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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공동체마을체험기

“서로 빼앗지 않으면 다 자기 것은 있다”

등록 2010-11-04 11:07

‘무소유 길을 묻다’ 즉문즉설 <2> 박기호 신부

물질이 인간을 조종, 있는 것 최대한 적게 써야

남동생 박노해, 여동생 수녀, 내력같은 거 없어

 

 생명평화결사와 <한겨레>가 ‘이 시대 무소유의 길을 묻다’란 주제로 주최한 박기호 신부(61·산위의마을 촌장)의 즉문즉설이 2일 오후 7시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펼쳐졌다.

이날 300여 명의 청중들은 지난 2004년부터 소백산에서 ‘산위의마을’이란 신앙 생태공동체를 일구어 살아가고 있는 그에 대해 ‘공동체로 직접 살아보니 어떻더냐’는 질문에서부터 ‘여러 가구가 함께 살다 보면 인간관계로 인한 괴로움은 없는지’ 등 구체적인 궁금증들을 쏟아냈다.

 

‘언어의 마술사’로 꼽히는 친동생 박노해 시인과 달리 평소 거의 말수가 없고, 어눌한 말투인 박 신부는 “인간관계에서 (특별한) 비법은 없다”거나 “살아보니 정말 어렵다”는 솔직 담백한 답변을 털어놨다. 박 신부는 “과거엔 장유유서라는 유교적 질서로 지배했지만 이제 신세대는 자기 감정을 거르지 않고 표현하고, 기존 세대는 이를 잘 수용하지 못해 갈등을 일으키며 서로 힘들어 한다”면서 “기본적으로 대화를 많이 하고,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는 것같다”고 말했다. <야생초 편지>의 저자인 황대권 생명평화결사 운영위원장의 사회로 진행된 즉문즉답이다.

 

 

실패해도 남는 장사라는 생각으로 시작

 

 -산위의마을은 어떤 공동체인가.

 =우리 마을은 가톨릭신앙인공동체 마을이다. 사도행전 공동체를 보면  서로 가진 것을 내어놓고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랬더니 그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이 아무도 없더라는 기록이 두 군데 나온다. 저희도 그런 공동체 삶에 도전해보자는 것이다. 실패해도 남는 장사라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자기 것을 많건 적건 내놓고 모이자고 했는데 잘 안 모이더라.(청중 웃음)  열한 세대가 와서 4세대는 돌아가고 일곱 세대가 남았다.  공동으로 기도하고 식사하고 노동한다. 아이들도 함께 기른다. 평신도들의 수도원 같은 분위기다.

 

 -다른 공동체들과 교류를 하지 않는가.

 =공동체로 살아보니 이것은 이론이 아니라 삶이라는 것을 즉시 느끼겠더라. 교류보다는 내 앞에 주어진 삶을 살아내는 게 급했다.

 -산위의마을 공동체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생활한다고 하는데, 현대 물질만능 시대에 마음과 뜻이 화합되는지 궁금하다.

 =항상 머리로만 살았는데, 몸으로 산다는 것도 쉽지는 않은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육체적인 건 쉬운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 밭에서 일 해보면 그렇지도 않다. 그래서 어려움이 많은데, 저희 마을에선 농사를 짓는다. 더덕 고추 콩, 세 가지 농사를 짓는다. 제초제, 화학비료 안쓸 뿐 방식은 그대로 하는 건데, 고추는 유기농으로 한다는 게 너무 힘들어서 돈으로 한 번도 바꿔본 적이 없어서 고추는 포기해 우리 먹을 것만 가꾸고  야콘을 한다. 판매를 목적으로는 더덕, 야콘, 콩 농사를 짓고 있다.

