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심 내지마 !
“ 안녕하세요 . 부산에 살고 있는 불자입니다 . 불교를 공부하다보니 넘어가지 않는 부분이 있어 메일을 보냅니다 . 분별에 관한 건데요 , 분별을 하지 말고 차별하지 말라고 불교에서는 가르칩니다 . 예를 들어 여행을 갔는데 더러운 방을 주면서 자라고하면 나는 깨끗한 방을 찾지 그냥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분별 안 하는 건가요 ? 이미 우리 마음에는 분별이 일어나 선택을 하는데 분별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 , 이런 것도 안 해야 하는 건가요 ? 예가 적절한지는 모르겠는데 이 부분을 해결할 수가 없네요 . 명쾌한 답변을 기다립니다 .”
종무소에서 내게 건넨 질문입니다 . 사실 이 질문은 불자들이 흔히 묻는 질문 있습니다 . ‘ 분별심 ’ 은 스님들의 법회나 글에서 자주 나오는 말입니다 . 또 스님들과도 함께 공부하다 보면 ‘ 분별심 내지 말라 ’ 는 말에서 토론이 접점을 찾지 못합니다 . 가령 승찬 선사의 < 신심명 > 첫구절 , ‘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 다만 이것저것 분별하지 말라 ’ 는 구절에 있어 의견이 분분합니다 . 세상을 어떻게 분별하지 않고 살수가 있는가 , 라는 의견을 제시합니다 . 같은 말을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 개념의 오류이고 혼돈입니다 .
오랜 기간 경전을 공부하고 스님들과 학자들의 책을 통해서 불교를 공부한 어느 불자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 불교는 어려운 게 아니라 혼란스럽다고요 . 이 말은 혼란스러워서 어렵다는 말입니다 . ‘ 혼란스럽다 ’ 는 말은 , 서술이 모호하고 , 용어를 이리저리 자의적으로 사용하고 . 마땅한 장소에 사용하고 있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 전적으로 옳은 지적입니다 . 특히 불교용어는 한자이기 때문에 경전에 근거하지 않고 잘 해석하지 않으면 관념의 울타리에 묶일 위험이 있습니다 . 또한 언어는 그 시대 대중이 합의한 약속이기 때문에 시대와 지역에 따라 본래의 뜻이 변하기도 합니다 . 그러니 이런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자의적이고 관념적으로 용어를 사용하면 대중이 문장에서 길을 읽게 됩니다 .
그럼 , 불자님의 질문에 답을 하겠습니다 . ‘ 분별 ( 分別 )’ 이라는 말은 경전과 어록과 논서에 자주 등장하는 주요 용어입니다 . 풀어보면 나누어서 구별짓는다 , 는 말입니다 . 세간의 다수 사람들의 분별에 대한 정의는 이렇습니다 . ‘ 잘 구분한다 .’ ‘ 잘 판단한다 .’ ‘ 이것과 저것의 모양 , 내용 , 특징 등의 차이를 잘 파악한다 .’ 대략 이렇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 세간의 용법으로 맞는 말입니다 . 이어 불자님 의문대로 생각해봅니다 . 여행지에서 숙소에 갔는데 , 누가 봐도 방이 더럽습니다 . 그럼 어떻게 판단해야할까요 ? 방안에서 좋지 않은 냄새가 나고 , 이불에 머리카락이 묻어있고 ,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지 않았는데 그 ‘ 사실 ’ 을 부정해야할까요 ? 내가 지나치게 예민해서 그렇다고 자기를 탓해야 할까요 ? 아닙니다 . 객관적 사실을 잘 파악하고 인식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 악취가 나고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있는데 그 사실을 부정하거나 그냥 보아 넘기라는 말은 상식에 어긋납니다 . 불법은 상식을 부정하거나 왜곡하지 않습니다 . 손님은 당연하게 그 방을 거부할 권리가 있습니다 . 다만 그 상황에서 자신의 마음과 감정에 화가 일어나지 않는가를 잘 살펴야 합니다 . 또 숙소 주인에게 무례하거나 분노를 격하게 내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 이렇듯 마음수행은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잘 파악하고 , 이어 자신의 마음과 처신을 잘 살피는 일입니다 .
