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이해 | | | | | | | | |
인류의 대다수는 자기가 태어난 사회를 떠나보지 못하고 살았으며 그 사회의 주류 종교가 가르치는 진리를 절대적인 것으로 믿고 살았다. 그러나 현대의 개방사회로 들어오면서 종교가 다원화되고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가 됨에 따라 한 종교가 주장하는 절대적 진리에 대한 믿음은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렵게 되었다.
현대인의 정신적 방황과 불안은, 근본적으로 여기에 기인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 이전의 전통 사회에서 종교는, 그 사회와 문화의 정신적 토대였고 도덕의 보루였다. 종교는 변하는 세계 속에서 불변하는 실재에 사람들의 삶을 정초시켜 주었으며 그들의 삶을 인도하는 세계관과 인생관, 그리고 가치관을 심어주었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사는 것이 진정으로 가치 있고 좋은 삶이었는지를 종교는 가르쳐 주었으며, 선악시비의 기준과 규범을 제시해주었다.
전통사회에서는 정치, 경제, 도덕, 교육, 철학, 예술, 가족 제도 등 삶의 거의 모든 영역이 종교적 기반 위에 서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불과 100여 년 전 우리나라 조선조 사회에서 유교가 지녔던 위상과 역할을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현대 사회로 오면서 사회 구조가 바뀌고 문화의 영역들이 종교의 관장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발전하는 이른바 세속화(secularization) 과정이 진행됨에 따라 종교는 전통 사회에서 지녔던 사회문화적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세속화는 지역과 문화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과정이다.
다종교 사회 속의 종교…절대적 믿음 흔들리기 시작
서구 사회에서 삶을 떠받치던 종교적 기반이 무너지고 절대적 진리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게 된 데는 두 가지 큰 사상적 변화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나는 근대 자연과학의 발달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적 사고방식의 출현이다. 간단히 말해 자연과학과 역사학의 발달이다.
갈릴레오와 뉴턴의 물리학으로 대표되는 근대 과학은 서양 세계에서 그리스도교의 초자연주의(supernaturalism) 세계관을 무너트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그 여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세계에 발생하는 모든 사건이 자연의 엄격한 인과적 법칙의 지배 아래 일어난다고 보는 과학적 사고는, 초자연적 신의 개입으로 간주되는 기적에 대한 믿음을 붕괴시켰고 자연이든 인간 역사든 초자연적 신의 개입이 끼어들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 세계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작동하는 시계와도 같다는 기계론적 세계관이 퍼지면서 신이 세계를 일정한 목적과 의미의 실현을 향해 섭리하고 인도한다는 목적론적 세계관이 설 자리를 상실하게 된 것이다. 과학적 사고는 비단 그리스도교뿐 아니라 실증적 진리를 넘어서는 진리를 주장하는 모든 종교에 도전이 된다. 이제 현대인들은 어떤 종교의 가르침이든 과학적 상식이나 합리성에 반하는 것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가령 불교나 힌두교의 업보와 환생에 대한 믿음도 과학적 상식을 넘어서기 때문에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과학적 사고 못지않게 종교의 절대적 진리에 대한 믿음에 타격을 준 것은, 현대의 역사적 사고방식이다. 이에 따르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 종교를 포함하여 인간이 만든 모든 문물과 제도와 사상은 예외 없이 특정한 시대 특정한 지역의 사회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적 산물이다. 근대 역사학의 발전은 이를 의심의 여지없이 밝혀주고 있다. 따라서 그 어떤 사상이나 교리도 초역사적이고 초시간적인 권위를 지닐 수 없으며 영원 불변의 절대적 진리로 간주되기 어렵게 되었다. 종교의 교리나 제도나 삶의 규범들이 더 이상 초월적 권위, 신적 권위를 지닐 수 없게 된 것이다. 