가족들이 제일 오래 산 사람은 5년. 4년 산 사람도 있고, 나머지 가족들은 2년 차, 1년 차다. 적어도 농업은 파종해서 수확까지 4계절을 거쳐야 하는데, 경험의 축척이 잘 안된다. 귀농해본 분들은 잘 알겠지만 알만 하면 인물이 교체된다. 가족이 교체되니. 어떻게 잘 안된다. 그런 어려움이 지금까지 계속 되고 있다. 공동체에선 관계 문제가 제일 크다. 인간이 함께 모이면 그렇다. 직장에서 하루 8시간 근무하는 것도 마음이 안 맞으면 상당히 어려운데, 이건 눈만 뜨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식사도, 일하는 것도, 일 끝나면 기도도 함께 한다. 잘 때만 집에 가서 자고, 자고 나면 또 만나니 서로 관계가 쉽지 않다. 그것은 부부간에도 마찬가지 아닌가. 신부도, 수녀도 마찬가지다. 이것을 극복해 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 자체가 공동체 수행이다.  농사는 3가지 주작이 있고, 나머지도 최대한 자급을 하려고 노력한다.  5월부터 10월 중순까지는 자급률이 높다. 푸성귀가 나오는 봄부터 가을까지는 그런대로 자급을 한다. 그러나 겨울을 나면서는 시장에 의지하는 게 높다.

 

 

어려운 것 아니까 질문하고, 그만큼 대답도 어려워

 

 -생태공동체를 꿈꾸는 청년이다. 공동체 생활을 하다 보면 같이 밥 먹고, 화장실 가는 것 등이 똑같으니 사람들 간에 상처나 오해나 갈등이 생길 때 어떻게 해결하는지. 공동체 생활을 할 때 마음이나 가장 필요한 덕목이 무엇인지,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정말 어렵다. 어려운 것을 아니까 질문을 한 것같다. 대답도 어렵다. 방법을 알고 있으면 해결될 텐데 쉽지 않다. 수십 년의 역사를 가진 곳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바뀌고, 시대가 바뀌어 전통적인 방식으론 어렵다는 얘기도 한다. 과거엔 한국사회는 관계의 삶을 질서 지워주는 게 유교적 질서였다. 장유유서였다. 그것이 한국 사회의 가정과 직장 사회 안에서 관계 문제를 어느 정도 정리해주는 기본적 틀이 되었다. 하지만 이제 장유유서만으로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어서 신세대는 자기 감정을 걸림 없이 거르지 않고 표현하고, 그런 것을 기존 세대가 잘 수용하지 못해 갈등도 생긴다. 그래서 갈수록 힘들어가는 부분도 있다.

공동체에선 그래도 어려움에 처하면 일단은 누구나 공동체로 잘 살아보려는 마음으로 왔기에 이해하고 관대하게 생각해보려는 의도는 가지고 있다. 그렇게 시도는 한다. 그런 것이 안에서 쌓여 한꺼번에 터지기도 하고, 사람 스타일마다 다르다. 기본적으로는 대화를 많이 하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는 것 같다. 자기가 좋다 그르다를 다 얘기할 수는 없지만, 얘기를 하는 게 낫다. 어떤 가족이 어떤 문제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인다는 것을 개인적으로 얘기 못하면 리더에게 얘기해 둘러앉아 고백하는 자리들을 갖는다. 그런 게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공동체는 자기 생각과 같은 것은 더 키우고, 다른 것은 버리는 곳이다. 그에 입각해 자기를 끊임없이 버리고 내려놓고, 그런 것이 가장 중요한 공동체의 기본적인 덕목이 되는 것이다.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이 중요한 덕목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공동체 정신을 우선하는 것이고, 서로를 배려하는 것이다.

 

‘봉은사 땅밟기’ 독선, 지성의 성장이 필요해

 

 -신부님은 사제로서 영성지도도 많이 하는데 영성생활과 무소유적 삶과 철학이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

 =무소유라는 것을 영성적인 측면에서 어떻게 봐야하는가 하고, 생태적인 측면하고, 사회적 측면으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태적 측면에 먼저 보자. 저는 종교인이어서 우리 종교의 틀에서 얘기하자면 세상 창조라는 것이 빛의 창조, 하늘과 땅, 물 ,식물, 동물, 마지막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마지막에 창조된 것일수록 불완전한 것이다. 인간은 이미 창조된 것 안에서 틈새 생활을 하는 존재다. 인간이 자연을 자기 마음대로 재단하고 바꾸는 것이 아니고, 자연 안에서, 틈새에서 사는 존재다. 사회적 측면에선 대량 생산, 대량 소비, 대량 폐기의 산업사회 틀 안에서 전체 세계를 개조하고, 삶의 차원으로 바꾸는 대안으로 작은 삶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영적인 존재이고, 그럼으로 모든 정향이 영적 세계를 향해 있는 것인데, 영적 세계와 소유의 문제는 서로 상극적이지 않은가.

