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각 보신각 타종 모습.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오수기래진만안(午睡起來塵滿案) 반첨한일낙정화(半檐閑日落庭華) 전등록 읽다보니 구렛나루 먼저 희고
애써 공부와 다툰 세월이 얼마인가?
낮잠에서 깨어보니 책상 위엔 먼지만 가득한데
처마 끝에 반쯤 든 한가한 햇살 아래 뜨락의 꽃이 지네 저자인 노소(老素) 선사는 은둔으로 일관한 삶이었기에 행적은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짐작컨대 노(老)자는 존칭어이며 그나마 이름이라고 해봐야 ‘소’(素) 한 글자만 전한다. 원(元)나라 천력(天曆 1329~1330) 연간에 어떤 선객이 얻어 온 친필 게송 3수가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흔적이라 하겠다. 그 선시는 후대에 전해지지 못할까봐 주변에서 걱정할 정도로 수작이다. 다행이 3편 모두 <산암잡록>(山菴雜錄)에 실려있다. 그 가운데 1편만 인용했다. 한족 국가인 송나라가 망하고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 아래에서 많은 사회적 변화가 뒤따랐다. 같은 불교지만 송나라 불교와 원나라 불교(티벳불교의 한 종파로 흔히 라마교라고 부른다)는 결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 바람에 많은 선사들이 일본으로 망명할 정도였다. 중원에 남아서 선종가풍을 지킬 수 있는 방편으로 은둔을 선택한 경우가 많았다. <산암잡록>은 원대(元代) 선종 집안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 식으로 나열한 사서(史書) 형식의 책이다. 편집인 무온서중(無慍恕中 1309~1386) 선사는 태주(台州 강소성) 임해(臨海) 사람으로 진(陳)씨 집안 출신이다. 경산사(徑山寺 절강성 항주)로 출가하였으며 임제종 양기파 축원묘도(竺元妙道) 스님의 법을 이었다. 원나라가 쇠하고 명나라가 일어나는 시기에 활동했다. 선종에 관한 기록이 별로 없는 원나라 시대를 정리해달라는 장경중(張敬中)의 부탁을 받고 <산암잡록>을 썼다고 한다. 그 역시 세상에 나가기를 싫어하여 행각과 안거로 일생을 보냈다. 1374년 일본의 초청에 응하라는 나라의 부탁을 사양하고 천동사(天童寺 절강성 영파)로 돌아가서 이 책을 집필하기 시작했고 1378년 무렵 탈고했다. (해설) 한 방물의 물에도 천지의 은혜가 스며 있고 한 톨의 곡식에도 만인의 노고가 깃들어져 있다. 어떤 작가는 ‘봄부터 한여름 가을까지 그 여러 날 비바람 땡볕으로 익어 온 쌀’이라고 표현했다. 생각해보면 한 그릇의 밥이 내 앞에 올 때까지 정말 많은 이들의 노고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게다가 자연의 혜택까지 더해진다. 서두에서 인용한 시 한 수도 마찬가지다. 먼저 지은이가 있다. 그 다음 전달한 사람이 있다. 공개되면서 작품에 대한 평가가 더해진다. 보존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후 기록했다. 기록된 책이 여러 가지 이유로 없어지지 않도록 잘 건사해야 한다. 그래야 후대까지 전해지기 때문이다. 밥 한 그릇만큼 옛시 한 편에도 만인의 노고가 숨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 수 한 수마다 밥 한 술을 오래오래 입안에서 씹듯이 음미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선승들의 참선 모습. 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