다음으로 , 경전과 어록과 논서에서 ‘ 분별 ’ 은 어떻게 사용되고 있을까요 ? 왜 그토록 ‘ 분별심 ’ 의 위험을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요 ? 먼저 , 분별이라는 용어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 하나는 ‘ 선분별 ( 善分別 ) 입니다 . 잘 분별하라는 뜻입니다 . 앞에서 말했듯이 내 마음 , 상대의 감정 , 어떤 대상 , 어떤 사건 , 어떤 상황 등의 내용을 선입견과 사심 없이 잘 파악하고 , 판단하고 , 다른 것과 잘 구분 하라는 뜻입니다 . 다시 말하지만 붓다의 가르침은 일반상식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
선분별 , 잘 파악하라는 것은 이런 것들입니다 . 거짓말과 참말을 잘 파악하고 구분하는 것 , 남을 고통스럽게 하는 일과 행복을 주는 일을 잘 구분하는 것 , 왜곡된 주장과 교묘한 논리를 잘 파악하는 것 , 옳고 그름을 잘 파악하는 일입니다 . 나와 너의 다른 특징을 잘 파악하는 일입니다 . 다만 옳고 그름의 판단은 매우 신중하고 현명해야 합니다 . 그래서 십바라밀의 마지막 지혜바라밀은 세상의 현상과 맥락 등을 잘 파악하는 지혜를 말합니다 .
이런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 너와 나를 넘어서고 , 옭고 그름을 넘어서서 중도적으로 화합하여 살자 , 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이른바 시비분별을 떠나고 , 선악의 이분법에 얽매이지 않고 , 진영논리를 떠나서 대립과 갈등을 넘어서자는 메시지입니다 . 언뜻 좋은 소리이고 맞는 말일 수 있습니다 . 그러나 자칫하면 매우 위험한 논리입니다 . 세상일은 선과 악이 분명하고 옳고 그름이 분명한 것들이 많습니다 . 그런데 두루뭉술하게 둘로 가르지 말자고 합니다 . 아마 ‘ 분별 ’ 에 대해 질문하신 불자님도 이런 혼란에 당황한 듯합니다 . 잘 분별하지 않으면 도덕과 윤리에 어긋나는 삶을 살게 됩니다 . 모호함과 불분명함은 중도가 아닙니다 .
붓다는 십불선업 ( 十不善業 ) 을 경계하라고 당부합니다 . 살생과 폭력 , 거짓과 왜곡 , 착취 , 성폭력 , 분노 , 탐욕 등의 의도와 행위는 분명 훌륭하지 못하고 나와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 분명 옳고 그름을 잘 파악하고 구분하는 지혜입니다 . 또 숫타니파타에서는 천박한 사람과 고귀한 사람을 매우 자세하게 열거하고 있습니다 . 어떻습니까 ? 잘 분별하라는 말씀이 아닙니까 ? 그래서 팔정도 ( 八正道 ) 의 첫째 항목이 정견 ( 正見 ) 입니다 . 사실을 바로 보는 , 잘 분별하는 일이 수행의 근본이라는 뜻입니다 . 그러므로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잘 분별하는 일에 조금도 주저하거나 갈등할 필요가 없습니다 .
그렇다면 왜 스님들과 학자들은 전가의 보도처럼 ‘ 분별심 내지말라 ’ 고 하면서 혼란스럽게 할까요 ? 이유는 간단합니다 . 경전과 논서에서 경계하는 ‘ 분별 ’ 을 ‘ 선분별 ’ 에도 적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아니면 매우 친절한 설명을 생략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 그럼 그토록 경계하는 ‘ 분별 ’ 은 무엇일까요 ? 이제부터 조금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 정신 바짝 차리십시오 .
