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님 글방/원철 스님]
소통 부재는 오해를 낳고 오해는 갈등 부채질
얼마 전부터 조계사 경내에는 2동의 '촛불 천막'이 부득이한 사정으로 서울광장에서 이사를 왔다. 한지로 만든 은은한 대형 '촛불소녀등'이 사천왕 마냥 이들을 밤새 지켜주고 있다. 덤으로 또 다른 젊은 순례객들의 왕래가 많아졌다. 더불어 '극우단체'의 항의방문도 더러 있었다. 이래저래 야단법석이다.
2008년 여름 수십만 개의 촛불을 밝힌 광화문에서 숭례문으로 이어지는 거리를 '화엄(火嚴:촛불로 장엄된)서울'이라고 어떤 언론은 이름 붙였다. 촛불은 자기를 태워서 주변의 어둠을 몰아내고 세속의 번뇌와 때를 태워버리는 상징물이다. 마음의 탐욕을 제거하고 어두운 사바세계를 밝히는 광명이기도 하다. 현대의 촛불은 자기의사 표현수단으로써 세속적이면서 또 성스러운 이미지가 함께 보태져 진화하고 있는 중이다.
세속적이면서도 성스러운 이미지 함께 보태져 진화
시청 앞 광장의 수많은 촛불은 맨 촛불이 아니었다. 종이컵으로 감싸 안은 촛불이었다. 선어록의 표현을 빌자면 '등롱(燈籠)'의 모습이다. 등롱은 촛불을 바람으로부터 보호하고, 또 부나비 등 벌레들이 달려들어 타 죽는 것을 막기 위한 용도로 덧붙여졌다. 선사들은 여름밤에 등불을 사용할 때 꼭 등롱을 갖추도록 했다. 그건 지혜의 불인 동시에 자비의 불이 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오늘의 종이컵 역시 그 등롱의 가르침과 역할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하지만 등롱은 등롱 자체보다는 불과 함께할 때 제대로 역할이 주어진다. 그 덕분에 등롱 속의 촛불은 심지가 모두 소진될 때까지 주변을 밝힐 수 있게 된다. 등롱을 통해 밖으로 비치는 불빛은 주변을 감동시켜 돌기둥(露柱)까지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그래서 대지(大智1043~1366)선사는 "등롱과 노주가 서로 낮은 목소리로 대화한다(燈籠露柱且低聲)"는 시를 남겼다. 하지만 올 여름의 촛불은 촛불대로 돌기둥은 돌기둥대로 서로 겉돌고 큰소리가 오가는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깝다. 소통 부재는 오해를 낳고 그 오해는 더욱 갈등을 부채질하여 결국 공멸을 부를 뿐이다.
고대 인도의 가섭 3형제는 횃불을 숭배하던 배화(拜火)교도였다. 그들은 '밖으로 보이는 유형의 불을 섬길 것이 아니라 마음속을 밝히는 불을 켜라'는 선지식의 한마디에 세계관이 바뀌는 체험을 했다. 일본 천태종 본거지 히에이산(比叡山) 엔라쿠지(延曆寺) 근본중당(根本中堂)의 '불멸 법등'은 1200년 동안 꺼지지 않고 본당을 밝히며 오늘까지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묵묵히 한 길로 정진한다면 그 자체가 이미 이 세상을 밝히는 한줄기 빛임을 무언으로 증명하고 있다. 자신을 등불 삼을 때 그 빛은 바로 세상의 영원한 장명등(長明燈)이 되는 것이다.
켜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끄는 지혜도 그 못지않게 중요
당나라 때도 촛불사건이 있었다. 용담(782~865)선사에게 덕산(782~865)학인이 찾아왔다. 오랫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 방문을 나섰다. 그런데 이미 바깥은 깜깜해져 신발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다시 방안으로 들어왔다.
"왜 돌아왔는가?"
"문밖이 어둡습니다."
그러자 선사는 촛불을 건네주었다. 하지만 그것을 받으려는 순간 "훅"하고 불을 꺼버렸다.
촛불을 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잘 끄는 지혜도 중요하다. 덕산에게 주어야 할 것은 물리적 촛불이 아니었다. 자기세계에 매몰되어 있는 독선의 한계를 가차 없이 깨 주는 전환의 충격요법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작은 촛불을 버리게 함으로써 오히려 더 큰 촛불을 얻게 해주었다. 하지만 'MB표 횃불'은 절대로 큰 촛불이 아니라고 등롱들은 손사래를 치고 있다.
후텁지근한 여름밤에 일천 명의 승가 대중과 수만 명의 시민들이 연꽃잎으로 장식한 촛불을 들고 등롱과 돌기둥의 화합을 위하여 남대문을 돌아 서울광장에 모여 지극정성으로 백팔 배를 올렸다.
"모두가 아집과 이기심을 버리니, 귀 열리고 눈 밝아져 더 이상 촛불도 횃불도 필요 없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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