인간이 만든 것은 언제든 인간이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보편화되었고, 모든 사상과 제도가 특정 시대의 역사적/문화적 산물이기에 시대적 제약성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다. 역사적 연구는 성서를 비롯해서 종교의 경전들도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어떤 경로를 통해 권위를 인정받게 되었는지 소상하게 밝혀주고 있다. 현대인의 의식 속에는 이제 신성불가침의 권위를 지닌 제도나 사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절대적 진리로 간주되던 종교의 가르침들이 시대의 산물이며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역사적 상대주의, 종교적 진리도 문화적 조건과 제약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문화 상대주의가 현대인들의 상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지구촌 시대에 종교들은 모두 현실적으로 소수집단화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이슬람이 사실상 국교(state religion)와 같은 지위를 누리는 아랍 사회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슬람이 비록 독점적 지위를 누린다 해도, 아랍 무슬림들의 실제 삶과 사고 속에는 이미 세속화된 서구 문물과 사고방식이 들어와 있으며, 근대 서구식 교육을 받은 시민들의 의식은 비록 소수라 해도 이미 세계화되고 다원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소수화 못지않게 문화적 소수화, 의식의 소수화가 실질상 종교에 더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현대 종교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 상대주의 내지 문화적 상대주의가 상식화된 세계, 종교가 정치권력으로부터 분리되고 사회의 공적 영역에서 물러나 단지 개인이나 소수 집단의 신념으로 자리하게 된 현대 세계에서 종교들이 제시하는 절대적 진리 주장은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다. 종교들이 제시하는 상충되는 다양한 진리를 평가할 수 있는 어떤 하나의 척도가 있다면 모르지만 -사실상 존재하기 어려운- 종교적 진리의 다양성 자체가 절대적 진리 주장을 의심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대 세계에서 종교들은 과연 진리 주장을 포기해야만 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어떤 식으로 진리 주장을 해야 할 것인가?
한 사회에 종교가 다수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의 삶을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변화시켜 온 종교가 세계에 다수 존재한다는 사실은 신앙인들에게 당혹스러운 일이다. 이러한 사실 자체가 자기 종교의 절대적 진리 주장에 도전이 되기 때문이다. 종교 간의 차이가 단순히 음식이나 옷의 취향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포기할 수 없는 진리 주장에 근거하고 있는 한, 종교들의 상이한 진리 주장은, 진지한 신앙인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해결을 요하는 문제이다. 종교의 교리와 사상이 단지 개인의 취향이나 주관적 감정 또는 체험에 근거한 것이라면 모르지만, 보편타당한 진리 주장을 하고 있는 한 비교와 선택을 요구한다.
상충되는 상이한 종교의 진리 주장이 제기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논리적으로 세 가지 선택 밖에 없다. 세속주의자들처럼 모든 종교적 진리 주장이 근거 없는 것이라고 부정하든지, 자기 종교의 진리만 참이라고 주장하든지, 아니면 세계의 주요 종교들이 각기 진리를 말하지만 모두 부분적이고 불완전하다고 여기는 길이다. 종교다원주의는 이 세 번째 길을 택하는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사상이다. 종교다원주의는 또 종교들이 상이한 교리에도 불구하고 심층적으로 혹은 궁극적 차원에서 만나거나 일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종교다원주의는 비교적 최근에 일부 서구 종교학자, 신학자, 철학자들 사이에서 제기되기 시작한 사상으로서, 종교적 초월을 부정하는 세속주의도 아니고 자기 종교만의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는 배타주의도 아닌 제3의 길이다.
