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자일기느끼며, 행복하게
“넉넉한 삶이다!”
이른 아침, 청매화 향기가 너울구름으로 흐르며 코끝을 찌르는 암자 마당에서 무심히 터져 나오는 한소식입니다.
소년시절 출가하여 수행하고 살아오면서 저는 결핍과 불만을 거의 느끼지 못했습니다. 조용히 생각해 보니 돈과 명예에 대한 욕구로 고민해 본 적도 로 없는 것 같습니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살았으나 타고난 품성이고 기질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이유는 초심의 수행자 시절, 삶의 방식을 깊이 생각하고 나름대로 정리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의 생각은 이러했습니다.
“이만하면 넉넉한 삶이다.”
정말이지 제 삶은 더는 부족할 것 없는 넉넉한 살림살이입니다. 더는 ‘구할 것’이 없습니다. 이는 반야심경에서 “보살은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으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불안이 사라졌다.”는 심오한 내적 세계를 체득하는 그런 경지가 아닙니다. 현실적인 문제에서 아주 자유롭다는 뜻이지요.
우리 출가수행자들은 의식주에 대한 걱정이 없습니다. 산자수려한 곳에 있는 절과 작은 암자가 평생 저희의 거처이고 수행처이니 주거환경은 지구별에서 최고라 할 수 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도 자유롭습니다. 그러니 늘 생존경쟁에 시달리고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돈과 재물에 과도한 욕심을 부리는 것은 그야말로 ‘분수’ 밖의 일이며 예의와 염치가 없는 짓이지요.
평생 맘껏 공부할 수 있는 자유, 명상수행을 하면서 마음의 고요한 평화와 은은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수행자의 삶이야말로 넉넉함 그 자체입니다. 나아가 세상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고 그들에게 위안을 주고 지혜와 기쁨을 나눌 수 있는 보람도, 넉넉함 위에 넉넉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의 삶이 넉넉하다 못해 넘치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무한량의 감각을 누리면서 살 수 있다는 것이지요. 오염되지 않은 원초적 감각을 살리고 오감을 확장하기로 산사는 비할 데가 없는 곳입니다. 산중에서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만져지는 모든 것이 순수, 천연, 원초입니다.
우리 절집에는 예부터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금강산에서 살면 애써 수도하지 않아도 탐욕은 저절로 내려놓게 된다고요. 아름다운 자연 앞에서는 욕심내고 미워하는 일이 참으로 부질없고 어리석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산중 자연에서 살아가는 내가 그 무엇을 애써 탐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 무엇을 탐하는 순간 나의 맑고 조촐한 마음의 행복은 사라지게 됩니다. 나는 허망한 욕구가 주는 결핍과 불안, 갈등으로 내 삶을 어지럽게 오염시키기가 싫습니다.
땅끝 마을 두륜산 대흥사 일지암 암자에서 나는 새벽에 일어나 잠자리에 드는 한밤중까지 가공되지 않은 자연과 함께 합니다. 아침 예불은 마당을 돌며 목탁을 치며 삼라만상을 깨우는 일로 시작합니다. 청아하게 울리는 목탁소리를 들으며 간간히 눈을 들어 새벽하늘을 봅니다. 순수 천연의 어둠 속에서 또렷또렷 빛나는 별들은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합니다. 예불을 마치고 산책하는 길에서 코와 피부에 스며드는 청신한 기운은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호흡하는 일이 참으로 즐겁습니다.
신창임영개(晨窓林影開) 새벽 산창에 숲 그림자 드리우고
야침산천향(夜枕山川響)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드니 계곡 물소리 듣는구나
은거부하구(隱居不何求) 이렇게 고요히 깃들어 사니 다시 무엇을 구하겠는가
무언도심장(無言道心長) 그저 말없는 가운데 도는 더욱 깊어지누나
주자의 시입니다. 그저 자연 속에서 단순하고 무심하게 보고 듣는 담담한 일상입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삶일 수 있겠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온갖 이해와 경쟁으로 인한 시비와 갈등으로 지치고 편안한 날이 드문 요즘 사람들에게 자연에서의 삶은 환상일 것입니다. 팔자 좋은 인생이라고 비웃고 질타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의도와 선택에 관계없이 시대와 사회에 던져진 존재인 것을. 던져진 환경을 과감하게 던지고 나만의 다른 길을 찾는 사람이 있고, 체념하고 어쩔 수 없이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장과 경쟁 속에서 무한질주하며 최고가 되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쏟는 사람도 있고, 그 속에서 나름대로 개선의 활로를 찾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길에서 예외 없이 확인하고 일치해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청신한 감각을 온전히 회복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길을 선택하여 살아가는 까닭은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무의미하고 불행하기 위해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어떠한 것일까요? 우리가 대하는 것들을 온전히 '느끼며' 사는 것이 아닐는지요? 아무리 크고 비싼 집과 재물을 갖고 있고, 권력과 명예를 갖고 살아간다 해도 가치 있고 의미 있는 느낌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행복하다는 것은 느낄 수 있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한 송이 꽃과 바람소리, 물소리에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웃의 슬픔과 고통에 절로 내 가슴에 아픔이 느껴지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소박한 음식 앞에서 맛을 느끼는 사람이 먹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서로 만나 웃고 이야기 하며 사랑과 우정의 느낌을 함께 하는 사람, 그러한 사람이 바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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