 

 -(사회자)최근 봉은사에서 땅 밝기라는 행태가 벌어졌다. 이를 어떻게 보는가.

 =우리나라는 종교다원주의 사회지만 90년대까지도 공존이 잘 이루어졌지 않느냐.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저돌적 선교의 형태가 나타나면서,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져가는 것 같다. 신념이라는 것이 사람이 살아가는데 중요한 것인데, 어떤 신념이냐도 중요하다. 전쟁부터, 지상의 불행의 대부분이 자기 생각은 확실히 진리고, 다른 사람의 생각은 잘못됐다고 갈라 놓는데서 왔다고 본다.

그런 측면에서 한국 사회에서 갈등이 우려되고 걱정스럽다. 90년대 말에도 학교의 단군상 목을 치고, 한 때는 불상에 가해하고, 한 때는 성당, 성모님 상에다가도 페인트를 칠하는 일들이 있었다. 그것을 주도하는 것은 불교신자나 가톨릭신자는 아니라는 것은 거의 공감한다. 대체적으로 개신교의 일부 과격한 선교 방식을 가진 그룹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성의 성장이 필요하다. 교직자들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다. 교직자들도 지성적 성장을 통해 변화되고 새롭게 바뀌면 이런 문제가 해소되지 않을까. 그런 기미가 잘 안보이고 과격해져 가는 부분이 우려스럽다. 그래도 우리 사회가 그야말로 지성이 강화되고, 건강해져가면 그런 일부 세력들이 발을 디딜 땅이 좁아지지 않겠는가.

 

4대강, 죽자 사자 파내 선거 때 표 얻으려 푸닥거리

 

 -정부는 4대강 사업을 ‘4대강 살리기’라고 한다. 생태계 파괴 아닌가.

 =생태를 살리자, 지구를 살리자는 표현도 하지만, 생태나 지구는 망하는 것이 아니다. 일시적으로 상처는 입지만, 그 안에 인간이나 생명체들이 죽는 것이지. 현재 4대강을 이 정부에서 죽자 사자 파내서 다음 선거 때쯤 준공 팡파레를 울리고, 온 텔레비전 뉴스를 도배하고, 유람선 띄우고 할 것이다. 그런 푸닥거리 통해 표를 얻으려 할 거고. 그 다음 정부는 중간 터널 이어 대운하를 만들 생각을 하겠지만, 한국 사회 미래의 지성이, 국민들이 용납을 안 할 것이다.

 언젠가는 경제를 살리겠다는 프레임들은 물러가고 도덕세계, 정신세계를 세우자는 때가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도로 메워질 것이고, 복원이 될 것이다. 자연에 대한 신뢰를 가져야 한다. 강이 거꾸로 가는 외국 사례를 잘 몰라서 그런데, 한강에서 청계천을 퍼올려서 거꾸로 흘러가는 것인데, 자연의 순리도, 질서도 아닌 것이 오래 가지 못한다. 지성이 깨이면, 생태의 주인이신 존재가 다 복원시킨다. 다만 돈을 한없이 퍼부어대니, 허리띠 졸라매는 국민들 입장에서 인내하기 어려운 것인데, 멀리 보면 모든 것이 무효화된다.

 

 -가톨릭의 요즘 흐름과 변화를 어떻게 보는가.

