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해서 아름답다, 라는 얘기를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들었다. 사계절이 뚜렷해서 경치가 아름답고, 다양한 자연환경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장점일 수 있다. 하지만 생활인의 처지에서 사계절이 뚜렷한 것은 여러 면에서 좀 고생스러운 일이다.
먼저 기본적인 생활비가 많이 든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각 계절마다 옷, 신발, 가방, 침구류, 화장품 등이 각각 필요하다. 겨울옷과 신발 등은 방한용이어야 하기 때문에 고가인 경우도 많다. 봄과 가을은 같이 사용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 예를 들어 가죽과 세무로 된 의류잡화는 간절기에 입는 용도로만 보자면 봄과 가을철에 모두 입을 수 있겠지만 분위기상 봄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봄에 포인트로 입는 초록색이나 오렌지색 트렌치코트도 가을에 입으면 생뚱맞다.
*많은 짐들로 복잡한 방의 모습. 영화 <쩨쩨한 로맨스> 중에서
계절이 다양하지 않고 단순한 나라의 사람들은 거의 한 가지 패턴의 옷과 물건들만 있으면 일년을 지낼 수 있는 반면에 우리나라는 계절에 따라 종류를 모두 갖춰야 하기 때문에 필요 물품을 갖는데도 비용이 많이 들고, 그만큼 그것들을 유지관리하기 위해서도 비용이 많이 든다. 계절마다 필요 물품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에 수납에 적지 않은 노력이 필요하다.
냉난방도 만만치 않은 문제다. 겨울엔 혹한 때문에 난방비가 많이 들고 여름엔 더위와 장마로 냉방비가 많이 든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사람일수록 주거환경도 열악한 곳에서 살기 마련인데, 그럴 곳은록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다. 돈 많아서 큰 집 사는 사람이 집 유지비 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겠지만, 넉넉치 못한 사람에게는 계절에 따른 기본적인 냉난방비도 무거운 짐이 된다. 안 쓸 수도 없는 비용이니, 그 부담은 더욱 크다.
지금처럼 아웅산 수치 여사가 가택연금에서도 해제되고 자유롭게 정치활동을 하기 전인 수년 전, 미얀마를 간 적이 있다. 군부독재 국가라는 이미지에 지레 겁먹고 있었고, 그런 체제 속의 국민들은 매우 불행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미얀마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은, 심지어 매우 반체제적인 사람들조차도, 얼굴이 편안해 보였다. 우리보다 경제 수준은 한참 낮기 때문에 사람들의 얼굴에 궁기는 있을지언정, 우리처럼 스트레스에 찌든 얼굴은 찾아볼 수 없었다.
누군가 말하길, 기후 덕분에 사람들이 낙천적이어서 그렇다고 했다. 따뜻한 날씨 덕분에 벼는 그냥 두어도 쑥쑥 잘 자라고, 이모작, 삼모작을 하기 때문에 기본적인 식량이 풍부하다고 한다. 따뜻한 기후 때문에 집도 그다지 견고하게 지을 필요도 없고, 옷도 얇게 걸치고 살면 충분하다. 도시는 틀이 갖춰진 주택과 건물이 대부분이었지만, 농사짓는 시골 지역에 가면 나무 같은 것들로 얼기설기 대충 지어놓은 집에서, 집안이나 집밖 구분이 그다지 의미 없는 집에서 사람들이 지내고 있었다. 집밖에서 자도 얼어 죽을 일이 없고, 들판에는 벼가 항상 넘실대고 있으니, 기본적인 생활의 긴장도가 낮은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사계절의 변화가 크고, 그만큼 필요한 것도 많아 기본적인 생활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돈도 많이 벌어야 하고, 그에 따라 사람들이 각박하고 억센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갖고 있는 물건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꼭 필요한 물건만 잘 관리해 오래 쓰면서 가능한 덜 사고 덜 소비하며, 이렇게 최소한 소유하면서 물건들을 관리청소하는 데 에너지를 쓰는 것도 최소한으로 하자, 가 요즘 나의 생각인데, 물건을 계속 정리하며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재활용 기관에 보내도 여전히 정리할게 남아있는 걸 보고는 스스로 이런 상황에 기겁한 나머지, 이건 우리나라의 사계절이 뚜렷하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쪽으로 생각이 이르고 만 것이다. 물건을 줄이고 줄여도, 더 이상 줄일 수 없는 마지노선이 있는데, 그것은 사계절 때문인 것이다! 아쉽게도 기후 조건상, 우리나라는 '무소유 정신'을 실천하기가 기본적으로 힘든 나라라고 결론내린다면, 좀 비약일까?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나라는 무소유 정신을 실천해야만 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제 5의 계절’으로도 불리는 장마가 있기 때문이다.
