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리는 그도 아프다
법인 스님/대흥사 일지암
나는 뒷심이 그리 단단하지 않다. 시작은 미미하나 끝은 창대하면 좋겠으나, 유감스럽게도 내 생각과 계획들은 창대했지만 만족할만한 결실을 맺은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래서 고심 끝에 한 가지 방편을 마련했다. 그것은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을 많은 이웃에게 미리 선포하고 함께 할 사람들과 협약을 맺는 것이다. 마감 약속을 번번히 지키지 못하는 러시아 문호 도스토옙스키가 '선불로 약간의 돈을 받고 만약 마감 일정까지 원고를 완성하지 못하면 돈을 한 푼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향후 9년간 자신의 작품에 대한 출판권을 넘긴다'고 출판사와 계약한 것과 같은, 극한의 압박은 아니지만 나도 나름대로 나를 단속하는 장치를 마련한다는 의미에서 그리한 것이다.
작년 말 땅끝 마을 대흥사 일지암 산중에 들어오면서 이웃들에게 일방적으로 선포했다. 한 달에 십일 이상은 이웃과 함께 암자를 나누어 쓰겠다고. 내가 이런 생각을 한 것은 부처가 중생을 위해 존재하듯이 산중의 절은 마땅히 세상을 품어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이치에 따르고자 함이다. 지금도 산을 찾는 이들이 묻는다. "이 외진 곳에서 심심하거나 외롭지 않으세요? 하루 종일 무얼 하고 사세요?" 무얼 하고 사느냐는 물음 앞에 선뜻 자신 있는 답을 내놓지 못한다. 나는 과연 남이 보지 않아도 자기 수행을 성실하게 하는가? 지혜와 자비를 말하면서도 일주문 너머 세간의 이웃을 생각하고 있는가? 이런 생각을 하다가 마음먹은 것이 내 암자를 이웃에게 열어 놓기로 한 것이다.
*동자승과 친구. 이종근 기자
아함경에서는 돈을 들이지 않고도 나눌 수 있는 일곱 가지를 말하고 있다. 그 무재칠시(無財七施) 중에 좌시(座施)가 있다. 좌시란 먼 길을 가는 피곤한 나그네에게 앉을 자리를 내어 주는 보시를 말한다. 그러니까 내가 암자에서 세간의 이웃을 맞이하는 것은 고단한 삶에 지친 이들과 함께 나누는 좌시라고 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이러한 내 결심과 실행도 모두 다 내 마음 편하고자 하는 일일 것이다.
이런 결심이 튼실한 결실을 맺기 위한 방편으로, 인근의 해군부대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 일공 법사와 협약을 맺은 것이다. 사병을 위한 템플스테이가 그것이다. 처음에는 군 생활에 적응이 어려운 관심사병을 위한 것이었는데 지금은 점차 일반사병에게로 확장 되었다.
20대 청춘들이 암자에 오니 덕분에 고요한 산중에 활기가 넘쳐난다. 암자는 큰 절과 다른 독특한 분위기와 멋이 있다. 암자는 절인 듯, 별장인 듯, 시골집인 듯한 그런 공간이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안온하고 평화롭게 한다. 또 타인의 시선과 자기가 만든 관념을 내려놓고 지난 날 자신을 돌아보고 정직하게 내면을 바라보기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다.
그들이 가져오는 것은 쌀과 반찬이다. 내가 그들에게 주는 것은 환한 얼굴과 친절한 손길이다. 우리는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이곳은 공양주가 없기 때문에 머무는 사람 모두가 공양주를 해야 한다. 밥을 지어 먹고 고구마를 구워 함께 나누는 일을 청춘들은 매우 즐거워한다. 함께 산에 올라 장대한 풍광에 젖고 꾸임 없는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에서 번뇌를 내려놓고 자신을 정직하게 살펴본다.
