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젊은 수행자가 있었다. 그는 수행의 길에서 나름대로 정진하였으나 고질적인 자신의 못된 습관 때문에 늘 괴로웠다. 그래서 그는 지혜와 자비심이 깊은 스승을 찾아갔다. “스승님! 저의 괴로움을 해결해주십시오.” “그래, 그대의 괴로움이란 대체 무엇인가?” “네, 저는 늘 급한 성격 때문에 실수도 잦고 사람과의 관계가 좋지 않습니다.” 제자의 고백을 듣고 스승은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말한다. “오호! 그대는 참 재미있는 것을 가지고 있군. 그럼 그 급한 성격을 지금 여기에 내놓게나. 그럼 내가 그것을 없애주지.” 스승의 말을 듣고 제자는 급한 성격을 그 자리에서 끄집어 내놓으려고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의 경건하고 자애로운 분위기 구석 모서리에 구겨진 채 끼여 있다고 생각했던 그 ‘급한 성격’을 끄집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순간, 제자는 크게 깨달았다. “아, 나를 힘들게 하는 급한 성격은 처음부터 내게 있었던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었구나. 그것은 끊임없는 행위의 반복으로 ‘만들어진’ 가변의 태도일 뿐이었구나.”
반독재 시위에 나선 미얀마 스님들.
지혜로운 스승은 붓다의 공(空)의 진리를 시의적절한 방편으로 녹여내어 제자의 현실적인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있다. 누군가의 말처럼 삶은 문제 해결의 연속이고, 그 맞닥뜨린 문제를 풀어나가는 게 바로 우리 삶이다. 이때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수준과 가치가 결정된다. 시대를 초월하여, 이런 문제 해결의 최고였던 이가 바로 붓다이다.
지금도 우리네 삶에서 최고의 멘토이자 상담가로서의 붓다를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중생 고뇌의 종결자로서 붓다를 대중들은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여러분이 생각하는 부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초청 받은 법회와 강의장에서 내가 청중에게 즐겨 던지는 질문이다. 기습적인 나의 물음에 이내 답을 내는 사람은 드물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가 이미 뻔히 알고 있는 사실-붓다는 더없이 위대하고 성스러운 절대자-에 대한 나의 물음이 새삼스럽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잠시 겨를을 주고 고집스레 거듭 묻는다. “부처님은 어떤 분입니까?” 청중은 듬성듬성 조심스런 태도로 답을 제시한다. 우주의 진리를 깨달은 분, 높은 가르침을 주시는 분, 늘 깊은 명상을 하시는 분이라고 답한다. 어디서나 많이 듣는 답이다. 틀린 답은 아닌데 무언가 허전하다. 너무 추상적이고 틀에 갇힌 붓다인 것 같다. 확연하게, 절실하게, 친근하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큰 감동으로 오시는 우리 시대의 붓다는 아니 계신가?
전적으로 수긍하지 못하는 나의 태도에 약간의 반발 작용으로, 그럼 스님이 생각하는 부처님은 어떤 분이냐고 되묻는 청중에게 “부처님은 늘 사람과 함께 살았습니다”라고 질문에 대한 서두를 꺼낸다.
나는 붓다에 대한 바른 이해는 ‘80년의 생애를 사람들과 더불어 산’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붓다가 평생을 사람들과 함께 살았다’는 인식이 왜 중요한가? 우리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 하나를 확인하자. 예로부터 지금까지 모든 사람은 모든 사람과 보고 듣는 관계의 그물망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붓다는 주위 사람들의 관계와 그들의 모습 속에서 헛된 믿음과 욕망의 본질을 보았다. 불평등한 사회구조에서 숙명처럼 살아가는 이들의 굴레와 욕망에 대한 인간들의 탐닉 그리고 생사에 대한 두려움을 보았다. 그래서 붓다는 인간 삶(내면)의 혁명을 꿈꾸게 되었고 마침내 완성하게 되었다. 인류상 가장 위대한 최고의 혁명가, 붓다가 되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붓다의 혁명의 발심과 원력은 주변을 보고 듣고 느낀 데서, 바로 사람들의 한복판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생의 의문과 해결에서 출발한 불교는, 지금도 여기 우리 삶의 의문과 문제 해결의 과정이자 결실이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에코 붓다’의 빈그릇 운동.
