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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벗님글방

30년간 두문불출 결사도 벗님 때문에 아차!

등록 2008-05-13 11:59

[벗님 글방/원철 스님] 중국 강서성 방문기 우민사ㆍ동림사 선사들 진면목은 그대로인데…

 

강서성(江西省) 남창(南昌)으로 갔다. 중국 3대 누각 중의 하나라는 등왕각이 마주하는 곳에 여장을 풀었다. 밤의 조명 때문인지 성채 같은 누각은 더욱 화려해 보였다. 왕발(王勃 649~676)의 ‘등왕각 서’라는 명문 속에서는 이 광경을 이렇게 읊었다.

날 듯한 누각에 단청 빛이 흐르고(飛閣流丹)

 아래를 보니 바닥이 안보일 정도로 깊구나.(下臨無地)

 

 예나 지금이나 누각은 높고 강물은 깊었다.

 그리고 그 글은 여산(廬山)이 가까이 있음까지 알려주었다.

 

 남창은 옛 고을이요 홍도는 새 동네라.(南昌故郡 洪都新俯)

 땅은 형산과 여산에 접해 있으니....(地接衡廬) 마조도일이 천하 양분해 인재들 구름처럼 몰려 머무는 방에 걸어놓고 늘 바라보는 중국 선종지도에도 ‘남창(홍주 洪州)’라고 하여 본지명과 함께 괄호 안의 이름을 동시에 처리해 놓았다. 두 지명을 번갈아 가며 사용한 것 같다. 선어록 속에 자주 등장하는 ‘홍주 개원사(開元寺)’는 현재 ‘남창 우민사(佑民寺)’로 불린다. 우민사는 ‘마조도량(馬祖道場) 우민사’를 표방하고 있었다. 작은 아파트에 둘러싸인 도심이었는데, 조계사 크기 정도의 공간을 가진 사찰이었다. 물론 마조가 머물 때는 수백명의 대중이 살 수 있던 인근주변까지 포함되는 큰 구역이었다고 했다. 어쨌거나 모든 것은 변해가기 마련이다. 강서성의 이 절은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선사가 61세에 들어와서 30년 동안 납자를 제접한 도량이다. 얼마나 많은 인재들이 모여들었던지 연접한 호남성의 석두희천(石頭希遷 700~790)선사와 더불어 중원천하를 양분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그 유명한 ‘강호제현(江湖諸賢)’이란 말이 등장했다. 강(江)은 강서지방, 호(湖)는 호남성을 말한다. 그런 연유로 마조선을 강서선 또는 홍주종이라고도 불렀던 것이다. 강서성 홍주 땅이 마조의 주무대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해인사 장경각에는 세계유일의《조당집》판본이 남아있다. 거기에는 조계종조 도의(道義)국사께서 “강서 홍주 개원사로 가서 서당지장 선사에게 머리 숙여 스승으로 모시고 (화두)의심을 풀었다...”고 하였다. 서당지장(西堂智藏 735~814)은 마조선사의 상수제자이다. 그로부터 1300여년이 지난 후 가산지관(伽山智冠 1932~ )스님을 위시한 조계후학들은 ‘도의조사입당구법기념비’를 건립했다. 필자도 그 말석에 끼어 현대 선종사의 의미 있는 한 페이지를 함께 장엄하는 복을 누렸다. 명성과 달리 계곡도 다리도 “에게게!” 여산(廬山)은 멀지 않았다. 가는 길에 구강(九江)이라는 길 안내판이 보였다. 구강은 선종성지이다. 오조홍인 선사의 제자에 대한 애틋함이 서려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선사는 전법을 한 다음 한밤중에 황매산에서 이곳까지 혜능을 데려다 준다. 그래도 불안했던지 배에 태워 직접 노를 저어 물까지 건너 주고자 하였다. 이에 혜능은 이렇게 말하면서 스승과 석별의 정을 나눈 곳이다.

