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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벗님글방

책을 몽땅 태워버리다

등록 2008-09-29 18:59

[벗님글방/원철 스님] 뗏목론 통발론 휴지론 등, 이 모순 어떻게…

경전의 허물보다 수행에 미친 역할이 열쇠 성철선사가 파계사에서 철조망을 치고 동구불출(洞口不出)하며 10여년을 머물렀다. 물론 참선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간에 전해져 오는 것은 대장경을 두루 열람하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장경각(개인도서관)이라고 불릴 만큼 누구보다도 많은 경전을 소유했고 또 열심히 읽었다. 불교경전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서적은 말할 것도 없고 주변학문에도 밝아 설법할 때마다 종횡무진으로 인용했다. 그런데 늘 후학들에게 '정진할 때는 책을 보지 말라'고 하셨다. 도대체 '이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때론 화두 아닌 화두가 되기도 했다. 이런 논리는 '강을 건넌 후 뗏목을 버려야 한다'는 초기불교의 뗏목론에서 시작하여 중국으로 오면서 '고기를 잡으면 통발은 필요 없다'는 장자의 득어망전(得魚忘筌)에 바탕하는 통발론으로 이어졌고 급기야 '팔만대장경은 고름 닦는 종이에 불과하다'는 선종 휴지론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하겠다.

중국선종을 실질적으로 대표하는 육조혜능선사는 나무꾼 시절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고 하는 금강경의 한 구절을 듣고서 마음의 경지가 달라졌고, 이로 인하여 출가를 결행하게 된다. 육조단경 덕이본에 의하면 스승 홍인에게 금강경 강의를 들으면서 바로 그 구절인 '응무소주이생기심'에서 일체만법을 대오(大悟)했다고 했다. 고려 선종에서 우뚝한 업적을 남긴 보조지눌 선사는 《육조단경》을 읽다가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늘 곁에 《서장》과 《육조단경》을 두고서 정진했다. 혜능과 지눌은 경전을 통하여 자기의 안목이 열린 탓에 경전에 대하여 비교적 긍정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부정론도 그 못지않게 많다. 향엄지한(香嚴智閑)선사는 스승 위산에게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의 네 모습(父母未生前 本來面目)'을 질문 받고는 그동안 열람했던 경전 속에서 결국 해답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헛공부했다면서 경전을 불 지른다. 그때 어떤 학인이 가까이 와서 '늘 갖고 싶었던 책이니 저 책만은 태우지 말고 나를 달라'고 졸랐다. 하지만 그는 도리어 "내가 이것 때문에 평생 피해를 입었다. 그대가 요구해도 그 폐해를 아는 나로서는 줄 수가 없다"라고 하면서 남김없이 태워버렸다. 대혜종고선사는 선종의 최고 저작물이라고 평가받는 《벽암록》을 불태워버렸다. 이 책은 그의 스승 원오극근 선사의 저작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이 책에 의거해서 깨달음의 증표를 삼을 만큼 명저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느 날 당시의 수행자들이 이 책을 읽고 외우고 또 앵무새처럼 교과서대로 문답하는 광경을 발견하게 되었다. 수학문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통째로 외워서 답안지를 메우는 격이었다. 알음알이로 수행의 척도를 삼는 우려할만한 상황이 도처에 만연한 것을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수집할 수 있는 대로 모아서 책다비식을 했다. 하지만 임제선사는 이 모든 과격한 행동에 대하여 또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다. '몸과 마음 그리고 심지어 진리까지도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진정한 경전 불사르기'라고 정의하면서, 혹여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인위적인 불장난에 대해선 가차 없는 비판을 날렸다. 경전으로 인하여 깨달음의 지남(指南)을 얻은 수행자가 있는가 하면 대장경으로 인하여 허송세월을 보낸 납자들도 많았다. 따라서 전자는 긍정론적 시각을 가지게 되고 후자는 부정론을 펴게 된다. 결국 경전자체의 허물이라기보다는 당사자의 수행결과에 경전이 어떤 역할을 했는가 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하겠다. 물론 축자주의(逐字主義)에 매몰된 하수(下手)는 언급할 대상조차 못된다. 뗏목론과 통발론 그리고 휴지론이 '참으로 옳은가?'를 묻는 후학의 질문에, 파릉(巴陵)선사는 "닭은 추우면 나무로 올라가고, 오리는 추우면 물로 내려가느니라.(鷄寒上樹 鴨寒下水)"고 말했고, 낙포(洛浦)선사는 "해와 달이 허공에 오가는데 누가 따로따로 길이 있다고 하리오.(日月幷輪空 誰言別有路)" 라고 대답했다. 여전히 그 말씀도 보통사람들에게 난해하고 또 알쏭달쏭한 시어(詩語)이지만 그래도 곰곰이 헤아려보면 그 속에 해답이 있을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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