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떴는데, 지난 밤 악몽을 꾼 뒤 문득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다시 눈앞에 현실처럼 전개되었다. 고교입학시험 기간이었다. 전날 필기시험을 마치고 체육시험을 치르러 고등학교로 들어가는 좁은 언덕길을 오르는 중이었다. 많은 수험생들이 양떼처럼 뭉쳐 움직이고 있었다. 나도 그 중에 한명이 되어 앞만 보고 가고 있었다. 갑자기 낯익은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고개를 돌려보니 선생님 세 분이 길가에 서 있었다. 영어선생 물리선생 미술선생이었다. 경남중학 출신 선생이었다. 말하자면 학교선배이기도 한 분들이다. 피하고 싶었지만 거역할 수도 없어 그들 앞에 섰다. 셋 중 물리선생이 다짜고짜 뺨부터 때렸다. 세게 때린 건 아니지만 모욕감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체육시험 잘 쳐. 필기시험 점수가 그게 뭐야? 너 커트라인에 매달려 있어.”그리고는 다시 훈계를 한답시고 뭐라고 길게 얘기하는데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영어선생이 내 이마를 가운데 손가락 끝으로 찌르듯이 밀었다. “머리만 믿고 공부는 아예 안하냐?”그 순간 나는 애써 잡고 있던 끈을 놓아버렸다.
“야 이 일본노무새끼들아. 너희들이 선생이냐?”순간 나는 발길질에 땅바닥으로 나동그라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선생님들을 끌어안고 드잽이를 하고 말았고, 얼굴이 깨지도록 맞았다.“야 이 개새끼들아. 내 죽으면 죽었지 이런 학교는 안 다닌다.”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오던 길을 되돌아 집으로 가고 말았다. 선생님들과 주먹질을 한 끝이라 졸업이 안 될 줄 알았는데 다행히 졸업장은 받을 수 있었다. 부모님은 크게 실망했다. 고등학교 진학 때문에 서울로 이사를 갈 계획까지 세웠으나 나의 반대로 다시 주저앉았다. 부모님의 꿈을 앗아간 꼴이 되었다. 중학교 입학시험을 1등으로 합격하면서 부모님은 큰 기대를 하였지만 실상 나는 초등학교 때 한번도 1등을 해본 적이 없었고 6년 내내 가정교사를 두고 과외공부를 해서 간신히 공부를 따라가는 실력이었다.
문제는 학교에도 있었다. 학교 전통 때문에 3년 내내 전액장학금을 받았지만 받을 때마다 빠따를 맞았다. 공부가 상위그룹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우리집이 부유한 편이니 장학금을 안 받겠다고 해도 굳이 때리면서 주었다. 이런 것조차도 일방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선생님들은 어린 우리들을 출세를 위해 학교에 온 것으로 취급했다. 너는 공부를 잘하니 고시패스를 해서 판사를 할 놈이고, 너는 공부를 못 하니 장사나 해먹을 놈이라는 둥 자신의 가치관으로 우리를 대놓고 재단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나는 너무나 못 나서 이 좋은 학교를 나오고도 선생질 밖에 못한다며 자조에 빠지곤 했다. 자신을 성공한 친구에 비교하며 인생 실패자로 여겼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일본인 선생님들이 자신을 그토록 모질게 때려준 은혜를 수업시간 중에 뇌고 또 뇌었다. 예를 드는 모든 훌륭한 사람은 일본사람들이었다. 하기야 경남중학교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을 위해 세운 학교였다. 그 학교에 한국학생들 몇이 끼어들어가 다닌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일본사람이 못 되어서 마치 한이 맺힌 것 같다고 해야 할지. 60년 대 말 그 몇 동창생 선생님들은 다른 선생들과는 달리 모이기만 하면 일본말로 대화하면서 마치 별세계에서 온 특권계층 사람들 인양 굴었다. 내 동급생에게 뜬금없이 수업 중에 물었다. “야. 너그 아부지 동경대 법대 나왔다며? 지금은 뭐 하시노?”
