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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벗님글방

나무의 웃음 속으로 들어가 봐! 천국이 있어

등록 2022-04-05 15:16수정 2022-04-05 17:03

사진 픽사베이
사진 픽사베이

태풍에 주저앉은 비닐하우스를 바라보는 농부처럼 세상살이가 답답하고 울적할 때는 동시(童詩)를 찾아 읽는다. 동시 한 편을 아이들처럼 큰 소리로 낭독하고 나면, 답답함도 울적함도 온데간데없고 문득 동심에 젖어든다. 오늘 아침에도 동시 한 편을 읽고 묵상에 들었다.

가을날 은행나무 밑에 가 본 적 있니?
소리 없이 웃고 있는 나무의 웃음이
등불보다 더 환한 은행나무 밑
나무의 웃음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나무도 네 생각 속으로 걸어 들어와
네 가슴에 천만 개 황금빛 등불을 켜 준단다
가을에는 등불보다 더 환한
나무의 웃음 속으로 걸어 들어가 봐

강원도 원주 불편당 앞에 선 고진하 목사 시인. 고진하 목사 시인 제공
강원도 원주 불편당 앞에 선 고진하 목사 시인. 고진하 목사 시인 제공

시인 이화주의 ‘나무의 웃음 속으로 걸어 들어가 봐’라는 제목의 시. 이 시를 읽고 나니, 지난해 가을 구룡사를 찾아갔던 기억이 불현듯 살아온다. 치악산 깊은 골짜기에 있는 사찰을 일부러 찾아간 것은 바로 사찰 앞에 있는 은행나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대웅전 아래 약간 비탈진 언덕에 우람하게 솟아 있는 은행나무, 그 수령(樹齡)은 잘 모르지만 아마도 수백년은 되었지 싶었다.

연인을 끌어안듯 두 팔을 힘껏 벌려 안았는데, 무려 다섯 아름이 넘었다. 나무를 품에 안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수천만개의 황금빛 등불을 밝힌 듯 하늘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전혀 다른 하늘, 다른 세상이었다. 황금빛 나뭇잎이 우수수 흩날리며 떨어지는 소리, 촘촘한 나뭇가지 사이로 날아다니는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잠겨 들며 나는 형언할 수 없는 환희에 젖었다. 그 순간 나는 시인처럼 ‘나무의 웃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등불보다 더 환한 은행나무 밑
나무의 웃음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나무도 네 생각 속으로 걸어 들어와
네 가슴에 천만 개 황금빛 등불을 켜 준단다

사진 픽사베이
사진 픽사베이

나무가 내 생각 속으로 걸어 들어와 켜준 등불, 그 등불 빛은 세상의 어떤 빛보다도 밝고 환했다. 그 환한 빛은 세상의 무엇과도 비길 데 없는 큰 위안과 기쁨을 주었다.

왜 아니겠는가. 나무는 우리의 마음을 열기만 하면 우리 속으로 걸어 들어온다. 번쩍이는 금화와 더 좋은 옷과 더 큰 자동차와 더 넓은 아파트와 같은 것들에 애면글면하던 마음을 내려놓고 순수한 가슴을 열기만 하면, 나무는 우리 속으로 걸어 들어온다.

나무는 가만히 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렇다. 로세르토 후에로스라는 시인의 말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은 그것이 ‘세상의 균형을 유지시켜’ 준다. 우리가 천진한 동심의 눈을 뜨고 볼 수만 있다면, 나무가 우리 속으로 걸어 들어와 우리 속에 등불을 켜 준다. 온갖 세상 탐욕에 끄달려 어두워지고 뒤틀린 우리 마음도 밝게 해 준다. 휴식을 상실한 마음에 휴식을 안겨 준다. 그 크고 너른 품에 덥석 안아서 말이다.

‘나무의 웃음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보라고 속삭이는 시인은 동심(童心)의 회복을 일깨우는 듯싶다. 동심의 회복이야말로 우리의 마음자리를 ‘성소’(聖所)로 곧추세우는 첫걸음이 아니던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 입장권을 얻을 수 없다던 예수의 가르침 역시 시인의 속삭임에서 멀지 않다. 바람결에 뒤척이는 나뭇잎에서 깔깔대는 나무의 웃음소리를 듣고, 그 깔깔대는 웃음소리와 하나 될 줄 아는 아이들의 놀라운 공감 능력을 회복할 때, 비로소 우리는 ‘천국’의 문지방을 훌쩍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글 고진하 목사 시인/원주 불편당 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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