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흔ㅣ건국대 국어국문학과 교수·한국문학치료학회장
■ 인간의 두 충동, 에로스와 타나토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프로이트(S. Freud)는 인간에 대한 이해에 변혁을 가져온 사람이다. 그 핵심은 인간의 이면에 작동하는 ‘무의식’의 발견이었다. 그는 인간의 사고와 행동이 이성에 의해 충분히 통제되지 않으며, 무의식에 의해 움직이는 측면이 더 본질적이라고 보았다. 이런 견해는 처음에 상당한 저항에 부딪혔지만 오늘날 보편적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국의 문학 치료학은 인간의 이면에서 삶을 작동하는 요소를 ‘자기 서사’로 본다. 무의식의 자리에 ‘서사(story-in-depth)’를 둔 형국이다. 무의식이 불투명하고 종잡기 어려운 것인 데 비해 서사는 스토리적 맥락과 구조라는 특유의 체계를 지니고 있다. 자기 서사를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 인간의 삶을 움직이는 이면적 기제를 보다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조정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사람들의 자기 서사는 문학작품 이면의 서사, 곧 ‘작품 서사’를 통해 비춰보고 조정할 수 있다. 오랜 세월에 걸친 구비전승 과정을 통해 정련된 원형적 구비문학 작품은 자기 서사를 비춰주는 특별한 거울이 된다. 융(K. Jung)은 신화와 민담 속에 인간 삶의 원형(Arche type)으로써 집단 무의식이 깃들어 있다고 봤거니와, 문학 치료학의 서사론이 주목하는 것이 그 이면적 문학성이다. 융이 화소의 상징적 의미를 중시하는 데 대하여 문학 치료학은 스토리적 맥락을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 특징이다.
프로이트는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인간의 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한 본능적 충동으로 에로스(Eros)와 타나토스(Thanatos)를 들었다. 에로스가 생명을 발현하고 고양하는 ‘생의 본능’이라면 타나토스는 생명을 파괴하고 사멸하는 ‘죽음 본능’이다. 두 본능이 서로 긴밀히 맞물려 함께 작동하는 가운데 오르내림의 격동을 겪는 것이 인간 삶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본래 그리스신화라는 원형적 문학작품 속의 신격이다. 일컬어 ‘사랑의 신’과 ‘죽음의 신’인데, 그 연원과 상호 관계가 간단치 않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다. 삶과 죽음이라는 가장 크고도 원초적인 문제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관계는 서사적 차원에서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은 지금 나의 실존과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 신화 속 에로스의 원모습을 찾아서
에로스는 그리스신화 속의 도드라진 주인공이다. 그는 날개 달린 몸으로 사방을 훨훨 날아다니면서 화살을 날려서 수많은 인물들을 사랑에 빠뜨린다. 에로스에 의해 발생한 신화적 사건이 한둘이 아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신들도 그의 화살을 피하지 못한다. 화살에 맞은 아폴론은 자기를 피해 도망가는 다프네를 끝까지 쫓아가다가 애인이 나무로 변하는 상황을 목격해야 했다. 에로스의 어머니로 알려진 아프로디테가 아도니스와 사랑의 소용돌이에 빠져든 것도 에로스의 화살 때문이었다. 에로스 자신도 예외가 아니어서 실수로 제 화살에 찔리는 바람에 인간 처녀 프시케와 사랑에 빠져 다사다난의 우여곡절을 겪는다. 에로스와 프시케의 관계에는 애욕과 영혼의 결합이라는 그럴싸한 해석이 붙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에로스가 성애(性愛)로서의 사랑을 주재하는 신으로 귀착된 것은 후대의 일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리스신화의 본래 체계에서 에로스는 카오스와 연결되는 태초의 신격으로 말해진다. 그는 대지의 신 가이아와 밤의 신 닉스, 지하의 신 타르타로스, 하늘 신 우라노스 등과 나란히 위치하며, 그들보다 더 앞선 존재로 인식되기도 한다. 이때 에로스의 신격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랑’보다 더 원초적이고 포괄적인 ‘생명력’의 상징으로 보는 것이 어울린다. 만물을 움직여서 행위를 낳는 원초적 힘으로서의 ‘욕동(慾動)’을 생각하면 대략 적합할 것이다. 성애가 욕동의 대표적 표상이라는 점에서 에로스가 뒷날 사랑의 신으로 귀착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그 원초적 생명력은 태초의 혼돈 상태로서의 카오스 안에 깃들어 있던 것이라고 봄이 어울린다. 카오스가 해체되면서 코스모스로 재구성되는 태초의 창조 과정은 외부 충격이 아닌 자체적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카오스가 곧 우주 전체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 일련의 역사는 카오스에 변화와 창조의 에너지가 깃들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 에너지를 상징하는 신격이 곧 에로스라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우주 만물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것은 에로스의 작용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인간들이 이렇게 세상을 살아가는 바탕에도 물론 에로스가 있다. 에로스는 곧 생명이며, 삶 자체다.