종교다원주의 결국 하나로 일치할 수 있는 ‘제3의 길’
아이러니컬하게도 종교다원주의는 배타성이 강한 그리스도교 신학 내에서 제시되기 시작하면서 많은 주목을 받게 되었다. 사실 어떤 종교에도 속하지 않는 철학자나 사상가가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한다면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할 것이다. 종교다원주의는 특정 종교의 진리를 진지하게 수용하는 신학자나 신앙인이 주장하지 않는 한 별 의미가 없는 이론이다. 특정한 신앙이나 신학과 무관한 세속적 지성인에게 종교상대주의란 문화상대주의처럼 일종의 상식일 뿐이며 지적 호기심의 대상은 될지언정 심각한 실존적 관심의 대상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종교다원주의자는 자신이 속한 종교의 진리는 물론이고 타 종교의 진리도 동시에 인정한다. 일견 모순적이고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지만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이것이 가능할 뿐 아니라 현대 세계와 종교에 필수적이라고 믿는다.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최소한의 정의는 세계에 종교가 다수 존재한다는 사실 인식을 넘어서 종교 다원성을 어떤 식으로든 긍정적으로 보는 가치 지향적 자세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사회와 같이 종교의 자유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는 사회에서 단순히 타종교의 존재 권리를 인정하고 타 종교인을 존중하는 태도나 시민사회의 덕목인 차이와 다양성에 대한 관용 정도를 종교다원주의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종교다원주의는 자신이 속한 종교 이외의 종교에 대해서 적어도 그 존재 가치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거나, 더 나아가서 그 진리 주장까지 어떤 형태로든 수용하는 적극적인 자세를 가리킨다. 여기에 문제의 어려움이 있다. 특히 그리스도교의 경우, 종교다원주의는 다른 종교들을 통해서도 인간의 궁극적 구원이 가능하다는 입장까지 나아가면서 신자들이나 신학자들로부터 많은 반발과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종교다원주의는 이론을 전개하는 방식에 따라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신학적 종교다원주의, 즉 신학자들이 자신이 신봉하는 특정 종교의 신앙적 관점에 따라 신학적 논리로 전개하는 종교다원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신학적 논리보다는 중립적인 철학적/인식론적 입장에서 전개하는 종교다원주의이다. 이 둘이 반드시 명확하게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존 힉(John Hick) 같은 대표적인 종교다원주의자는 신학적 다원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철학적 다원주의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굳이 양자를 구별해야 하는 이유는 이론의 전개 방식에서 한 특정 종교의 진리 주장을 전제로 하면서 타 종교의 진리를 수용하는 신학적 종교다원주의가 그런 전제 없이 논하는 철학적 종교다원주의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신학적 종교다원주의가 더 어려운 작업이며 그만큼 더 신앙인들에게 도전적이고 의미 있는 일임을 알 수 있다. 나는 여기서 힉의 신학적 종교다원주의론보다는 철학적 종교다원주의론을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힉의 주장은 간단히 말해서 유구한 전통을 지닌 세계의 굴지 종교들은 인간의 유한성/역사성에서 오는 불가피한 진리 인식의 제약성에도 불구하고 각기 자기 방식으로 신(God) 혹은 실재(Reality)를 인식하고 구원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힉은 처음에는 궁극적 실재를 가리키는 말로서 ‘하느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하느님 중심적’ 종교다원주의론을 전개했으나, 나중에는 하느님이라는 말이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처럼 유일신 신앙의 종교에 편향된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하느님 대신 ‘실재’(Reality. 대문자 ‘R’에 주목할 것)라는 철학적 개념을 사용하면서 ‘실재 중심’(Reality-centered)의 종교다원주의론을 전개하게 되었다.