나는 아침저녁으로 그들에게 향기로운 차를 내놓는다. 그리고 그들의 말을 듣는다. 때로는 그들의 말에 혼돈과 막막함이 배어 있다. 나도 나의 말을 그들에게 건넨다. 위로의 말로 그들을 품는다. 위로를 넘어 정곡을 찌르는 말을 던진다. 그들이, 우리가. ‘잘못 생각해왔던 것’이 무엇인지 펼쳐놓는다. 착각을 교정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힐링은 없기 때문에 불편하더라도, 당장은 자존심 상하고 괴롭더라도, 생각의 오류를 바로 잡고 뒤틀린 자신의 습관을 곧게 세워야 한다. 이렇게 나는 나름대로 그들을 향해 진심과 정성을 다한다. 하지만 이들 청춘은 어떻게 반응하고 새로워졌는지는 모르겠다. 당장은 크게 깨어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언젠가 시절인연이 무르익으면 작지만 확실한 깨달음의 소득이 있을 것이다. 가끔씩 군부대에 법문은 해왔지만 이렇게 일상생활을 함께 한 것은 처음이어서 생소하기도 하지만 요새 젊은이들을 이해를 할 수 있어 참 좋기도 하다.
나는 처음에 온 7명의 사병들이 군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른바 '관심사병'인 줄 몰랐다. 착한 눈과 다소 수줍은 표정을 한 그들은 명랑한 여느 청년들과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이들이 자살과 자해를 시도한 청년이라니, 가슴이 아프고 저렸다. 동시에 노심초사하고 애태우고 있을 그들의 어머니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왜 사랑 앞에 아픔에 대한 공감이 먼저 놓여야 하는지를 알겠다.
관심사병과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느낀 것은 문제는 어느 한쪽에만 일방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군인들과 함께 하고 있는 일공 법사의 생각도 나와 같았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모두가 지극히 평범한 청년들이라는 것이다. 다만 여러 가지 문제가 이리 저리 얽혀서 갈등하고 충돌하다가 뜻하지 않은 불행한 결과들이 나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군 생활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우리 사회 공동의 문제이지 어느 한 사람의 책임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군폭력을 다룬 애니메이션 <창> 중에서
문제가 일어날 환경이 존재하지 않으면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이것을 말미암아 저것이 있다'는 연기법의 이치와 같다. 가해자가 없으면 피해자가 없는 법이다. 그 가해자 또한 누군가의 피해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피해자 가해자 양쪽의 문제에 다 같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선악의 이분법으로 나누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극단의 징벌이 능사가 될 수도 없다.
맞는 자도 괴롭지만 때리는 자도 마음이 불안하고 행복하지 않다. 가해자도 다른 의미에서 관심 사병이다. 분노와 멸시로 가득 찬 마음이, 친구를 괴롭혀 자신의 불만을 해소하고 쾌감을 얻으려 한다. 가해자를 만든 사회 환경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나의 무관심은 부메랑이 되어 나의 발등을 찍게 될 것이다. 그 가해자를 만든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라도 그 부메랑을 받을 수 있다.
신심이 깊은 어느 장군이 당장에 눈앞에서 지옥과 극락을 보여 달라고 고승에게 간청했다. 고승은 지옥과 극락을 보여준다고 하고서 주장자로 사정없이 장군을 후려친다. 긴 시간동안 매를 맞은 장군은 분노가 극에 달해 칼을 뽑아 들어 고승을 해치려 한다. 그 때 고승이 말한다. "지금이 지옥이다." 아차! 내가 이렇게 이성을 잃고 큰스님을 죽이려 했다니 하고 장군은 정신을 번쩍 차리고 크게 뉘우친다. “스님, 제가 그만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용서 하십시오." 그때 고승이 즉시 답한다. "지금이 극락이다."
지옥과 극락은 현실 너머 사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생각과 증오가 있는 곳이 곧 지옥이고, 바른 생각과 배려가 있는 곳이 곧 극락이다.
화엄경은 이렇게 말한다. ‘염염보리심(念念菩堤心) 처처안락국(處處安樂國)’, 늘 진실과 자비의 마음이면 내가 서 있는 그곳이 바로 극락이라는 것이다. 이 시대의 청춘들이 생동하는 기운을 맘껏 누리며 살 수 있도록, 우리 사회의 잘못된 경쟁체제와 구속과 착취의 고리를 걷어 내야 한다. 그 속에서 청년들이 바른 생각과 배려를 배울 수 있는 것이다. 타인을 사랑하는 순간 자신이 사랑의 수혜자가 된다는 믿음을 모두 가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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