우리가 생명이나 삶을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반대에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죽음 없는 생명이란 있을 수 없다. 그 죽음의 신화적 표현이 곧 타나토스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을 아득한 심연 타르타로스로 끌고 가는 무서운 존재. 에로스가 행한 모든 일에는 그림자처럼 타나토스가 따른다. 에로스에 사로잡힌 아폴론이 다프네의 죽음을 낳고 자신의 절망을 가져온 것은 단적인 사례가 된다. 에로스와 프시케의 사랑 또한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의 이중주로 채색된 것이었다. 영속적인 사랑이란, 또는 영속적인 생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신들의 세계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우리 인간의 세상에서는.
우리는 신화 속 에로스가 가진 화살이 하나가 아닌 둘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황금 화살은 사람을 사랑에 빠지게 하지만 그의 납 화살은 사랑을 거부하게 만든다. 하나가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라면, 다른 하나는 타오르는 불을 꺼뜨리는 찬물이다. 약동하는 생명력과 스러지는 생명력. 그 두 개의 화살은 에로스의 다른 이름이 타나토스임을 말해 준다. 신상 속의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공통으로 날개 달린 소년의 이미지를 하고 있는 것은 우연으로 돌릴 바가 아니다.
우리 안에는 에로스의 황금 화살과 납 화살이, 또는 에로스의 화살과 타나토스의 화살이 함께 박혀있다. 언제부터인가 하면 어머니 자궁이라는 태초의 알 속에서 숨을 쉬기 시작한 순간부터. 삶과 죽음의 이중주가, 또는 사랑과 공격, 희망과 절망의 변증법이 뭇 인간의 삶의 과정이다. 그 소용돌이에 유난히 크게 휩싸여 오르내림의 격동을 겪고 있는 지금의 나는 그것을 어떻게 감당하고 풀어나가야 할까? 그 자기 서사적 문제에 대한 작품 서사적 답은 무엇일까?
■ 삼두구미에서 찾는 타나토스의 서사
그리스신화 속의 타나토스는 크고 중요한 신격임에도 그 캐릭터와 서사는 불명확한 것이 특징이다. 그는 에로스와 달리 인상적인 서사를 그리 많이 남기지 않았다. 에로스의 서사 안에 이미 타나토스의 서사가 담겨 있다는 관점에서 보면 그럴 수 있는 일이겠으나,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 것이 사실이다. 오르내림의 격동에 휩싸여 있는 입장에서, 타나토스로 상징되는 생명성의 파괴와 사멸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서사적 맥락이 궁금할 수밖에 없다.
그에 대한 하나의 인상적인 실마리를 한국 민간 신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주도 본풀이 신화에 타나토스에 해당하는 신격이 있으니 그 이름은 삼두구미(三頭九尾)다. 이름 그대로 머리 셋에 꼬리 아홉을 가진 흉측한 괴물인데, 평소 모습은 이와 다르다. 사람을 도우러 나서는 백발 할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다. 산속에 살면서 나무꾼 앞에 나타나는 존재이니 산신령으로 착각하기에 딱 좋다.
삼두구미는 가난에 쪼들리는 나무꾼을 꾀어서 그 딸들을 아내로 삼으려 한다. 세 딸이 차례로 그의 마수에 걸린다. 장소는 산속 으리으리한 기와집. 겉보기에 멋지고 풍요로운 곳이지만 사실은 무서운 함정이다. 어느 날 삼두구미는 집을 나서면서 제 다리를 쑥 뽑아서 아내에게 주면서 그걸 먹으라고 명령한다. 무서움에 질려서 다리를 숨겨두었던 딸들은 삼두구미 손에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다. 제 다리의 행방을 찾는 일은 죽음의 괴물에게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말하자면 그건 출구가 없는 감옥이었다. 죽음의 신인 삼두구미의 다리를 먹는다는 것은 스스로 ‘죽음의 몸’이 된다는 것과 같다. 죽음 상태로의 전락이다. 그리고 그 다리를 먹지 않는 결과는 삼두구미에 의한 참혹한 타살이다. 죽음 상태로의 전락이다. 그러니까 저 흉측한 괴물 신 삼두구미가 딸들에게 행한 바는 스스로 죽음에 드는 것과 찢겨서 죽는 것 두 가지 중에 알아서 선택하라는 것과 같다. “스스로 죽을래, 맞아서 죽을래?” 절대 강자가 무기력한 약자에게 행하는 흉포한 폭력이다. 죽음 앞에 놓인 인간의 운명이 그와 같다.
신화에서 막내딸은 두 언니와 달리 죽지 않고 살아난다. 그녀는 삼두구미의 다리를 불태운 뒤 그 재를 배에 붙인다. 집에 돌아온 뒤 “내 다리 어디 있니?” 하는 물음에 막내딸 배에서 “여기요!” 하는 답이 나오자 삼두구미는 그녀가 자기 명을 완수했다고 여긴다. 자기와 같은 괴물이 되었다는 믿음이다. 막내딸은 그 믿음을 이용해 삼두구미의 약점을 알아낸 뒤 그를 처치하고서 죽음을 면했다는 것이 이야기의 결말이다.
