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에서 낙원상가 방향으로 걷다보면 일부러 가려놓은 듯한 기와지붕과 높다란 담장을 만나게 된다. 고개를 들면 한문으로 쓰여진 작은 크기의 ‘오진암(梧珍庵)’이란 글씨가 큰 문패처럼 달려있다. 50여 년 전에 주인장이 고급 한정식집을 열면서 마당에 큰 오동나무(梧)가 보물(珍)처럼 우뚝한지라 그 이미지를 빌려와 상호로 삼았다고 한다.
인근에 비슷한 규모의 요정들은 그 이름의 마지막 글자를 ‘각(閣 ;삼청각 대원각 등)’이나 ‘관(館; 명월관 등)’을 사용하는데 비해 이 집은 유독 암(庵)이라 칭하고 있는 것이 독특했다. 그 개성이 드러나는 이름 때문에 ‘식당으로 화현한 암자’인 것 같아 지나갈 때마다 대문에 곁눈질을 하곤 했다.
‘각’도 ‘관’도 아닌 ‘암’의 뜻
오진암은 서울시 등록 1호 식당으로 그 오랜 전통을 자랑한다. 하지만 최근에 주인이 바뀌면서 다른 용도의 공간으로 사용하기 위해 헐리게 되었다. 그 소식이 장안에 퍼지면서 호사가들 사이에 적지 않는 화제가 되었고 문화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700여 평의 공간에 열 채는 족히 됨직한 한옥으로 이어진 기와지붕이 벗겨져 황톳빛을 드러내고 있는 모습을 인근 건물옥상에서 촬영한 영상은 뒤켠 정원의 묵은 오동나무를 포함한 몇 그루의 푸른 나무와 그 빛깔이 대비되면서 더욱 처연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또다른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는 듯하여 뜻있는 이를 더욱 안타깝게 만들었다.
이미 십수 년 전에 이전해 간 강원도 홍천의 ‘민요연구원’ 57평의 한옥은 오진암 별채로 알려져 있다. 경기민요의 대가인 안비취 선생이 오진암 시절 그 건물에서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또 인간문화재 지정과 함께 후진을 양성하던 곳이라고 했다. 일백여 년 전에 이 집에 거주했다고 전하는 이병직은 조선말의 화가인 동시에 고미술 수집가이기도 했다. 그는 당시 고서점에 나온 《삼국유사》와 《제왕운기》를 75만 원에 구입했다고 한다. 당시 오진암을 6만 원에 팔았다고 후손 도혜 스님은 증언하고 있다.
오진암에는 오진 스님이 없다
하지만 오진(梧珍)을 본래의 의미인 암자(庵子)와 제대로 어우러지게 쓰려면 ‘오진(悟眞)’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중국에는 소림사와 쌍벽을 이루는 무당산(호북성;태화산) 무당파의 36암당(庵堂) 가운데 오진암 이름도 보인다. 전라도 불갑사에는 오진암 터가 전해져 온다. 황해도 구월산의 월정사에도 오진암이란 암자가 있다.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의 무대로도 등장하는 곳이다. 소설 제9권에는 월정사 주지 풍혈 스님 이름도 나오고, 오진암의 여환도 등장하고 있다. 강원도 강릉 보현사의 오진(悟眞) 비석은 영동지방에서 가장 뛰어난 금석문이다. 구산선문 사굴산파의 개조인 범일 국사의 제자인 낭원(朗圓) 대사의 행적을 기록했다. 그는 경주 사람인데 후학들이 그의 비석이름을 ‘오진’이라고 명명해 주었다.
서울 은평구 진관사는 고려 현종이 수행생활을 할 때 당시 진관스님의 은공을 기려 그를 국사로 모시고서 진관사를 창건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지금은 비구니 진관 노장님이 주석하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진관사에 진관 스님이었다. 이름만 들어도 절이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런 까닭에 오진암에도 오진스님이 머물러야 어울릴 것 같다.
안동에서 영주까지 팔을 펴서 닿게 한 신통력
하지만 신라의 오진 스님이 머문 곳은 오진암이 아니라 골암사(骨巖寺)였다. 《삼국유사》‘의해’편에 행적이 남아있다.
“아성(亞聖)으로 불리는 의상대사의 십대 제자 중 오진(悟眞)은 일찍이 하가산(下柯山 ; 안동 학가산) 골암사에 살면서 밤마다 팔을 뻗쳐 부석사의 석등〔浮 石 室〕에 불을 켰다.”
안동에서 영주까지 팔을 펴서 닿게 했다니 그 신통력이 참으로 놀라울 뿐이다.
중국 송나라 임제종의 도오(道吾) 선사의 법명도 오진(悟眞)이었다. 인품이 고고하고 강직하면서도 안목을 두루 갖추었는지라 수도원인 총림에서 그 명성이 참으로 높았으며 『어요(語要)』 1권을 남겼다. 그 당시 선지식이던 자명초원(986~1040) 선사는 양기(楊岐 992~10490)와 오진을 가장 훌륭한 스님이라고 평가했다. 《임간록》하권에는 그의 이런 선문답이 기록되어 오늘까지 전하고 있다.
오진 선사에게 어떤 납자가 물었다.
“어떤 사람이 부처입니까?”
“동정호에는 덮개가 없다(洞庭無蓋).”
부처라고 하는 ‘늘 깨어있는 지혜로운 이’를 언어로 어떻게 정의해야 할 것인가?
그래서 할 수 없이 ‘넓고 넓은 동정호를 어찌 덮을 수 있겠느냐’는 반문으로 답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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