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의 알람 기능을 잘 활용하고 있다. 오전 4시40분, 신호가 울린다. 일어나 5시 예불을 준비한다. 6시55분 도량 청소. 8시25분 하루를 여는 법석. 오후 1시20분 법사위원회 회의. 6시20분 승가연찬회. 이렇게 정해진 회의나 공부에 늦지 않기 위해 약속시간 5분이나 10분 전에 알람을 맞춘다. 덕분에 약속에 늦는 실수를 줄일 수 있다. 제시간에 갈 수 없는 사정이 생기면 가급적 빨리 사유를 전한다. 사소의중(事小義重), 비록 작은 일이지만 그것들의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올 3월 초순, 19살 청년들과 ‘지리산 청년인생학교’라는 문패를 걸고 1년 과정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이를 ‘애프터 스쿨’이라 부른다고 한다. 이들은 실상사 작은학교 졸업생들이 주축이다. 일단 여유 있게 멈추고, 진지하게 앞날을 모색하고 준비하자는 취지로 모였다. 최소한의 공통 필수과목과 자유로운 개인 선택과목이 있다. 젊은 청춘들과 함께하니 4·5월 숲이 더없이 푸르다. 더없이 빛난다.
배움지기들과 학생들은 불문율 하나를 정했다. 그것은 ‘5분 전 인생’을 살자는 것이다. 약속시간 5분 전에 자리에 앉아 있자는 것이다. 처음 내가 ‘5분 전’을 제안했을 때, 젊은 친구들이 즉시 그러겠다고 했다. 다소 의외였다. 그 제안에 앞서 내심 걱정이 없지는 않았다. 혹여 어른의 자리에서 ‘옳음’을 강요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닐지. 사회 분위기가 자유, 민주, 공정, 평등의 목소리가 높아지는지라 젊은이들을 대할 때는 늘 조심하고 조심해야 한다. 두해 전에 나는 매우 당혹스러운 경험을 했다. 한 청년에게 어떤 제안을 나름대로 조심스레 했다고 했는데,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그가 말을 끊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스님 인생이나 신경 쓰세요.” 그래서인지 가끔 그 기억이 재생되어 젊은이들을 만날 때는 풋풋한 기쁨도 있지만 살얼음을 밟는 조심도 있다. ‘위계에 의한 위력 행사’라는 말이 늘 신경을 쓰게 만든다.
마음공부하는 학생들을 지켜보는 법인 스님. 사진 실상사 제공
제안 이후, 신통하게도 ‘5분 전’ 착석은 잘 지켜졌다. 늦어질 사정이 생기면 연락도 적시에 주었다. 실상사에서 매주 수요일은 공동체 수행의 날이다. 오전에는 학습을 하고 오후에는 농장을 중심으로 일 수행을 한다. 오전 8시30분에 모여 일과를 시작한다. 인생학교 청년들은 어김없이 수요일엔 오전 8시25분에 착석한다. 그러면 어른들은 어떠한가? 대략 헤아려보니 4분의 3 정도만 제 시간에 착석하고 나머지 사람은 2~3분 정도 늦는다. 정각에 기도문을 읽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하는데, 늦게 오는 사람들 때문에 경건한 분위기가 다소 어지럽다. 어느 모임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다들 보는 눈이 있고 생각이 있으니 약속시간에 잘 모이는 문화가 자리 잡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소의중! 작은 일에 정성을 들여야 한다는 의미를 다시 한번 새겨본다.
봄꽃들이 여기저기서 피어나고 수목에 푸른 물이 싱그럽게 오른 어느 날, 점심을 먹고 청년들과 차담을 나누면서 넌지시 물었다. “어때? 5분 전에 자리에 앉는 기분이.” 학생들은 담담한 표정으로 매우 좋다고 말한다. 다행인가 싶었다. 그럼 우리 인생학교 청년들은 ‘5분 전 착석’을 문화로 만들어보자고 했다. 다들 좋다고 한다. 다시 물었다. 회의나 공부 시간에 늦은 사람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지. 대답은 대략 이러했다. “공정하지 못한 거 같다. 번번이 시간 약속 어기는 사람들은 미안한 마음도 없는 것 같다. 왠지 나만 손해 보는 느낌이다.” 모두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이런 생각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대체적으로 이런 기분일 것이다.
친구들의 그런 생각에 공감한다고 말하고 이어 내 의견을 말했다. 이렇게 생각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고. 약속은 구성원 모두가 지켜야 하는 거 맞다. 그리고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은, 혹은 지키지 못한 사유를 잘 전하지 않고 미안해하지 않는 사람들은 지적을 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내가 왠지 손해 보는 거 같다’라는 느낌에 대해 달리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약속은 나와 너, 나와 구성원 전체와의 약속이다. 그렇지만 약속은 ‘나와 나의 약속’이기도 하다. 약속은 내가 나와 마주하는 상식이고 양심이지 않겠는가. 업보(業報)라는 말이 있다. 행위와 그 결과를 말한다. 업보는 나와 타인과의 관계와 그 결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나와 나의 관계이고 결과이기도 하다. 내가 약속을 성실하게 지키면 나는 그 즉시 약속을 잘 지키는 성실한 사람이 된다. ‘성실한 나’의 형성은 누구를 위함도 아니다. 누구에게 인정받고자 함도 아니다. 이치가 이러하니 ‘내가 왠지 손해 보는 느낌’에 대해 잘 생각해 보자. 그날 차담은 이렇게 화두와 여운을 남기고 마무리했다.
글 법인 스님/실상사 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