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만남은 어떻게 오는가?법인/대흥사 일지암
Ⅰ얼마 전 미황사 괘불재에 참여한 20여명의 지인들이 이 작은 암자에 찾아왔다. 팔도 사방에서 사는 그들은 하는 일도 각양각색이다. 시인과 목사, 농부와 소릿꾼, 주부와 공무원, 바느질하는 공예인과 언론인 등 저마다 다른 업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그날 밤은 하나의 업을 도모하기 위해 내가 사는 산중 암자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평소 차를 즐기며 마음 살림을 알뜰히 가꾸고 있는, 가슴이 따뜻한 사람들이다. 굳이 이름은 붙이자면 차인들인 셈이다. 이른바 차의 성지 일지암에서 하룻 밤을 달이랑 별이랑 사람이랑 차랑 더불어 즐기고자 모여든 것이다. 모두들 고요한 얼굴빛에 겸허한 몸짓, 속 깊고 뜻 깊은 말 씀씀이로 서로의 마음을 편하고 즐겁게 해주는 이들이었다. 가난한 산중 암자에 찾아온 좋은 벗들에게 내가 해줄 것이라고는 그저 잠자리와 공양간을 내어주는 일 밖에 없다. 거기에 환한 얼굴과 따뜻한 눈길과 손길만 보태면 지상 최고의 안식처가 된다. 어느 곳이든 맑음과 기쁨이 극에 달하면 그 자리가 바로 극락이다. 십만억 국토 건너 서쪽에만 극락정토가 있는 것이 아니다.
*사진 박미향 기자
그날 차를 즐기는 벗들은 무려 새벽 3시까지 저마다 가져 온 차를 나누며 시와 노래와 이야기로 별빛 쏟아지는 가을밤을 보냈다. 우리가 그날 밤 마신 차는 아마도 열 세 종류를 넘지 않을까 싶었다. 또 녹차와 꽃차를 함께 곁들여 마시는 차맛은 신묘의 경지까지는 아니어도 미묘한 맛과 멋에 이르기까지는 했다. 마주보는 사람들의 얼굴이 다정스러워지고 풀벌레 울음소리 맑을 때 시와 노래로 화답하지 않으면 가을밤 산중에 깃들 자격이 없다. 이 때 어김없이 버들치 시인 박남준이 나직하고 애절한 목소리로 시를 읆조린다.
몸이 서툴다 사는 일이 늘 그렇다
나무를 하다보면 자주 손등이나 다리 어디 찢기고 긁혀
돌아오는 길이 절뚝 거린다 하루해가 저문다
비로소 어둠이 고요한 것들을 빛나게 한다
별빛이 차다 불을 지펴야겠군
이것들 한때 숲을 이루며 저마다 깊어졌던 것들
아궁이 속에서 어떤 것 더 활활 타오르며
거품을 무는 것이 있다
몇 번이나 도끼질이 빗나가던 옹이 박힌 나무다
그건 상처다 상처받은 나무
이승의 여기저기에 등뼈를 꺽인
그리하여 일그러진 것들도 한 번은 무섭게 타오를 수 있는가
언제쯤이나 사는 일이 서툴지 않을까
내 삶의 무거운 옹이들도 불길을 타고
먼지처럼 날았으면 좋겠어
타오르는 것들은 허공에 올라 재를 남긴다
흰 재, 저 흰 재 부추밭에 뿌려야지
흰 부추꽃이 피어나면 목숨이 환해질까
-'흰 부추꽃으로' 전문-
그리고 이어 노래에 특별한 내공이 있는 벗들이 수줍은 몸짓으로 시작해서 묻어둔 끼를 애절하게, 때로는 발랄하게 뿜어낸다. 노래가 이어지고 시가 이어지고 간간히 썰렁한 객담도 끼어들면서 그렇게 그날 차회는 새벽을 맞았다. "이 가을 저녁,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고바야시 잇싸의 하이쿠가 결코 가볍지 않은 그런 가을밤이었다.
다소 늦은 아침 공양을 마치고 국화향기 묻어나는 가을 햇살 듬뿍 받으며 세간의 벗들은 산을 내려갔다. 가슴에는 무심하고 가벼운 텅빈 충만을 느끼며 간간히 시린 하늘을 바라 보는 벗들의 눈에 흰 구름 둥실 나들이 하고 있었다.
Ⅱ
벗들이 떠나간 암자의 뜰은 고요하고 적막하다. 성급하게 피어난 동백꽃이 투명한 햇살에 선연하다. 벗들이 떠나갔지만 쓸쓸하거나 허망한 기분이 들지 않는다. 아쉬움과 그리움이 애틋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붙들어 매지 않고 얽어 매지 않는 관계의 나눔이기 때문일 것이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그 무엇에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내라'는 금강경의 일침이 바로 이런 경지일까? 사람과 사람 사이, 사이가 좋으려면 서로를 묶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설령 진리와 사랑이란 이름으로도.
이렇게 벗들을 보내고 홀가분하고 기분 좋은 감정에 내 홀로 자족하면서 일지암 초당에서 홀로 차를 마신다. 여럿이 마시는 차는 마음과 정을 나누는 기쁨이 있고, 홀로 마시는 차는 비움과 고요함에 머무는 기쁨이 있다. 백자의 순결한 빛 위에 따라놓은 연초록 빛 차는 그 자체로도 맑은 명상의 세계로 나를 인도한다. 이렇게 차를 마시는 산중의 한가로움은 값을 매길 수 없는 최상의 기쁨이다. 부질없는 생각을 내려놓고 침묵과 무심의 덕성을 갈무리는 하는 데에는 차 마시는 일 이외에 더 좋은 방법이 없을 것이다.