 

 어리석을 때는 스승님께서 건너 주셔야 하지만,(迷時師度)

 깨닫고 난 뒤에는 스스로 건너가겠습니다.(悟了自度)

  여산은 동림사(東林寺)가 유명하다. 중국 초창기 불교교단의 초석을 놓은 혜원(慧遠 335~417)스님의 30년 결사도량이다. 그의 비장함은 ‘영불출산(影不出山) 적불입속(跡不入俗)’이라는 좌우명에 그대로 나타난다. 행여 그림자라고 할지라도 산을 나가지 않을 것이며, 절대로 나의 흔적을 속세에 들이지 않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약속은 단 한번 깨졌다. 인생의 3가지 즐거움 중 하나는 ‘멀리서 벗이 찾아온 것’이라고 했다. 일타스님이 태백산 도솔암에서 결사할 때 사람이 너무 귀했다고 한다. 그 탓에 동네 나무꾼이 길을 잘못 들어 우연찮게 토굴로 들어온 것조차 너무 반가웠다. 사람이 너무 그리워 법문을 들을 생각이 전혀 없는 그 나무꾼까지 붙들어 놓고 몇 시간 동안 설법을 했다고 하였다. 혜원스님도 그랬을 것이다. 오랜만에 찾아 온, 게다가 '대화가 되는 사이'인 절친한 도연명과 육수정을 자연스럽게 산문까지 바래다주게 되었다. 설사 수행이 본업이라고 할지라도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은 그 심정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대화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그만 동구불출(洞口不出)의 경계선인 호계(虎溪)를 자기도 모르는 새 넘어버린 것이었다. 호랑이 울음소리에 이 사실을 알아차린 그에게 전후사정을 들은 세 사람은 박장대소했다. 그 유명한 ‘호계삼소(虎溪三笑)’라는 말은 이렇게 탄생했다. 그런데 호계는 천칠백년 전의 그 호계가 아니었다. 송나라 화가 석각(石恪), 명말청초의 보하(普荷), 그리고 조선의 선화가 김명국(1600~1662)의 '호계삼소도'에서 묘사된 아름다운 계곡, 그리고 호젓한 다리의 그림과는 너무 달랐다. 현재의 실상은 인근마을의 생활하수가 함께 유입되는 도랑물 수준이었다. “에게게!”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그것도 대부분 조잡한 시멘트로 복개된 상태였다. 명성만 듣고 찾아오는 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10여m만 상징적으로 일부러 남겨둔 것 같았다. 그 배려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지경이다. 세월이 너무 많이 흐른 탓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리고 화가들도 모두 상상으로 그린 탓도 있을 것이다. 유리보호각속의 조금 오래된 듯한 ‘호계교’ 비석만이 옛 흔적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한다. 부분에 집착하면 전체를 볼 수 없는 법 나오는 길에 덤으로 입구의 서림사(西林寺)에 들렀다. 비구니 처소라고 했다. 크지는 않았지만 정갈했다. 바래고 묵은 높다란 전탑 옆에 소동파(蘇東坡 1036~1101)의 시를 새로이 초서체로 새겨 놓았다. 함께 간 조선족 가이드는 이 시에서 ‘여산진면목’이 유명한 말이라고 거들었다. 주변에는 파양호를 비롯하여 호수가 많기 때문에 일 년의 절반은 여산이 안개에 싸여 있다. 따라서 온전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산이다. 그 때문에 '여산의 진면목은 보기 어렵다'는 말이 나왔다.  

 가로 보면 고개요 모로 보면 봉우리니(橫看成嶺側成峰)

 멀리 가까이 높낮이에 따라 각각 다른 모습일세.(遠近高低各不同)

 여산의 참모습을 알 수 없는 것은(不識廬山眞面目)

 이 몸이 산 속에 갇혀있는 탓이구나.(只緣身在此山中) 우리가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부분에 국집(집착)하는 사람은 전체를 볼 수 없기 마련이다. 그래서 ‘진면목을 모른다(不識眞面目)’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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