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밝은 밤 혼자 씩씩대며 보냈던 편지에 답장이 왔다.
프랑스 사람인 그에게 일일이 영어로 표현하기가 어려워 한글로 쓴 긴 메일을 보냈는데, 그가 하나 하나씩 집중도 있게 읽어본 거 같았다.
답장에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지금은 외로움과 화에서 빠져나오려 하고 있다’고 하는 글들이 적혀있었다. 나름의 해결책을 찾기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이 편지에서 느껴져 응원하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긴 시간 동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어두운 곳에서 절망과 좌절 속에 눌려 있었을 그 아픔이 편지를 통해 절절하게 전해져 온다. 가끔 연락하는 옛 동료인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란, 가볍게 안부를 묻는 것과 ‘나도 그럴 때가 있어.’ 하는 위안밖에 더 있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 이런 표피적인 얘기들만 오가는 것이 과연 서로에게 무슨 이득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내 진심을 전달해야겠다 마음먹었다.
그동안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괜한 말로 관계에 상처가 나서 사이가 틀어지거나 아픈 사람을 더 아프게 한다는 원망을 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하고 싶은 말은 있지만 미루고 있었다. (그리고 상대방이 자기 신념에 반하는 얘기를 듣고 싶어하지 않고, 들을 수도 없을 거라는 판단을 했다.)
그러다보니 편지의 내용은 겉돌 수밖에 없었다. 전하고 싶은 말보다 ‘이러면 이렇게 될까? 저러면 저렇게 될까?’ 따지는 마음이 먼저 앞서는 걸 볼 때, 잃을 것도 없으면서, 나야말로 가진 게 많은 사람처럼 행동하는구나 싶다.
이럴 때일수록,
마음이 가난하다는 게 무엇인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받는 복이 무엇인지 그것이 얼마나 용기 있고 파워풀한 것인지 알게 된다. 무엇보다 솔직함이 유보된 관계란 얼마나 거추장스럽고 불편한가. (물론 그 솔직함이 진짜 솔직함이어야 되겠다. 우리는 솔직함을 앞세워 상대방을 내식대로 바꾸려는 강요의 도구로 자주 사용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어쨌든, 겉도는 지난 시간이 있어서 이렇게 한발짝 더 가까이서 만날 수 있는 여지가 생긴 게 아닐까. 그 사실을 잊지는 말아야겠다.
그 친구와, 지금은 그의 아내가 된 사람과 나는 둘의 커플시절부터 무척 가깝게 지냈다. 함께 여행하면서 온갖 일을 다 겪었고, 많은 시간 음악적 철학적으로 뜻을 같이하며 서로 이끌어주고 밀어주고 해온 우정이 있다 여겼는데, 서로가 헤어질 시간이 되어 한동안 떨어지고 나서 몇 년 뒤 다시 보게 되었을 때, 우리들 사이를 잇고 있는 것이 인간적인 관심이라기 보다는, 여전히 음악적 열정과 탐구와 저항정신 같은 것들로만 가득차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것들이 예전만큼 흥미있지도 않아서 나도 모르게 점점 힘이 빠졌다. 아는 사람이었지만 마치 모르는 사람들처럼 굉장히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왜 우리는 세상 돌아가는 얘기, 정부와 기업들에 대한 이야기, 음악 비지니스의 잘못된 이야기는 할 수 있으면서 정작 자기 얘기, 자기 사는 얘기, 자기의 일상적이고 고백적인 이야기는 나눌 수 없는 것일까. 음악에 대한 열정과 탐구와 밖에 널린 수많은 모순이라는 이슈로만 대화를 이어가려는 무의식적 습관을 어떻게 좀 바꿔볼 수 없을까? 물론 그런 이야기가 마냥 재미없지는 않지만, 그런 주제가 서로를 더 이해하게 하고 정신적 공감대를 만드는 데는 오히려 방해가 되는 듯했다. 현재의 우리를 만나기보다 과거의 시절을 리바이벌 하는 듯이 보였기에. 그 반복은 공허하기만 했다. 밖의 정세만을 살피는 이야기만 하자면, 자주 연락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더욱 가끔 더더욱 가끔 연락했다.
그런데 이제야, 힘든 터널을 지나고 이 관계가 다음 챕터(chapter)로 넘어갈 수 있는 여지가 생긴 게 아닌가 싶어 반가움마저 든다.
서울의 겨울은 춥다.