아파트나 오피스텔의 중고층에서 살 때만 해도 사실 장마와 그로 인한 습기의 ‘위력’을 실감하지 못했다. 1층에 사는 요즘은, 곰팡이와의 사투를 벌이고 있다. 살림에는 나름 부지런하고 꼼꼼한 편이라 자부하고 있지만 요즘은 매일 ‘멘붕’ 사태다. 습도가 높다보니 곰팡이가 모든 것을 갉아먹고 있다.
*장마철. 한겨레 자료사진
땀 흘린 면티셔츠를 벗어놓고 다음날 세탁했는데 그 사이 티셔츠에 곰팡이가 피어 버렸다. 얼음 팩의 물을 흡수하기 위해 면포로 싸놓았는데 한나절 사이 그 면포에도 거뭇거뭇 곰팡이가 피었다. 택배 보낼 때 쓰려고 모아놓은 종이 포장박스와 신문지 등은 물기를 쫙쫙 빨아들인 덕에 진드기가 기어 다니고 있었다. 떡을 찌고 바짝 말려놓은 대나무 찜통의 뚜껑에도 어느새 곰팡이가 앉아 있었다. 화장실 타일 줄눈이나 배수구 틈새에 물이 조금이라도 고여 있으면, 어김이 검은 곰팡이가 낀다.
지난겨울 바짝 말려 놓은 유기농 귤피가 있었다. 얼마 전 들춰 봤을 때만 해도 “습한데 멀쩡하네!”하며 좋아 했는데, 이틀 사이 하얀 곰팡이 범벅에 구더기 소굴이 되어 있었고, 집안은 그 속에서 나고 자란 나방 같은 벌레들이 날아다녔다. 밀봉된 1킬로그램짜리 잡곡 포장 안에서도 나방이 태어나 기겁을 해야 했고, 냉장고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식품의 숫자도 급증했다. 야채와 같이 신선도를 위해 기본적으로 냉장 보관해야 하는 것들도 있는데,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곡식류와 저장음식들 때문에 신선식품이 들어갈 자리조차 마땅치 않게 되어 버렸다.
생긴 곰팡이를 쫓아다니며 세탁하고, 청소하고, 쓸고 닦고, 버리는데도 많은 노동과 시간이 들었고, 곰팡이 필까 두려워 청소하고, 정리하는데도 적지 않은 노동과 시간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덥고 습해서 움직이기만 해도 땀이 주르륵 흐르는데, 난 에어컨도 없는데, 노동 강도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이래서 사람들이 냉장고는 더 큰 것으로, 김치냉장고도 큰 것으로 사고, 제습기도 사고 에어컨도 사는가 보다, 하고 실감했다. 에어컨도 없고, 제습기도 없고, 김치냉장고도 없는 내가 여름, 장마를 나기란 힘든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상황이 이래도 전자제품을 사고 싶지는 않은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갖고 있는 물건 자체를 줄이는 것이었다. 빨래나 면포처럼 매일 쓰는 것에서 발생하는 곰팡이 문제를 처리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면, 쓰지 않고 처박아 두다가 생긴 곰팡이까지 처리하는 일은 만들지 말자는 것이다.
먼저 집 양쪽 베란다를 정리했다. 쓰지 않고 쌓아놓은 종이박스류를 먼저 정리해 내놓았다. 습기를 워낙 잘 먹어 진드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피 큰 플라스틱 물품들도 재활용품 분리수거 날 내놓기 위해 정리해 놓았다. 그 다음엔 주방용품들을 정리할 것이다. 가능한 최소한으로 자주 쓰는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필요한 사람들이나 재활용품 처리 기관에 보낼 것이다. 생활소품들도 최소한으로 남기고, 의류잡화도 또 한번 정리해서 다시 한번 최소한을 향해 가보려고 한다.
*살림하는 사람. 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 중에서
얼마 전 읽은 책의 저자는, 주방에 사발, 접시 등 그릇을 서너 개씩만 두고 쓴다고 한다. 그래야 쓰지도 않은 그릇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일도 없고, 그릇이 적으니까 사용 후 바로바로 설거지해서 관리하기도 쉽다고 한다. 이걸 읽고 나도 우선 수저에 적용해 보았다. 십수 벌이나 되는 걸 통에 꽂아 놓고 썼는데, 좋아하고 자주 쓰는 것들 위주로 서너 짝 씩만 남기고 나머지는 치웠더니 숟가락, 젓가락 찾기도 쉽고 쓰는데도 전혀 불편함이 없어 좋다.
백만장자에는 백만 가지의 걱정이 있다는 것처럼, 갖고 있는 물건이 많을수록 신경 쓸 일도 많아진다. 사계절 때문에 짐을 줄이기 힘든 나라, 하지만 장마 때문에 짐을 줄여야만 하는 나라에서 머리 굴리며 살다보면 무소유에 대한 ‘신의 한수’가 어느 순간 나올 지도 모르겠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