 =유다교 사회 안에서 한 젊은 예언자가 등장해서 유다교 사회가 신봉하는 그런 율법 세계의 어긋나는 부분들을 새로운 삶의 대안을 가지고 등장한 분이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유다교 사회 안에서 배척되고 제거됐다. 그런데 그분이 가르치신 것이 맞다며 그것을 추종하는 세력들이 무한정 늘어나버려서 그게 그리스도교가 됐다. 가톨릭교회란 유다교를 바탕으로 등장했는데, 출발할 때는 일종의 이단 종교다. 유다교의 입장에서 볼 때. 이단의 추종이 힘을 얻어서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스승으로 따르는 무리들이다. 그 무리들을 교회라고 했다. 자기 스승을 따르는 삶의 형태가 어때야 하느냐를 볼 때는 예수님의 삶이 무소유의 삶이냐, 소유의 삶이냐는 해답이 나온다. 진정한 삶이라는 것은 정말 모든 존재에 대한 사랑을 진리로 삼아서 생명의 길로 고백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정신세계와 그것이 조직화되어서 교계를 이루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조직화된 것은 교회를 유지 발전 시키기 위한 것이다. 틀을 관장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무소유의 삶을 추구하는 흐름이 있었고, 수도회 운동이 있었고, 교회를 유지하는 조직체계를 관장하는 방식이 있었다. 지금은 교회가 전체적으로 일부 부분을 빼놓고는 영성을 추구하는 쪽으로 기울어가는 추세다. 그런 것은 서적을 통해 많이 볼 수 있다. 16세기 이전의 영성까지도 발굴하고 생활화 시키려고 하는 추세로 가고 있다.

 

호화 여객선으로부터 뛰어내릴 수 있다면 뛰어내리는 것이 살 길

 

 -신부님도 물욕과 소유욕 때문에 괴로웠던 적이 있는가.

 =신부로 사는데 좋은 점이라는 것은 가지지 않아도 풍요롭고, 부족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어느 때라도, 무엇이든지 간에 돈도 부족함이 없으면 많은 것이니, 부족함을 느껴보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고, 주변의 좋은 사람들 만나볼 수 있어서 좋고, 모든 것이 풍요롭다. 무소유의 삶이란 것 자체가 무엇을 먹고 마시는 것을 걱정하지 않은 것을 기초로 두는 것인데. 사람은 다 자기 먹을 것 가지고 태어났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서로 뺏지 않으면 다 자기 것은 있다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소유다.

 인간의 기본적 본성의 욕구라는 게, 세 가지다. 식욕, 성욕, 수면욕이다. 세 가지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기본적으로 선험적으로 태생적으로 가지고 나온 것이다. 배우지 않아도 젖을 빨 줄 알고, 성행위를 할 줄 알고, 잘 줄 안다. 개체를 살리기 위한 것이다. 사회적 으로는 소유욕과 지배욕이 있다. 내 먹을 것을 가져가버리지 않을까 해서 축적하려는 소유욕이 생긴다. 무의식으로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나타내려는 게 명예욕으로 나타난다. 성욕은 지배욕으로 나타난다. 

 그런 것들이 사회적 욕구로서 소유욕, 명예욕, 지배욕으로 나타나는 것인데, 욕심을 버린다는 것은 그런 관계 속에서 함께 먹고 사는 길이 있고, 함께 사는 길이 있다는 믿음에서 가능하다. 우리가 소유한 것이나 무엇이든지 공유가 가능하다. 그게 공동체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영성의 개념은 어떤 물질 안에서 영적 차원을 보는 것, 물질의 내면적인 세계, 이면적인 것, 뒷쪽의 숨어 있는 언어를 듣는다든가, 그런 것이 영성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신부님으로 하여금 공동체운동에 힘을 쏟게 한 요인이 뭔가.

 =본당 신부로서 설교할 때는 사랑의 실천이라든가, 나눔이라든가, 신앙생활의 덕목을 강조하는데, 종교적으로 훌륭하게 사는 생활이 어떤 것인지 성찰을 하게 됐다. 우리가 지금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가난한 사람을 찾아서 나누고 정의를 외칠 때 배가 가는 목적지가 있다. 그런데 도착하고 있는 곳, 도착할 세계가 어떤 곳이냐.

 신앙적 차원에서 보자면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는데, 내가 살아온 모든 시간들이, 이웃과 사랑의 실천들이, 모든 것이 그것은 결국 세상의 생태를 파괴하고, 전체적인 세계가 대량 생산, 대량 소비, 대량 폐기에 함께 참여한 삶이라면 어떻게 되겠는가. 인간의 정신을 포박하면서 모든 인간의 주체성을 지배하는 마케팅에 예속되어 사는 삶을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호화 여객선으로부터 뛰어내릴 수 있다면 뛰어내리는 것이 살 길이다.  그래서 공동체 생각을 하게 됐다. 예수살이공동체는 안티소비문화운동을 해왔다. 그런 정신을 실현하는 삶도 필요하다. 영성의 담보가 가능한 생활을 추구하는 곳이 산위의마을이다.