앞에서 ‘ 선분별 ( 善分別 )’ 을 말했고 , 이제는 ‘ 무분별 ( 無分別 )’ 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 ‘ 무분별 ’, 글자 그대로 풀면 ‘ 분별하지 말라 ’ 는 뜻입니다 .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분별이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 ‘ 선분별 ’ 은 사물 , 사건 , 현상을 잘 파악하고 판단하라는 뜻입니다 . ‘ 무분별 ’ 은 ‘ 이것 ’ 과 ‘ 저것 ’ 을 별개의 , 독립적이고 , 고정적인 , 모습으로 파악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 잘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 자세하게 설명해보겠습니다 . 여기 10 미터 길이의 나무가 있고 옆에 5 미터 길의 나무가 있습니다 . 그럼 우리는 ‘ 큰 나무 ’ 와 ‘ 작은 나무 ’ 로 파악하고 구분할 수 있습니다 . 이를 선분별이라 합니다 . 그런데 생각해봅시다 . ‘ 큰 나무 ’ 는 처음부터 , 홀로 독립적으로 , 늘 고정불변의 모습으로 ‘ 큰 나무 ’ 입니까 ? ‘ 작은 나무 ’ 도 그러합니까 ? ‘ 큰 나무 ’ 라는 이름과 ‘ 작은 나무 ’ 라는 이름은 10 미터 길이와 5 미터 길이를 말미암지 않고 홀로 ‘ 큰 나무 ’ ‘ 작은 나무 ’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 10 미터 길이의 나무만을 ‘ 큰 나무 ’ 라고 규정할 수 없습니다 . 이런 예는 무수히 많습니다 . ‘ 높음 ’ 과 ‘ 낮음 ’ 의 구분은 서로를 비교하여 성립됩니다 . 그러므로 ‘ 높음 ’ 은 홀로 ‘ 높음 ’ 이 아닙니다 . 그래서 ‘ 낮음 ’ 과 ‘ 높음 ’ 은 별개의 , 독립적으로 , 고정되고 , 불변하는 모습일 수 없습니다 . 그런데 이 둘을 연관 없이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 이럴 때 ‘ 분별하지 말라 ’ 는 말을 사용합니다 . 처음부터 고정되고 . 불변하고 , 별개의 모습으로 성립할 수 없음을 말할 때 우리는 ‘ 분별하지 말라 ’( 無分別 ) 고 하는 것입니다 .
모든 존재 / 존재들은 분별과 무분별의 두 모습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 ‘ 높음 ’ 과 ‘ 낮음 ’ 이 분명 존재하면서 ( 분별 , 선분별 ), 그 ‘ 높음 ’ 과 ‘ 낮음 ’ 은 별도의 고립되고 독립적인 모습이 아닌 , 결코 별개의 영역이 아닌 무분별입니다 .
‘ 너 ’ 가 없이 ‘ 나 ’ 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 ‘ 너 ’ 라는 말과 ‘ 나 ’ 라는 말은 본래부터 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 별개의 영역이 아닙니다 . 서로를 말미암을 때 비로소 ‘ 너 ’ 와 ‘ 나 ’ 가 동시에 성립합니다 . 그래서 모든 유정무정의 존재는 서로를 말미암아 ‘ 명칭 ’ 이 성립합니다 . 그래서 각기 다른 ‘ 명칭 ’ 이 성립합니다 , 선분별이면서 무분별입니다 .
이제 정리합니다 .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우리는 사심 없이 , 편견 없이 , 자의적이지 않게 , 잘 파악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 우리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 , 아니 더불어 있기 때문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 그러니 서로 말미암지 않고 별개의 영역에서 홀로 탄생한 존재라는 착각을 버려야 합니다 . 사실의 세계가 이러합니다 .
분명합니다 . 지금 여기 너와 내가 있습니다 . 높고 낮음이 있습니다 . 사람과 자연이 있습니다 . 그렇게 잘 분별해야 합니다 . 동시에 서로를 말미암아 있음도 알아야 합니다 . 모든 존재는 구별 되면서도 나눌 수 없는 모습입니다 . 함께 있을 때 홀로도 빛나고 , 홀로도 빛나야 함께도 빛날 수 있는 이치가 선분별과 무분별에 있습니다 .
글 법인 스님 / 실상사 한주
사진 픽사베이
사진 픽사베이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