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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벗님글방

허공으로 날아간 새의 흔적

등록 2011-01-11 15:40

                                                               

 선사들의 삶은 하늘을 나는 새처럼,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작용은 하지만 절대로 작용의 자취는 남기지 않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이것을 임제 선사는 ‘용처시무처(用處是無處)’라고 하셨다. ‘일기 같은 어록’만 남기고 사라진 지허(知虛) 스님도 그런 삶을 추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남은 이에 의해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그래서 그를 대신하여 ‘변명’이라고 이름 붙였다.  

 

 승적부에데 문도회에도 없는 스님의 ‘선방일기’

 

 먼저 지허도 법명이 아니라 필명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런 이유로 승적부에도 문도회에도 그 흔적은 없었을 것이다. 애시당초 그는 세상에 이름을 알릴 생각이 전혀 없었던 까닭이다. 그럼에도 ‘신동아’에 근무하는 지인이 그의 재주를 아깝게 생각하여 (그리고 특종을 위한? ) 연재를 권했던 것이 아닐까? 인간관계상 거절할 수 없는 처지인지라 마지못해 응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책에 《선방일기》를 연재한 것은 당시 절집에 변변찮은 지면이 없던 시절인 까닭도 한몫했다.

 애써 유명잡지를 일부러 찾은 것도 아닐 터인데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세간의 이름있는 월간지를 선택한 것처럼 남들에게 비쳐졌다. 그런 전후 사정들이 괜찮은 인맥의 소유자로 보였을 것이고 글 내용 속에 상당한 양의 ‘먹물’이 묻어나는 걸로 봐서 고학력일 것이라고 추측하게 된 것이다. 그런 상상력이 급기야는 ‘서울대’로 둔갑되었고 묘연한 종적은 ‘천재의 요절’로 마무리되었던 것 같다.  이것은 중생들 생각흐름의 보편적 패턴이다. 결국 몰종적(沒踪迹)은 도리어 신화화(神話化)의 전철을 밟아버린 것이다.

  그는 철저한 중도론자였다. 그래서 ‘종도(中道)’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당신 사상을 정리해 나갔다. 

 ‘버림받지는 않았지만 추앙받지도 못했다’, ‘환영도 거부도 하지 않았다’, ‘불만도 없었지만 만족도 없다’, ‘다정과 앙숙이 오락가락하는 사이’라는 평이한 언어이지만 그런 형식의  나열 속에서 그가 지닌 가치관의 일단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그리고 ‘피안의 길이 열려 있지도 않지만 열반이 눈앞에 있지도 않다’라든지 ‘유무(有無)가 단절된 절대무(絶對無)의 관조(觀照)에서 견성이 가능하다는 선리(禪理)를 납득하려고 하면 할수록 현존재인 육체의 유무에 얽히게 되고, 사유를 가능케 하는 정신의 유무에 얽매이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이론과 함께 실참(實參)의 경지를 동시에 보여주는 중도적 내공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동서양의 고전은 물론 성경까지 두루 인용

 

 동서양의 고전은 물론 성경 인용까지 두루 한 것으로 보아 독서량이 만만치 않으면서도 ‘꼭 필요한 구절’만 적재적소에 인용하여 선사답게 절제된 표현을 사용할 줄 알았다. 이러한 그의 성정은 같이 살던 어떤 스님에 대한 평가 속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입산했다고 하는데 독서량이 지나치게 많아 정돈되지 못한 지식이 포화상태를 지나 과잉상태이다. 그래서 깊이 없이 박식하다. 그 박식(?) 땜에 오만하고 위선기가 농후하다”라고 하였다.  일이관지(一以貫之)가 되지 않는 잡학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어쨌거나 참 수행자는 자취를 구하지 않는다. 아니 그보다는 구할 것이 없기 때문에 흔적이 없다고 한 것이 맞을 것이다. 그래서 대매법상(大梅法常) 선사에게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물으니 ‘서쪽에서 오신 뜻이 없다(西來無意)’라고 단언했던 것이다.

 이처럼 지허 스님이 이 책을 남긴 것도 사실 제대로 알고보면 남긴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미 두 번이나 판(版)을 달리하여 세상에 나왔고 또 많은 이의 서가를 장식했다. 

 이런 짓거리를 보고서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다.

 “몸을 숨긴 것은 본래 종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허공으로 날아간 새의 흔적을 더 이상 찾지 말라.”

  

 2554(2010) 납월에

 

 

 ps:《선방일기》는 1973년 〈월간 신동아〉에 연재되었던 작품으로 모두 23편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이미 1993년과 2000년에 각각 단행본으로 출간되었고 2010년 겨울에 불광출판사에서 세 번째 간행한 스테디 셀러이다. 이 글은 3쇄의 발문으로 쓴 글이다. 강금실 변호사의 발문도 함께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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