 

낮에는 우익, 밤에는 좌익을 한 시대가 가고 시달리다 도망

 

 -신부님이 박노해 시인이 형이라는 것을 알고 놀랐다. 여동생은 수녀다. 집안 내력에 온몸을 불살라 사회에 몸으로 참여하고 진지하게 성찰하고 삶에서 이루어내고 뜻있게 살고자 하는 집안 내력이 있는지. 부모님이 어떻게 자녀를 길렀는지 궁금하다.

 =그런 것 없다. 거창한 표현으로 신화화하며 사소한 것까지도 의미를 부여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 우리는 평범했다. 저도 가난하게 살았지만 저만 가난한 게 아니고 그 시절엔 다 가난했다. 저는 시골에서 고등하교 1학년 때 상경했다. 올해 초 작고한 정농회 강대인 선생, 벼농사의 유기농화를 이룬 분인데 그분이 중학교 동창이다. 저는 벌교중학교를 나왔는데, 그때 농업학교에 간 세 명이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고등학교 1학년 때 농약 치다 죽었고, 또 한 명이 강대인이다. 저는 농사 안 짓는다고 도망치다시피 서울로 왔는데, 나만 그랬나. 그땐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내 동생도 고등학교 1학년 때 올라왔다. 나는 군대에 있을 때인데, 동생이 선린상고 야간 다니고, 낮엔 증권회사에 다녔다. 그 시대엔 많은 사람들이 낮에 일하고 밤엔 학교에 다녔다.

 여순반란사건으로 고흥군에는 군인 출신이 적다. 연좌제 때문에 육사도 못간 사람들이 많았다. 여순반란사건의 피해도 그렇다. 저희 아버님이 동네 이장이었다. 낮에는 우익, 밤에는 좌익 한 시대가 가고, 이리저리 시달리다가 도망을 간 것이 목포였다. 그때는 서울로 도망갈지도 모르고, 목포에서 나를 낳았다. 근대사의 배경 안에 담겨진 우리네 삶은 큰 차이가 없다. 어버지는 초등학교 졸업하던 해에 돌아가시고, 동생들은 아버님 얼굴도 모르고 살았다. 가정의 영향이라기보다는 각자가 살다보니, 각자 인생으로 그렇게 됐다.

 

 -언어 구사력이 뛰어난 박 시인과 신부님은  성격이 대조적이다. 박노해 시인과 에피소드는.

 =저는 장남으로 태어났으니 최고의 대우를 받고 크지 않았겠느냐. 제가 철이 들 무렵까지도 집안에서 농사도 짓고, 중농으로 살았었고,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는 동생이 다섯 살 여섯 살 때였다. 그래가지고 아무것도 모르고, 철들고 보니 집안도 불안스럽고 혼란 속에 담겨진 상태였다. 저는 동생들을 챙겨야 하는 입장이었다. 나도 어머니한테 얻어 터지면서 살고, 동생들 때리고 야단치고 살았다.

 -박노해 시인이 감옥 들락날락 할 때 형님으로서 야단친 적은 없냐.

 =고등학교 때까지는 그랬다. 미안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서로 삶을 존중했다. 그래서 별로 충돌은 없었다.

 

죽을 때까지 남는 게 명예욕, 사소한 자존심이 소유보다 더 큰 작용

 

 -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다. 담배를 수십 년 피었는데, 누가 담배는 끊는 게 아니고 참는 것이라고 하더라. 소유가 본능이 강한 것같다. 손도 움켜쥐게 되어 있다. 유전자 속에 중독성이 강한 것 같은데, 물질 외에 권력이나 명예도 그런데 사람과의 관계도 사랑받고 싶어한다. 물질에 대해 끊는 것도 그렇고, 사람에 대해 끊는 것도 어렵다. 물질에 대한 갈등, 사람 사이의 갈등 가운데 어떤 게 컸는지 듣고 싶고, 소유의 문제에 대해 참는 게 아니고, 공동체 실험이 즐거움, 행복함까지도 느낄 수 있고, 검증되어야 그쪽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살고 있는 공동체 식구들은 어떤가.

