을 보는 것이어서 별로인 거지요.  그 집 맞은 편이나 건너 편 집에 사는 사람은 자신은 그럭저럭한 위치에 살고 있지만 날마다 창문만 열면 좋은 경치에 공원같이 잘 꾸며진 집을 바라보고 기분 좋아 합니다. 허 허 참... 어떻게 된거죠?

우리 ‘산위의 마을’ 사람들은 남들의 눈에 비록 초라한 산촌 골짜기에 사는 듯이 보이지만 우리 자신들은 날마다 눈만 뜨면 너무 아름답고 4계절의 변화가 자연의 섭리를 계시하는 ‘경치 좋은 곳을 바라보며’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저희들의 인생관을 상징하는 땅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지금도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외국어고등학교나 과학고등학교 등 특목고에 들어가려 하고 밤을 새워 공부할까요? 모두 행복한 삶을 얻으려는 거겠지요. 그들 부모는 자녀가 서울대에 합격해 준다면 자녀에게 행복한 삶의 조건을 물려 주었다고 생각하며 기뻐하겠지요. 정말 그런 지 검증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서울대에 다니고 있는 학생들에게, 교수들에게, 서울대를 졸업한 지식인들에게 물어보면 압니다.

“당신은 행복합니까?”, “당신이 하는 일은 세상의 행복을 위한 것인가요?”하고 물어보면 답이 나오겠지요. 그런데 왜 그런 질문을 하지 않을까요.   “당신은 행복합니까?”라고 왜 물어보지 않을까

 

행복이란 누구나 선망하는 사회적 지위나 출세나 성공 신화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길을 가면서 좋은 경치의 아름다운 집을 바라보는 것이지요. 그 집에 사는 사람이 바라보는 경치가 문제이지요,

성공 신화의 주인공, 사회적 지위와 고액 연봉을 가진 상류사회 사람들이 바라보는 행복이 문제인 것이지요. 왜 더 이상 얻을 것도 부족한 것이 없는데도 행복하지 아니한가? 왜 고독하고 우울하고 권태롭고 경쟁심과 증오는 사라지지 않는가?

 

저는 5년 전 마을 건립을 위해 후원인들이 모아주신 약간의 기금을 가지고 공동체로 살아가기에 좋은 땅을 찾아다녔습니다. 소개인들은 한결같이 몇 년 만 지나면 땅값이 어떻게 오를 것이라는 식의 전망으로 설명하곤 했습니다. 실재로 돌아다닌 사이에 3,500원 하던 임야가 2만원에 팔린 경우도 보았었지요.

그러나 저는 10년, 50년이 지나도 개발이나 발전 전망이 없는 그런 오지는 없느냐고 물으면서 찾아다녔습니다. 부동산 중개인은 쓸만한 땅을 여기저기 둘러본 뒤, 진짜 그런 땅을 찾기야 하겠느냐는 듯이 돌아오는 길에 잠깐 들려 보여준 곳이 지금의 ‘산위의 마을’입니다.   비탈 지고 자갈 투성이에 관정 파도 물이 없는 땅   밭은 30도 가까운 경사진 비탈이고, 그나마 흙보다 바위와 돌덩어리, 자갈이 절반인 땅에 멧돼지. 고라니 등쌀에 농사를 지을 수 없고, 오래 전에 폐광하면서 복원시키지 않아서 물이 빠져나가 관정을 파도 물이 없고, 겨울에 눈이 오면 차량이 접근할 수 없고... 옛날 화전민들이 살아오다가 물러가 버린 바로 그런 곳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참 좋습니다. 왜 그렇게 좋은 지 모르겠습니다. 아이들도 1km 이상을 걸어서 학교에 가고 가파른 산길을 오르내려야 하는데도 그냥 좋아하고(요즘은 무료 눈썰매장이 되어 더 좋아하지요), 할머님도 좋아하십니다.
우리는 이곳에 집을 짓고 뒷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모아 먹었고 가뭄에는 아랫마을에서 길러다 사용하면서 그동안 도시생활에서 흥청망청 물 쓰듯 했던 삶을 성찰하고 회개했습니다. 유기영농으로 겨우 푸성귀를 지어먹으면서 도시에서 질탕스럽게 먹고 마시고 남겨버리고 했던 삶을 반성하며 살고 있습니다. 하루 네 번 있는 버스를 이용하면서 툭하면 승용차로 좇아 다녔던 생활을 보속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문화로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십자가를 우리라도 대신 지고 속죄하자는 믿음으로 살아가려 합니다.

‘산위의 마을’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버려진 땅이었지만 우리에게는 하느님께서는 척박한 환경 속에 덮어두고 아껴 두심으로써 선물로 주신 은총의 땅이라 고백합니다.

참 좋습니다. 예수살이공동체 ‘산위의 마을’이... * (2008년 1월 14일) 박기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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