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라미스 해전에서 대패한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대왕. 사진 영화 <300>에서
신화에 매몰되지 않는 자만이 새로운 신화를 만든다. 기원전 480년 그리스 아테네 인근 살라미스 섬 해안에서 새로운 신화가 만들어졌다. 이후 2,500년 지구의 역사를 가르게 되는 오리엔트(동양)와 서양의 결전에서였다.
오리엔트로 불린 페르시아는 인류문명의 발상지 메소포타미아에서 일어나 또 다른 문명의 별 이집트까지 장악했다. 최초의 세계제국 페르시아는 최전성기었다.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264만여명의 병사와 같은수의 비정규군이 함께 했다고 썼다. 세계인구가 1억인 시절 이었으니 신화와 경계가 모호했던 헤로두투스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순 없다. 그리스는 요즘 같으면 읍면동에 불과한 당시 그리스연합군에 가담한 31개 도시국가들의 인구를 다 합쳐봐야 80만~200만 명에 불과했다. 그리스연합군이 그리스가 감당하기에 페르시아는 너무도 벅찬 상대였다.
길이 보이지 않을 때는 신을 찾게 마련이다. 아테네 사절단은 백발백중의 예언을 해준다는 델포이 신전을 찾아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무녀의 입을 통해 나온 신탁(신의 대변)은 절망적이었다. `어떤 것도 살아나지 못할 테니 대지의 끝으로 도망치라`는 것이었다. “신전도 파괴될 것이어서 두려움에 떨고, 지붕에서 검은 피를 쏟고 있다”면서.
한 번 신의 뜻을 하달 받으면 이에 따라야 하는 불문율을 어기고 아테네인들은 떼를 썼다. 제발 조금이라도 더 나은 예언을 내려달라고. 사람은 냉혹한 현실을 일깨워주는 직설을 원하지 않는다. 절망에 빠진 인간이 원하는 것은 한 가닥 희망이다.
무녀도 이를 외면하지 못하고 이번엔“아크로폴리스 언덕의 모든 것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겠지만 ‘나무 성벽’만은 파괴되지 않고 도와주리라”는 신탁을 던져준다.
그리스 아테네 앞 살라미스 해협 위성 사진
그리스 앞바다에 몰려온 페르시아 해군 전함들. 사진 영화 <300>에서
페르시아의 군대와 맞서는 그리스 스파르타전사들. 사진 영화 <300>에서
페르시아군이 몰려온다는 소식에 아테네는 우왕좌왕 도시를 빠져나가는 탈출 행렬로 아수라장이 됐다. 아테네의 시민과 노예 할 것 없이 20여 만 명이 떠난 도시는 텅 비었다. 아크로폴리스의 신전에 큰 뱀이 지키고 있다며 매달 바치는 꿀 케이크마저 그대로 있는 것으로 보아 아테네에선 신마저 도망쳐 버린 게 틀림없다는 소문이 돌았다. 아노미였다.
이런 가운데서도 아크로폴리스 신전의 사제들은 델포이 무녀의 말을 들며, 아크로폴리스에 나무 목책을 쳐놓으면 안전할 것이라고 자위했다. 그러나 믿음은 그들을 구원해주지 못했다. 나무 목책을 가볍게 넘어온 페르시아 군인들은 “살려 달라”는 사제들을 죽이고 신전을 불태웠다.
하지만 길이 없는 곳에서도 길을 만드는 인물이 있었다. '과거는 바꿀 수 없다. 그러나 미래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것을 안 인간이 있었다.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였다. 그는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아니었다면 역사에 명함을 내밀 수 없었던 하층민이자 첩의 아들이었다. 정치가이자 군인인 그는 광산개발로 국고가 쌓이자 전 시민이 나눠가지자는 주장을 일축하고 함선을 건조케 한 인물이었다.
이미 200척의 함선을 확보했던 테미스토클레스는 바다에 떠 있는 목선함대가 바로 신이 말한 ‘나무 목책’이라고 주장했다.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영화 <300>의 주인공인 스파르타왕 레오니다스가 페르시아 육군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사이,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의 해군을 좁은 바다로 유인해서 재기 불능이 되도록 괴멸시켰다. 조선 역사를 연구한 미국의 사학자 호머 베잘릴 헐버트가 “조선을 삼키고 명나라까지 정벌하려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계획에 사형 선고를 내린 한산도 해전은 조선의 살라미스 해전”이라고 인용한 바로 그 해전이다. 신조차 백기를 들고 공포와 불안감만이 가득한 상황에서 길을 연 인간 테미스토클레스는 그리스의 이순신이었다.
살라미스해전의 영웅 테미스토클레스
대병을 몰고 그리스를 침공한 당대 지구의 최강자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대왕. 사진 영화 <300>에서
그로부터 700여 년 전 트로이 전쟁에서 철옹성 트로이를 멸망시킨 오디세우스 못지않은 지혜를 지닌 테미스토클레스는 신마저 자신들을 버렸다고 도망갈 궁리만 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우리가 이치에 맞는 작전을 세울 때 신은 반드시 우리 편이 된다.”
훗날 철학자 헤겔은 말했다.
“역사상 살라미스해전만큼 정신의 힘이 물질의 양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드러낸 적은 없었다.”
오리엔트의 젖을 먹고 자란 젖먹이 그리스는 자신들을 키웠던 거대 공룡 오리엔트를 정신력으로 넘어트렸다. 살라미스 해전 150년 뒤 그리스의 지배자 알렉산드로스는 최초의 세계 제국 페르시아를 단숨에 삼키고 북인도까지 장악했다. 서양과 오리엔트의 전세는 신이 아닌 인간에 의해 역전됐다. 아테네인들은 살라미스 해전 직후 그리스 문명의 황금기를 열었다.
<그리스 인생학교>(조현 지음, 휴펴냄)의 머리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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