 =물질은 사람을 조정하는 기능을 훌륭하게 해낸다. 승용차가 있느냐 없느냐가 생활을 만들어버린다. 저희 마을의 경우 평소 때는 새벽 6시에 기도하는데 주일에는 좀 더 편하게 가족들이 원하는 대로 10시로 늦추기도 한다. 그러면서 등산이나 낚시를 가거나 문화탐방을 가도 좋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무도 안 나간다. 차가 없기 때문이다.  아파트에 살 때와 농촌에 살 때와 나타난 삶이 다르다. 물질이 사람을 만든다. 교보 서점 앞에 보면 책이 사람을 만든다고 돼 있는 것과 같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기계가 나타나고 유용한 도구가 나타나면서 달라졌다. 도구가 없던 시대엔 다 사람이 했다. 만리장성이나 피라미드도 사람이 쌓았다. 고대사회에선 모두가 인간의 힘으로 건축물들을 지었다. 지금으로 보면 100층 건물을 발주 받아 짓는 거다.

 그러나 도구가 나타남으로써 인간의 능력은 끊임없이 퇴화됐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 한 시간에 8킬로가 넘게 걸었다. 중학교 1학년 걸음으로, 앞에서 둘째 줄 설만큼 작았는데도 등교 때 한 시간에 8킬로 걸었다. 아침에 등교할 때보면 시장에 고사리 메고 가는 어떤 할머니는 우리를 추월해 갔다. 한 시간에 9킬로를 간 것이다. 나는 지금은 3~4킬로밖에 못 걷는다. 문명에 길들어져서 그렇게 퇴화돼 바뀌었다. 물질이나 도구는 인간을 그렇게 만든다.

 무소유의 삶을 너무 관념적으로, 의미적으로만 생각할 게 아니라 실제로 생각하는 게 필요하다. 있는 것은 최대한 작게 활용해야 한다. 산위의마을은 선풍기 없이도 한여름을 난다. 그런데 어느 한집에서 선풍기 가져다 놓으면 난리 날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안 쓰니, 아무 말 안 하는 것이다. 마을에서 살면서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어느 것이 더 큰가. 사람한테 죽을 때까지 남는 것이 명예욕이다. 소유를 내려놓을 수 있고, 자기가 무엇을 결정하는 권력을 내려놓을 수 있고, 자기가 살아 있다는 존재감은 끝까지 가는 것 같다. 명예욕. 권력에 대한 욕구, 그런 것도 소유라고 보았을 때 마을에서 생활할 때는 물질적 소유욕보다 그런 게 훨씬 크게 작용한다. 들어올 때는 돈이나 재산은 내려놓고 들어와 뭐든 그러려니 한다. 그렇게 내려놓고는 사소한 역할이나 사소한 자존심이 소유보다 더 큰 작용을 한다. 그런 것이 공동체 안에서 모습이다.

 

어머니 부양은 누가? 아이고, 아픈 데를 찌르네

 

 -무소유는 옳고, 소유는 그른가.

 =선악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왜 무소유가 이 시대에 화두가 되었느냐. 짧은 역사만 보더라도, 이명박 대통령이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배경이 있지 않은가. 경제 문제다. 그런 물질적인 것만을 중시하면서 오는 정신적 좌절감이 너무나 커서 대안을 찾지 않느냐. 그래서 무소유라는 화두가 나오지 않는가. 공동체 역사를 보면 배고프던 시대에 빵 문제를 해결하려던 것이었는데, 1960년대 중반 이후 산업사회의 비인간화를 보면서 정신적 삶을 추구했다. 어느 정도 산업화를 이룬 뒤 사회가 배고픈 게 문제가 아니고, 인간이 사라져버린, 생태적인 문제들과 사회 모순과 아픔을 치유할 가치를 찾게 됐다. 이 시대가 경제, 개발, 발전, 성장, 이런 것에 의해 너무나 많은 것이 파괴되고 있고, 생명의 위협의 단계까지 와있기 때문이다. 무소유라는 것은 대안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다. 