붓다는 깨친 후, 사람이 사는 여러 길에서 무수히 다른 많은 사람을 만나며 45년 동안 법을 설하였다. 어리석은 말과 탐욕 그리고 나쁜 관습에 결박당해 빛을 잃어버린 모든 생명을 본래자리-모두가 존재 자체로 빛나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는 것-로 되돌려놓는 데 평생을 바쳤다. 가장 단순하면서도 응축된 말로, 즉 공(空)과 연기(緣起), 무아(無我)의 진리를 설하며 나와 세상을 떠난 제3의 영역에서 별도의 불변하는 주재자는 결단코 없음을 역설하였다.
자, 세상의 이치가 이와 같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확연한 사실 판단에 근거하여 우리는 어떤 가치를 세워야 하는가? 이미 붓다의 길, 사람의 길로써 팔정도, 사무량심, 사섭법, 육바라밀의 행동지침은 제시되었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의 길, 붓다의 길을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어떻게 실천하게 하는가? 당장의 화두다! 정확하고 적확한 가치 설정과 구체적인 실천이 필요한 때다. 이른바 불교적 삶을 살아야 한다.
지난 9월 8일, ‘신도 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주제로 세미나(불광연구원 주최)가 열렸다. 진지한 논의와 토론을 거쳐 대략적인 합의와 공감이 이루어졌다. 신도 교육은 사찰의 세력 확대를 위해서 실시되어서는 안 되며 삶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무엇보다도 교리를 객관화하지 말고 마음과 가슴에 절실하게 이해되고 울림이 있는 지혜와 감성의 조화가 동시에 체득되어야 한다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교를 넘어서는 불교를 하며 보편적 지식과 종교적 지식이 조화로운 시민보살을 목표로 하자고.
나는 그날, 불교가 그토록 풍부한 사상과 철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오늘을 사는 이웃에게 호응과 공감을 얻지 못하는 까닭을 보다 선명하게 알았다. 삶의 의문과 해결에서 출발한 불교가 이러한 맥락에서 이탈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붓다는 생로병사의 존재론적 의문과 인간사회의 온갖 갈등과 괴로움에 분명한 입장과 답을 주었다. 그런데 이러한 역할이 부족하니 과거의 종교, 철학적 종교, 명상의 종교, 초월의 종교, 연로한 종교로 밀려나는 것이다.
입장과 행동지침이 분명해야 삶이 분명해진다. 이것이 지혜와 자비보살행의 현실적 적용이다. 1980년대 도올 김용옥은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에서 대략 다음과 같은 취지로 불교계의 허점을 지적했다. “불교는 사상과 교리가 완전하고 방대하다 보니 현실에 적응력에 둔감하다. 반면 기독교는 이런 점에서 취약하다 보니 현실적인 타개와 대안에 적극적이다.” 그렇다. 아무리 풍부하고 좋은 말씀이 수미산을 덮고 사해를 넘치더라도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은 상자에 갇힌 관념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적절하게 응답하지 않는다면 붓다의 진리는 대장경이 아니라 박물관에 소장된 유물일 뿐이다.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최우선의 가치로 세우는 것, 인종과 민족, 국가를 넘어서는 평등과 자비를 지향하는 것, 불살생과 비폭력을 실천하는 것, 동물을 놀이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것, 생태계를 파괴하는 개발에 동의하지 않는 것, 무한 경쟁에 따른 소외와 승자 독식의 정책을 반대하는 것, 이것이 붓다의 연기법과 자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길이다.
비난을 멀리하고 칭찬과 감사로 사는 일, 과소비가 불편한 삶이라는 것을 실감하고 적절한 소유로 만족하고 이웃과 나누는 일, 늘 내면의 평화와 사회의 평화를 동시적으로 실천하는 일, 작지만 정성스러운 자비행으로 이웃과 상생하는 일, 일상에서 상식과 도덕에 투철하는 일, 이 모두가 팔정도와 육바라밀의 불교적 길이다.
붓다의 길, 수행의 길은 구체적으로 나와 세계를 혁명하는 일이다. 혁명은 실천으로 이루어진다. 학문과 수행이 다른 점은 실천의 여부에 있다. 카를 마르크스는 27세에 쓴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마지막 제11번째 테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단지 세계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하기만 했으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일이다.”
그렇다. 이제 붓다의 제자들은 해석을 넘어 실사구시의 실천에 전념해야 할 지점에 서 있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