하지만 삼두구미는 그렇게 사라져 없어지지 않는다. 죽음의 신은 그 자체 죽음이니 일시적으로 막아설 수 있을지 몰라도 그를 사멸시킬 수는 없다. 헤라클레스나 시시포스가 타나토스를 물리쳤지만 타나토스가 사라지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다. 죽음의 신에 직면하는 시간은, 존재가 산산이 파괴되는 시간은 결국 온다. 타나토스를 농락했던 헤라클레스와 시시포스의 최후가 남달리 끔찍했던 것은 우연이 아닐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삼두구미본풀이> 속의 막내딸도 내내 끔찍한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남은 생을 살았을지 모른다. 언니들의 참혹한 시신을 제 손으로 수습해야 했으니 말이다.
생명의 끝에는 죽음이 온다는 것, 고양된 삶의 시간 뒤에 전락의 시간이 온다는 것.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이 파괴적 역학관계를 우리는 과연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그 숙명 앞에 따로 길은 없는 것일까? 그냥 무너져 파괴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 생명과 죽음의 이원성을 넘어서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 한번 죽는다. 존재의 파멸적 해체로서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말을 잃는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한번 떠난 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생명과 죽음 사이의 아득한 심연!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공존 불가능한 모순성이다.
그러나 신화 속에서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공존한다. 나아가 그것은 한 존재의 두 모습이다. 죽음 너머의 세계에 대해서는 무어라고 가히 말하기 어렵지만, 우리 삶의 과정이 그 자체로 에로스와 타나토스, 또는 생명과 죽음의 이중주라고 할 수 있다. 심리적 측면에서 볼 때 더욱 그러하다. 우리의 존재는, 어느 순간 생생히 살아있지만 어느 순간 죽어 있다. 존재는 삶과 죽음을 끝없이 오간다. 불교에서 말하는 억겁의 윤회전생은 현생의 삶 속에서 부단히 펼쳐지는 무엇이다.
근간에 스스로 돌아본 나 자신은 타나토스에 사로잡힌 존재였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일지 모르나 이면의 무의식은 스트레스와 공격성의 지배하에 들어 있었다. 신화를 통해 진단해본 나의 자기 서사는 앞에 걸려든 희생물에게 다리를 쑥 뽑아서 내밀면서 먹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고 위협하는 삼두구미였다. 내 안의 삼두구미라니…. 하나의 충격적 자기발견이었다.
돌아보니 그것은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파괴적이고 상극적인 이중주였다. 평화롭고 충만한 생명적 누림의 시간을 통해 고양되었던 에로스는 어느 때부터인가 선을 넘어서 폭주하기 시작했고 부지불식간에 타나토스로 탈바꿈한 것이었다. 무기력과 공허로. 그리고 가기 자신과 세상을 향한 파괴적 공격성으로. 그렇게 나는 죽음을 살고 있었다.
이 생명적 모순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통스러운 서사적 성찰 끝에 다가온 존재는 바로 시바(Shiva)였다. 인도 신화 속의 파괴의 신. 시바의 파괴는 ‘파괴를 위한 파괴’가 아니다. 창조를 향한, 새 생명을 향한 파괴다. 지금의 나를 죽임으로써 거듭나는 것이, 상충하는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서사를 넘어서 시바의 서사로 나아가는 것이 내가 찾아가야 할 서사적 길이었다. 달리 말하면,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변증법적 초극이다. 그 너머에 있는 것은 아름다운 지속의 신 비슈누(Vishnu)의 신적 평화일 것이다.
서사의 힘은 참으로 놀랍다. 이러한 서사적 발견만으로도 혼란과 공격성으로 꽉 차 있던 나의 존재에 큰 안정과 평화가 찾아왔으니 말이다. 그것은 일시적인 심리변화 이상의 무엇이었다. 다리를 뽑아서 내밀던 현실적 상황에 대한 서사적 해법이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언젠가 맞이하게 될 진짜 ‘죽음’이라는 절대적 상황에 대한 인식에 변화가 생겨났다. 삶과 죽음은 결국 그렇게 어울려 움직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찾아와 스며드는 것이었다.
과연 이 평화가 얼마나 이어질지 장담하기 어렵다. 내 안의 에로스는 다시 넘치고 폭주해서 타나토스로 표변할 가능성이 상존한다. 어쩌면 나는 팔다리를 동시에 뽑아서 누군가에게 내밀지도 모른다. 바야흐로 ‘삼두구미를 부르는 세상’이 아닌가 말이다. 그때 나는 다시 이야기를 찾을 것이다. 오래 흘러온 신령한 이야기를. 그를 통해 다시금 내 안의 서사를 돌아볼 것이다. 고백하자면, 그림 속 시바와 비슈누의 표정이 평화롭게 보인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그 전에는 뭔가 흉하고 기괴하게 다가왔었던 것이다.
*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