힉의 종교다원주의론은 세계의 주요 종교들이 도덕적, 영적 수준에서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대등하다는 부인하기 어려운 경험적 사실에서 출발한다. 모든 종교는 인간을 자기중심적 존재에서 궁극적 실재 중심의 존재로 변화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힉은 이러한 사실을 설명하기 위한 가설로서 종교다원주론을 전개한다. 그는 인간의 인식 활동은 결코 물 자체(Ding an sich)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칸트의 인식론을 기본적으로 수용하면서 칸트와 달리 인간은 종교적 경험을 통해서 실재에 접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다만 종교적 경험도 실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접하지는 못하고 각 종교가 처해 있는 문화가 제공하는 인식의 틀 내지 범주를 통해 굴절된 형태로 경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종교적 경험이 종교와 문화에 따라 다르고 그 표현이 더욱 다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힉에 의하면 경험이란 언제나 ‘......으로서의 경험’(experience-as), 즉 해석된 경험이다. 신 혹은 실재 그 자체를 접하는 순수한 종교적 경험은 인간이 지상에 사는 한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특정한 문화의 틀을 통해 사물이나 실재를 경험하고 해석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힉은 이러한 입장에 따라서 인류의 종교적 경험의 두 가지 큰 유형에 주목한다. 하나는 궁극적 실재를 유일신 신앙의 종교에서처럼 인격적(personal) 실재로 경험하는 유형이고, 다른 하나는 불교, 유교, 도가 사상, 그리고 일부 힌두교 사상에서처럼 탈 인격적(impersonal) 실재로 경험하는 유형이다. 힉은 이 두 유형의 차이는 결국 실재를 접하고 경험하는 사람들이 속한 문화적 전통과 환경의 차이에 기인하는 것으로 본다. 실재 그 자체는 이 두 범주를 초월하기 때문에 무어라 규정할 수 없다. 어떤 종교도 실재 그 자체를 알 수 없으며 다만 주어진 문화 전통과 환경의 영향 아래 불완전한 방식으로 접할 뿐이다. 종교들은 모두 진리의 빛을 발하고 있지만 역사적/문화적 조건의 제약 하에 굴절된 형태로 반사할 따름이다. 따라서 각 종교는 진리 인식의 한계를 인정해야 하며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겸손하게 타 종교와의 대화와 이해를 통해 시야를 넓히고 심화해 갈 필요가 있다. 이것이 종교다원 세계를 사는 현대 신앙인들의 다원주의적 자세라는 것이다.
존 힉의 종교다원주의 ‘…으로서의 경험’에서 출발
이상과 같은 종교다원주의의 입장을 잘 드러내주는 비유로서 흔히 등산의 비유나 장님 코끼리 만지기의 비유가 있다. 종교들은 등산로만 다를 뿐 같은 산을 오르고 있으며 결국 정상에서 만날 것이라는 비유이다. 아직은 아무도 산 정상을 본 일이 없고 각자 자기가 오르고 있는 등산로에서 가끔씩 산정을 쳐다보면서 오르고 있을 뿐이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본 산의 부분적 모습을 전부라 생각하거나 절대화해서는 안 되고 서로 옳다고 다툴 필요도 없다. 오히려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고 인정하면서 대화를 통해 경험과 정보를 나누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면서 제각기 열심히 오르다보면 결국 모두가 한 산정에서 만날 것이라는 비유이다.
이 비유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무도 정상에 올라 본 적이 없고 거기서 모든 등산로를 조감해본 본 일도 없는데 어떻게 모두가 같은 산을 오른다고 말할 수 있겠냐는 반론이다. 다시 말해, 아무도 초월적인 신의 관점(God's-eye view)을 지닌 자가 없는데, 어떻게 서로 다른 길로 오르고 있는 종교들이 같은 정상에서 만날지 아느냐는 것이다. 애초부터 다른 산을 오르고 있을지 누가 아는가 하는 비판이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의 비유도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모두가 장님이라면 코끼리 전체를 본 자가 아무도 없는데 어떻게 장님들이 같은 코끼리의 다른 부분들을 만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겠냐는 것이다. 누구도 그러한 인식상의 특권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 종교다원주의자들은 마치 누군가가 -실제로 자기들이!- 종교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양 착각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모두 일리 있는 비판들이다. 만약 길이 다르기 때문에 도달하는 경지도 다를 것이라고 결론짓는다면, 종교들이 도달하는 궁극적 구원의 경지도 당연히 다를 것이며 결국 여러 종교들은 각기 다른 산을 오르고 있을 것이라는 결론이 따른다. 종교다원주의의 비판자들은 또 다원주의가 결국 각 종교의 특수성과 차이를 해소해버림으로써 역설적이게도 다원주의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고 비판한다. 진정한 다원주의는 종교 간의 차이를 끝까지 인정하는 다원주의이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다원주의를 모든 종교가 궁극적으로 한 정상에서 만날 것이라는 ‘일원적 다원주의’와 구별하여 ‘다원적 다원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다원적 다원주의는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 버리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선택은 궁극적 일치 아니면 궁극적 차이 둘 뿐이다. 궁극적 일치 대신 궁극적 차이를 주장한다면 결국 다원주의는 배타주의가 될 것이며 종교 간의 다툼과 갈등의 소지는 끝까지 남을 것이다.