그리고 그해 우리가 같이 협심하여 앨범작업을 하던 정릉의 겨울은 서울의 추위 중에서 가장 혹독한 것이기도 했다. 녹음된 소리를 조정하는 엔지니어링과 시디 쟈켓에 쓰일 커버 디자인 페인팅을 맡은 친구부부의 집은, 얇은 슬레이트 지붕에 연탄불을 갈아야 하는 오래되고 낡은 달동네 월세집이었다. 집 안에서 두꺼운 파카를 입고 손을 호호 불어가면서 하던 작업들, 한쪽에서는 음악작업을, 한쪽에서는 앨범 커버 디자인작업을 했다. 집중이 요구되는 작업에 육체적으로 피곤한 시간이기도 했지만, 우리는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고 웃으면서 서로를 격려할 수 있는 여유도 있었다. 그 시절에 우리가 함께한 앨범은 만들어지는 과정부터, 완성되어 앨범으로 나오기까지 네것 내것 경계없이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내어준 뜨거운 우정의 결과물이었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음악적으로도 훌륭하고 내용적으로도 충실한 이때의 앨범에 나는 여전히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런던의 한 마스터링 스튜디오에 앨범의 마지막 마무리작업을 맡겼을 때, 그쪽도 그리 넉넉한 경제적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음악이 영(spiritual)적이라 비용을 받을 수 없다.’는 코멘트와 함께 어떤 비용도 마다하고 마무리작업을 깔끔히 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멀리 떨어져 있고 본적도 없지만, 당시 뿌리회복운동이라고 칭할 수 있는 세계 문화의 흐름에, 음악으로 동참하고 있는 서로를 알아보고 격려하는 형제애 같은 것을 느껴볼 수 있는 경험이기도 했다.
이 글을 쓰며 그때를 회상하니 당시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나는 그에게 몸과 마음이 회복되어 건강했으면 좋겠다고, 그래야 우리가 아직 못다한 음악 프로젝트를 언젠가는 완결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강건하기를 바란다고 썼다.
그리고 이 일을 통해 친한 친구인 그의 아내와도 그간의 힘겨운 일들을 꺼내놓고 같이 이야기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당시, 여러 이유로 프랑스행을 택하게 되었던 그들이었지만, 그곳에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한국에서의 일을 회상하며 그때가 좋았는데… 하고 미련을 갖는 거 같은 인상을 종종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우리는 아직 젊고 우리의 남은 인생의 가능성이 아깝지 않겠느냐고. 우리가 레게(reggae)와 덥(dub)음악을 통해 자극받았던, 전통과 뿌리에 대한 인식과 의식을 더 깊게 느끼기 위해서라도 각자의 여정에 충실하기를 바란다고 썼다.
한때, 홍대클럽 파티 중에서 가장 재밌고 새로운 사운드를 들을 수 있는 이벤트였던 ‘레게와 덥의 밤’을 기획하던 때가 생각난다.
대체 그때는 어떤 힘으로 그 무거운 장비와 악기를 매번 옮기고 밤새 연주할 수 있었는지… 지나고보니 재밌고 뜨거운 시간이었다. 우리가 언젠가 다시 모이게 되면 그때보다 더 구성지고 재미난 잔치를 벌일 수 있겠지.
지난 우리들은 우리가 만든 이상에 빠져 다른 걸 보기가 어려웠던 거 같다. 사람이란 아는 게 없고 무지하면 자기도 모르게 오만한 자리에 앉기를 원하게 되는 거처럼. 돌아보면, 우리의 가치를 평화와 사랑이라 내세웠지만 실제론 그게 뭔지 잘 알지 못했던 거 같다. 그 말속에 남보다 특별해지고 싶은 욕구, 좀더 높은 곳에 오르고 싶은 욕망이 투사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다시 만날 때는 그동안의 시간과 경험을 통해서 얻은 앎이 새롭게 발현되기를 기대해본다. 몸의 발바닥 같은 겸손한 사람, 흙속의 지렁이같은 드러나지 않지만 남몰래 도움이 되는 인간으로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정말 기쁜 일이 되지 않을까!
그때가 되면 큰 잔치를 열어보고 싶다.
우리들의 음악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주고 싶다.
함께하는 모두와 손잡고 밝은 기운을 나눌 수 있는 둥글둥글한 그런 자리를 만들고 싶다.
젊은 열정과 바빌론 세상에 대한 저항이란 기치로 달렸던 그 시절을 지나 활짝 열린 마음으로 다시 연결된 정신으로 큰 대동제를 여는 상상을 해본다.
마지막 무대로는 씨름과 택견도 했으면 좋겠다.
상상만 해도 즐겁다.
글 김반장/순천사랑어린학교 공동체 회원.
***이 시리즈는 순천사랑어린학교장 김민해 목사가 발간하는 <월간 풍경소리>와 함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