이런 순간, 좋은 차 한 잔이 내게로 오기까지의 숱한 정성과 만물의 숨결에 대한 감사를 빠뜨릴 수 없다. 한국의 다성으로 불리는 초의선사는 「다신전」에서 좋은 차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느 한 가지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공력이 함께 해야 한다고 했다. 우선 찻잎을 따는 시기도 때를 잘 맞추어야 한다. 곡우 전후에 딴 차가 제일인데, 이때 딴 차를 우전이라 한다. 또 불의 온기도 중요하고 찻잎도 알맞게 덖어야 한다. 차를 우리는 물은 차의 품성에 맞아야 한다. 이렇게 한 잔의 차에는 때와 불과 물이 찻잎과 더불어 자기의 본성을 지키면서도 기꺼이 자기를 고집하지 않고 서로에게 호응하여 신묘한 맛을 만들어 내는 우주의 질서와 이치가 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차가 만들어지더라도 이를 즐기는 사람의 깊은 생각과 격조와 멋이 따르지 않으면 차는 한낱 음료에 지나지 않는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 유배 당시 백련사의 혜장 선사에게 차를 보내달라는 내용의 글을 보낸 「걸명소」에는 차 마시는 기쁨과 운치의 절정이 담겨있다.
“마음이 고요하고 욕심이 없을 때, 아침 햇살이 처음 빛날 때, 흰 구름이 맑게 갠 하늘에 둥실둥실 떠 있을 때, 낮잠에서 처음 깨었을 때, 밝은 달이 푸른 시냇물에 맑게 비출 때, 작은 구슬 같은 눈발이 날릴 때에 산사에서 등불 켜고 자순차의 향기를 맡고자, 활활 타는 불로 새 샘물을 길어다 끓이니 들에서 먹는 상서로운 맛이로다.”
인간의 무욕과 자연의 무위가 함께 하는 차맛을 다산은 충분히 누리고 있었다. “고해의 좋은 양식은 시주의 보시가 가장 중하니 마땅히, 내가 목마르게 바라는 것을 생각해서 은혜 베풀기를 아끼지 마오.”라고 간절하게 차를 구하고 있다. 오죽 차를 좋아했으면 유학자가 스님에게 상소문의 형식을 빌려 차를 보내달라고 했겠는가.
다산이 차를 탐한 것 이상으로 차에 목을 매단 사람이 또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추사 김정희였다. 추사는 평생 지기였던 해남 대흥사 일지암의 초의선사에게 차를 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 역시 다산의 「걸명소」를 뛰어 넘어 거의 협박의 경지를 보이고 있다.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는 44통인데, 그 중에 11통이 차를 보내 달라는 내용이다. 추사는 24세에 중국의 연경에서 당대의 학자 옹방강과 완원을 만나 학문의 눈이 크게 열렸다. 그 때 완원에게 ‘용단승설차’를 대접 받았는데 추사는 흠뻑 취하여 차맛을 알게 되었다. 추사는 이후 ‘승설도인’이라는 호를 사용할 정도로 차를 애호하게 되었다.
“편지를 보냈건만 한 번의 답장도 받지 못했구려. 생각건대 산 속에 바쁜 일이 필시 없을 터인데 세상 인연과 어울리지 않으려 하여, 내가 이처럼 간절한데도 먼저 금강(金剛)으로 내려가 버리시는 겐가? 다만 생각해보니 늙어 머리가 다 흰 나이에 갑작스레 이와 같이 하니 참 우습구료. 기꺼이 사람을 양단간에 딱 끊기라도 하겠다는 겐가? 이것이 과연 선(禪)에 맞는 일이요? 나는 대사는 보고 싶지도 않고, 대사의 편지 또한 보고 싶지 않소. 다만 차에 얽힌 인연만은 차마 끊어 없애지 못하고, 능히 깨뜨릴 수가 없구려. 이번에 또 차를 재촉하니 보낼 때 편지도 필요 없고, 단지 두 해 동안 쌓인 빚을 함께 보내되 다시 지체하거나 어긋남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마조의 할(고함소리)과 덕산의 몽둥이를 받게 될 터이니, 이 한 번의 할과 한 방의 몽둥이는 수백 천겁이 지나도 피해 달아날 도리가 없을게요. 다 미루고 이만 줄이오.”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글의 행간에는 눈물겨운 애틋함이 배어 있다. 그대를 보고 싶지도 않고 그대의 편지도 기다리지 않는다는 그리움의 절창. 추사는 절해의 유배지 제주에서 깊은 밤 호롱불 아래서 초의가 보내 준 차를 마시면서 무슨 생각에 잠겼을까. 호기박람하던 젊은 날의 자신을 돌아보았을까. 학문의 깊은 이치를 더욱 궁구했을까. 아니면 백성과 조선의 앞날을 걱정했을까.
오늘도 찻자리에서 차를 마주하고 다산과 혜장, 추사와 초의의 만남을 그려본다. 그들은 사상과 신분을 넘고 넘어 선 너머의 자리에서 만났다. 그들의 만남은 조화와 중정의 차맛과 닮았다. 물이 물을 잃지 않으면서 불에게 자신을 맡기고, 불이 불을 잃지 않으면서 물의 몸을 덥혀 주고, 찻잎이 찻잎을 지키면서 불과 물에게 신묘한 맛을 만들어내는 이치와 같다. 정녕 그들은 그렇게 눈 내리는 깊은 밤, 남도의 산사에서 말없이 말을 나누고 한 수의 시와 한 폭의 수묵화로 마음을 건넸을 것이다.
차의 품성은 고요하고, 맑고, 향기롭다. 그리고 깊고 조화롭다. 오늘, 나는 차 한잔을 마주하며 차의 품성에서 우리시대의 모습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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