일원적 다원주의가 종교들의 차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비판도 타당하지 않다. 다원주의는 종교들의 궁극적 일치를 주장하지 현실적 일치나 통합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 종교다원주의는 실존하는 여러 종교들(positive religions)에서 비본질적이고 우연적인 요소들을 제거하고 남는 어떤 추상적 종교의 ‘본질’이나 ‘보편종교’ 같은 것을 상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원주의자들은 인간이 지상에 발을 붙이고 신앙생활을 하는 한 누구도 자기가 속한 역사적 실체로서의 종교를 피할 길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산정에 오르려면 누구든 한 특정 종교가 제시하는 길을 따라 오르지 존재하지도 않는 어떤 보편종교 같은 추상체를 통해 오르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다원주의자들은 구원/해방이 완전히 실현되는 초월적 세계에서는 종교 간의 차이가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들은 모두 길이고 방편이며 수단이고 상징일 뿐이다.
다원주의가 어떤 인식상의 특권을 주장한다는 비판 역시 정당하지 않다. 상이한 종교들이 동일한 궁극적 실재 내지 진리를 여러 각도에서 반사하고 있다는 이론은 다원주의자들 자신이나 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실제로 보았기 때문에 하는 주장이 아니다. 누군가가 산 정상에서 여러 등산로를 조망해 보았기 때문에 하는 초월적 주장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의 추정 내지 가설(hypothesis)이다. 아직은 어느 종교도 산정을 있는 그대로 본 일이 없다. 그럼에도 여러 종교들이 거기서 만날 것이라는 가설을 제시하는 데는 이를 뒷받침해 줄만한 몇 가지 정황적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 세계 종교들에서 발견되는 사상이나 교리, 그리고 종교적 경험에 어느 정도 유사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등산의 비유를 계속하자면, 산정에 대한 묘사들이 비록 부분적이고 불완전하지만 제법 유사점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유구한 전통을 지닌 위대한 종교들의 신자들이 보여주는 대등하고 유사한 도덕적, 영적 힘은 자연스럽게 그러한 가설을 요구한다. 이 힘은 결국 동일한 원천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정이다. 셋째, 위대한 종교 전통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힌두교, 불교, 유교, 도교― 은 공통적으로 궁극적 실재를 여럿이 아니라 ‘하나’로 여긴다. 형이상학적 일원론(metaphysical monism)이든 유일신 신앙(monotheism)이든 이들 종교전통들은 모두 잡다한 현상세계의 배후나 근저, 혹은 그 너머로 ‘하나’의 통일적이고 궁극적인 실재를 상정하고 있다. 비록 이 실재가 다양한 이름(道, 梵 Brahman, 太極, 하느님, 空 혹은 法身)으로 불리고 있지만 결국 동일한 실재를 달리 부르고 있을 것이라는 가설이 그 반대의 가설, 즉 각기 다른 실재를 가리키고 있다는 가설보다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불교의 공사상이 형이상학적 일원론의 범주에 속하는지는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공이 일단 일체의 차별성과 분별을 넘어선 실재를 지칭하는 개념임은 확실하다. 궁극적 실재가 하나이고 하느님도 한 분이고 인류도 하나라면, 인류가 추구하는 구원/해방도 궁극적으로는 하나일 것이라는 가설은 거의 자명한 일처럼 보인다. 비록 등산 중에 바라보는 산정의 모습들이 아직은 부분적이고 불완전해서 다를 수밖에 없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두 동일한 실재를 지향하고 있을 것이다.