우리 아버지도 공업전문학교를 나와 만주척식회사에서 측량기사로 일했는데 일본사람들이 중국인들에게 저지른 잔악한 짓을 자주 욕했다. 자신도 그들의 하수인 노릇 한 것을 평생 후회했다. 우리집이 계속 어려움을 겪는 것은 나쁜 짓인 줄 알면서도 일본인들이 시키는 대로 저지른 수탈과 횡포에 대한 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까지 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권투선수 유제두가 일본에 원정 가서 와지마 고이찌와 두 번째로 시합하면서 처음 승리한 시합과는 달리 힘을 못 쓰고 계속 비틀거리며 얻어맞자 유제두의 매니저가 몰래 약을 먹인 거라며 저녁을 드시다말고 숟가락을 놓더니 방에 들어가 누워버렸다. 일본놈들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간교한 놈들이라고 항상 얘기했다. 전체조례에서 늘 훌륭한 말씀을 해주시는 곱상한 외모의 교장선생님이 우리 반 아이 부친이기도 한 교육감님에게 돈 보자기가 든 사과상자를 갖다 줘서 우리학교에 부임했다는 급우의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중학교 다닐 때도 학교선생님들에게 내내 과외공부를 했지만 선생님 같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고 단 한 분도 이름이 전혀 기억 안 난다. 동급생들과는 친구가 될 수도 없었다. 모두 서로가 경쟁자일 뿐이었다. 그래도 나하고 가깝게 지낸 친구는 우리 집에 세를 들어 살던 동급생뿐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내가 결석해서 배우지 못한 내용을 보충하기 위해 노트를 보여 달라고 간청해도 주는 녀석이 없었다.
선생님들은 말했다. 너희들 때는 친구로 사귀어봐야 의미가 없다. 출세하지 못하면 커서도 사는 세상이 달라 어울려 주지도 않는다. 공부해라. 출세해라. 3년 내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던 말이었다. 그 세계는 나이 든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 별세계다. 그들은 특권층이 되기 위해 특별히 모인 다른 나라 사람들 같았다.
우리 학교 출신인 법조계의 대표적인 분들이 말년에 감옥을 드나들며 고생을 하는 것을 보면서 지금에야 겨우 이해가 된다고 해야 할지. 자신들은 어릴 때부터 같은 한국인이 아닌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도록 훈련받지 않았나 싶다. 그렇지 않다면 그 많은 같은 동족을 그리고 일본인들에게 사람대접을 못 받고 사는 그 불쌍한 재일교포들을 그토록 고문해서 간첩을 만들어 평생을 감옥에 살게 하고 집안전체를 멸문지화를 당하게 만들어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진짜 괴물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소위 2류 고등학교를 가니 정말 살 것 같았다. 거기도 경쟁은 있었지만 실패를 겪어본 친구들이라 따뜻하고 인간미가 있었다. 나는 여전히 공부는 하기 싫어해서 도서관에 들어가 책만 읽었다. 재미있는 것은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내용이 이미 중학교 때 거의 다 배운 내용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거의 꼴찌를 하다시피 하다가 담임선생님이 성적을 조작해 주는 특별배려로 간신히 졸업할 수 있었다. 세월이 한참 지나 생각해 보니 당시 선생님들이 한 말들은 자신도 모르면서 그저 지어내 한 말들이었다. 공부 잘 하는 거하고 잘 사는 거하고 아무런 관계도 없었고, 그렇다고 출세하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내 아들이 중학교 1학년 마치고 그만 다닌다 했을 때 흔쾌히 허락했다. 한 학기를 놀다 심심하다며 다시 학교를 다닌다 했을 때도 그러라고 했다. 그러나 고등학교 3학년 과정은 굳이 다니지 말고 차라리 대입 검정고시를 치라고 권했다. 단지 대학입학을 위해 그렇게 죽어라고 외우고 공부할 내용은 교과서에 없다고까지 했다. 그저 친구들과 잘 지내고 좋은 선생님들과 사귀라고 했다. 아들도 나와 비슷한 종류라 별 거부감 없이 나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중‧고등학교 과정에서 이름이 기억나는 분은 고3 때 담임이셨던 한판권 선생님뿐이다. 공부 잘하는 친구보다 유난히 문제아들을 사랑했던 선생님이셨다. 지금도 그 선생님을 생각하면 울음이 터진다. 조금 떳떳한 위치가 되면 찾아뵙는다는 게 늘 방황하며 살다보니 결국 기회를 잡지 못 했다. 사람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 때문에 죽음을 맞게 된다더니 선생님은 다른 학교서 퇴학을 당해 새로 전학해 온 학생에게 농담을 던졌다가 오해를 사서 뒷머리를 의자로 맞고는 그 길로 학교를 떠났다고 했다.
한판권 선생님. 사랑합니다. 그래도 선생님이 계셨기에 오늘의 제가 있습니다. 저는 유난히 늦되는 놈인 모양입니다. 평생 은혜를 잊지 않고 잘 살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