 

-큰아들은 신부님이고, 동생인 박노해 시인은 돈벌이와 관계없는 나눔문화운동을 하고 여동생 한 분은 수녀님이다. 아무도 집안에서 돈벌이를 하는 분이 없는데 어머님을 어느 분이 부양하느냐.

 =아이고, 아픈 데를 찌른다. 저희가 5남매다. 어머니는 누님이 사는 집 옆에서 홀로 산다. 한 달에 40~50만원을 가지고 생활한다. 그런데도 용돈을 남겨서 저한테 돈 10만 원씩이라도 주시곤 한다. 

 -누군가는 신앙에 존재를 걸지만 누군가는 목욕탕 가는 것과 다름없이 신앙을 소비할 뿐이다. 예수살이공동체는 다른 게 있는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하향식 평준화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살아있는 생명체의 특징이 운동이다. 운동은 자신들이 목적으로 표방하는 것들도 구체적으로 실천적인 부분에서 바뀌어야 한다. 필요하면 운동을 주최한 핵심적인 체제도 필요하다면 해체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살아있는 것이다. 한국사회는 결속만 있지 해체가 없다. 예수살이공동체도 소비문화의 세계화 측면에서 보면 굉장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좁게 본다면 우리의 소비문화의 대표적인 것이 통신 비용이다. 2009년 작년 통계로, 2400만 원 이하의 연소득을 가진 가정이 4인 가정 기준으로 2300만 명이나 된다. 전 국민의 절반이다. 그러면 한 달에 200만 원 수입으로 사는데, 인터넷, 핸드폰을 중학생만 되도 다 사준다. 전 가족이 그런 비용으로 나가는 것이 얼마냐. 엥겔계수라는 것을 통신비용으로만 따져봐도 삶의 변화는 엄청나다. 안티소비문화운동은 단순히 덜 쓰는 차원이 아니고, 대량 생산, 대량 소비, 금융자본이 유지되는 세계화의 틀을 외면하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업그레이드하면서 에프티에이 반대를 외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예수살이가 소비자단체와 시민단체가 해야 할 안티소비문화를 하는 것은 상징적 성사다. 새로운 과제들을, 새로운 운동의 프레임을 개발해 갈 것이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이남곡 ‘좋은마을’ 대표, 9일 즉문즉설 세번째 강연

 

오는 9일 오후 7시 서울 정동 프란체스코교육회관 대성당에서 진행될 세번째 즉문즉설 강연자는 ‘좋은마을’ 이남곡(66) 대표다. 그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과 겸손으로 진리를 향한 실험을 멈추지 않고 있다.

전남 함평의 시골에서 해방둥이로 태어나 경기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 그는 사법시험에 앞서 치르는 자격시험을 1학년 때 통과하는 등 학업에 열중했던 수재였으나 2학년부터 어두운 시대상황에 눈을 뜨면서 인생행로가 바뀌기 시작했다. 1970년대 중학교 교사를 자원해 8년 동안 교사운동을 했던 그는 19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 사건으로 영어의 몸이 되었다. 6개월 된 갓난아이만 남겨놓은 채 그의 부인 서혜란씨도 감옥행을 했다.

그는 4년간 옥살이를 하고 나와 80년대엔 법륜스님의 정토회가 설립한 불교사회연구소 소장으로 ‘새로운 인간과 사회와 새 문명’을 준비했고, 90년대엔 무아집·무소유를 모토로 살아가는 경기도 화성 ‘야마기시 실현지’공동체에 입촌해 8년 동안 인간답게 살아가는 길을 모색했다. 이어 2004년부터는 불치병에 걸린 부인의 치유와 요양을 위해 전북 장수의 산골로 이주해 농사를 짓고 된장 고추장 등을 담그며 살아왔다.

그 산골엔 그와 삶을 함께하려는 이들이 모여 ‘좋은마을’을 일구었다. 80년대 여성민우회의 초석을 다지고 생협운동의 선구자이기도 했던 부인이 지난 7월 세상을 떠나자 그는 ‘둘만의 이별의 시간을 갖고 싶다’며 49일간 절에서 지내기도 했다. 지난해부터 서울에서 매주 ‘논어 읽기’모임을 이끌고 있다. 즉문즉설엔 누구나 무료로 참여해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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