종교다원주의자들 가운데는 이론적, 사상적 차원에서보다 실천적 차원에서 다원주의론을 펴는 사람도 있다. 실천적 종교다원주의에 따르면, 종교들의 궁극적 일치는 어떤 종교적 경험이나 교리나 사상의 차원에서보다는 정의와 사랑과 해방에 헌신하는 실천적 차원의 일치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입장을 대변하는 대표적 학자는 폴 니터(Paul Knitter)이다. 그에 따르면 모든 종교는 내재적이고 초월적인 신비(immanent-transcendent Mystery)의 경험을 통해서 인간과 자연의 복리(eco-human wellbeing)를 구원(soteria)으로 추구한다. 이 구원은 모든 종교에 공통된 관심사이고 궁극적 목표이며 종교들의 가치와 진리를 판단하는 척도가 된다. 구원을 추구하고 경험하는 방식은 종교마다 다르지만 어느 종교든 가난한 자들을 위한 정의와 해방, 그리고 지구 환경의 보존이라는 실천적 과제를 무시하면 참다운 종교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천적 종교다원주의는 종교 간의 초월적 일치를 우리가 아직 완전히 경험하지 못한 어떤 궁극적 실재에 두기보다는 그 실재와의 접촉에서 오는 구원의 경험과 해방적 실천에서 찾는다. 실천적 다원주의에서도 어느 한 종교가 구원을 독점하거나 완전히 구현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종교들은 실천적 과제와 이상을 놓고서 각기 자기의 한계를 의식하면서 타종교들과 대화하고 협력해야만 한다.
환경보존 등 실천적 과제 해결하는 종교다원주의
사실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종교 간의 다툼과 갈등을 해결하려는 것이다. 상충하는 종교적 주장들을 놓고서 종교다원주의는 한편으로는 자기 종교만이 옳다는 배타주의를 거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종교가 다 근거 없는 허위라는 세속주의도 거부하면서 여러 종교들이 각기 제한된 형태로나마 진리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종교다원주의는 어떻게 하면 종교와 신앙의 이름으로 자행된 무수한 폭력과 증오의 문제를 신앙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서 나온 해결책이다.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비판자들은 종교다원주의가 각 종교가 제시하고 있는 진리의 궁극성을 너무 안이하게 타협해버리고 어떤 종교 외적 진리나 가치를 더 궁극적인 것으로 신봉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다원주의자들은 종교 간의 평화 자체가 한 종교의 신자가 신봉하고 있는 종교적 진리보다 우위에 있다거나 정의와 사랑 같은 보편적 가치들이 자기가 따르는 종교의 진리보다 우선한다고 생각해서 너무 쉽게 종교의 진리를 양도해버린다고 비판한다. 종교다원주의는 결국 종교 외적 관점에서 또 하나의 절대적 진리 주장을 하고 있다는 비판이며 그 자체가 하나의 새로운 종교인 -종교다원주의자들 자신 말고는 아무 신자도 없는 공허한 종교- 셈이라는 것이다.
이 역시 일리 있는 비판이며, 다원주의자들은 굳이 이를 부정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론적 다원주의이든 실천적 다원주의이든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우선 특정 종교의 절대화를 거부한다. 자신이 믿는 종교의 진리를 포함해서 그 어떤 종교의 절대적 진리 주장도 인정하지 않는다. 종교다원주의는 현실의 종교들을 초월하는 이상적 진리 혹은 가치를 상정하고 믿기 때문이다. 어느 한 종교의 전유물이 될 수 없고 어떤 종교도 그 앞에서 배타적 독점권을 주장할 수 없는 초월적 진리와 가치를 상정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종교다원주의자 자신도 이 초월적 진리/실재 앞에서 아무런 인식상의 특권을 주장할 수 없으며 주장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실천적 종교다원주의는 궁극적 실재(Reality)나 진리(Truth) 대신 구원/해방이라는 가치를 모든 개별 종교를 초월하는 상위 질서로 내세운다. 정의, 평화, 사랑, 자유, 해방, 자연/인간의 복리라는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구원의 이상이다. 그 앞에서는 어떤 종교든 한계와 부족을 인정할 수밖에 없으며 상대화될 수밖에 없다. 실천적 다원주의는 만인의 자유, 평등, 인권에 기초한 근대 민주사회의 질서, 나아가서 자연과 인간의 건강한 공생관계를 절대적 가치로 존중한다. 아니, 존중 정도가 아니라 이 가치들이 사실상 종교의 존재 이유이며 개별 종교들의 특수한 진리 주장에 우선한다고 본다. 종교가 분쟁과 다툼을 유발하고 사회의 분열을 조장한다면 종교의 본질적 사명과 존재 이유를 배반하는 것이기에 비판 받아 마땅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실천적 다원주의자들은 말할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실천적 종교다원주의는 진리보다 사랑의 우선성을 인정하는 셈이다. 아니, 사랑이 곧 진리이다. 따라서 만약 어떤 종교의 진리 주장이 증오와 폭력을 유발한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닐 것이다. 얼마나 많은 독선과 폭력이 종교적 진리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는지를 생각해보면 수긍이 되는 입장이 아닐까? 도대체 종교의 존재 이유가 무엇이기에 신앙의 이름으로 전쟁을 하고 마구 생명을 죽인다는 말인가? 실천적 다원주의자들은 묻는다.
‘종교다원주의는 또 하나의 종교?’ 비판도 제기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종교들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상대화하기 위해서 반드시 종교 외적 시각이나 기준을 도입한다고 볼 필요는 없다. 사랑, 정의, 평화, 그리고 겸손과 관용 등은 모든 종교의 공통된 가르침에 속하기 때문이다. 실천적 다원주의가 추구하고 있는 이러한 일련의 도덕적 가치들은 개별 종교들의 교리나 사상보다 우선적일 수 있다. 실제로 우리는 이러한 주장이 신앙인들 자신에 의해 제기되어 왔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교리적 진리보다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종교 내에 항시 존재해 온 것이다. 구약성서 예언자들의 목소리는 그 대표적 예에 속한다. 하느님이 요구하는 정의와 자비 앞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적 특권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예언자들의 날카로운 비판은 신앙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신앙 비판이며 종교 비판이다.
이론적 다원주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각 종교의 신비주의 영성가들(mystics)은 항시 초월적 실재 앞에서 인간의 언어나 교리가 얼마나 무력한지를 절감해 왔으며, 때로는 과감하게 자기 종교의 교리나 신학을 부정하거나 상대화하는 지혜와 용기를 보여 왔다. 신앙인들, 신비주의자들, 혹은 신학자들 스스로 자기 종교의 한계성을 뚜렷이 의식하고 인정해 온 것이다. 종교는 결코 신이 아니다. 종교는 어디까지나 신/실재를 지향하고 가리키는 상징이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 달 자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신앙인들 스스로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종교다원주의자들 역시 종교의 교리나 사상, 의례나 수행 등이 어디까지나 수단이고 방편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데 인식을 같이 한다.
종교다원주의는 어떤 특정 종교의 시각에서 형성된 편향된 이론이 아님은 물론이고, 어떤 종교 외적 시각에서 도입된 기준으로 개별 종교들의 구체적 신앙과 진리에 대한 헌신을 무력화시키려는 비신앙적 이론도 아니다. 하느님의 준엄한 윤리적 명령이나 양심의 소리 앞에서 가차 없이 자신의 종교를 비판하고 자기 종교의 특권을 부정하는 예언자적 목소리, 일체의 언어와 형상을 초월하는 실재 앞에서 침묵하라는 신비주의자들의 경고는 비록 종교 내에서 소수의 목소리일지라도 종교의 순수성을 지키는 양심의 보루다. 역사적 상대주의나 문화적 상대주의에 의해 종교들의 전통적 권위를 돌이킬 수 없게 해체 시킨 현대의 역사연구, 문화인류학, 비교종교학이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순수한 소리를 더욱 명료하게 들을 수 있도록 해준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이다. 종교다원주의는 결코 종교다원주의자들이 고안해 낸 또 하나의 종교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 종교에 충실하면서도 초월적 실재 앞에서 그 한계를 의식하는 겸손한 신앙인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이론이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