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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벗님글방

박노해의 시에서 붓다의 속울음을 듣는다

등록 2012-04-02 14:47

 

  - 삶의 힘, 말의 힘 -

 

    “스님, 새해에는 부디 꼴값(아주 좋은 말인거 아시죠!) 하시면서 안과 밖 모두 여여하고 날마다 기쁜 날 이루세요.”

 

  임진년 첫날 아침, 휴대전화를 타고 온 어느 지인의 축복 메시지는 이렇게 유쾌하고 의미심장하게 내게로 왔다. 새삼 나의 ‘꼴’과 ‘값’을 헤아려 보았다. 내 마음가짐과 일상의 언행은 수행자의 본분에 합당하고 명징하게 처신하고 있는가? 그리고 내 이웃에게 자비를 실천하면서 환희롭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보게 되었다. 그날 한 줄의 글이 주는 성찰과 여운은 이렇듯 깊고도 넉넉했다.

 

  지난해 많은 연하장과 문자 인사를 받았다. 인쇄된 글에는 한결 같이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 “한 해 동안 보살펴 주신 성원에 감사드리며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원하시는 일 이루십시오.” 어떻게 그리 많은 사람이 같은 말을 쓰고 있는지, 그저 ‘다수의 일치’가 신기했다. 연하장과 문자메시지뿐이랴! 이른바 각계의 저명인사와 종교계의 신년사, 여느 행사의 격려사와 축사에도 공감과 울림을 주는 말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온갖 수사와 주장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말이 말의 길을 잃고 있는 것 같다. 가슴을 시리게 하는 말, 나를 돌아보게 하고 부끄러움에 눈 뜨게 하는 말, 메마른 가슴을 적시는 감동의 한마디, 그리고 우리 지구별 한 가족이 가야할 길을 열어 주는 말이 그립다.

 

  그럼 우리 불교 집안의 말을 살펴보자. 많은 불자들이 스님들의 법어와 법문에 적잖은 불만을 가지고 있다. 해독하기 어려운 한문 문장의 법어는 물론 이웃의 관심과 바람을 벗어난 매우 ‘한가한’ 주제가 많다. 아직도 중국 당송 시대의 상징과 비유로 대중을 어리둥절하게 한다. 모호한 말씀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면서 모호한 권위를 누리면서 모호하게 살아간다.

 
  이렇게 말다운 말이 그리운 시절, 마음과 통하는 ‘말’이 절실한 때에, 박노해 시인의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를 인연하게 됐다. 하룻밤을 꼬박 새워 단숨에 읽었다. 내 경우 시는 아껴가며 한 편씩 꺼내어서 소리 내어 읽고 외우며 음미한다. 그런데 박 시인의 300여 편의 이번 시들은 흥분과 감동으로 단숨에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알다시피 현장 노동자였던 박노해 시인은 1984년,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을 출간한 이후 온갖 고난과 질곡의 삶을 살아왔다. 그런 그가 2000년부터 사회적 발언을 삼가고 ‘생명·평화·나눔’을 기치로 한 ‘나눔 문화’를 설립했다. 그리고 세계 분쟁의 지역을 찾아다니면서 그들의 삶을 흑백 필름과 언어에 담았다. 최근 시집에 실린 시들은 분쟁과 고통의 현장에서 보고 듣고 손잡고 눈물 흘리며 가슴에서 ‘솟구쳐’ 길어 올린 말의 사리들이다.

 

  300여 편의 시를 꼼꼼히 읽은 이후, 나는 이웃의 사람들에게 이 시집이 현대문명교과서이며, 아울러 대승경전이라고 말한다. ‘선설(善說)이 불설(佛說)이다’라는 말이 대승경전에 있다. 이는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든지 이치에 합당하고 모든 생명들이 안락을 누리게 하는 말은 설사 불경과 성경에 실려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곧 붓다와 예수의 말씀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박노해 시인의 시들은 오늘의 <법구경>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시인의 시 한 줄 한 줄의 행간에서 대승보살의 정신과 실천에 대해 생생하고 절실한 법문을 들었다. 보살의 뜨거운 자비와 호흡이 내 몸의 실핏줄까지 흘러오는 전율을 느꼈다.

 

 그가 밥을 구하러 가네 / 빈 그릇 하나 들고 / 한 집 / 두 집 / 세 집 / 밥을 얻으러 가네

 일곱 집을 돌아도 / 밥그릇이 절반도 차지 않을 때 / 그 사람 / 여덟 번째 집에 가지 않고

 발걸음을 돌리네 / 일곱 집이나 돌았어도 /음식이 부족하다면 / 그만큼 인민들이 먹고살기 어렵기에 / 그 사람 / 더 이상 밥을 비는 일을 멈추고 / 나무 아래 홀로 앉아 반 그릇 밥을 꼭꼭 / 눈물로 씹으며 인민의 배고픔을 느끼네

 -구도자의 밥 -

 

  나는 처음 이 시를 대하면서 내면의 충격을 받았다. 내 인식의 오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붓다와 그 제자들의 탁발에 대해 교육 받은 것은 걸식을 통해 무소유 정신을 구현하고, 적은 소유로 자족하며, 겸손과 하심의 마음을 간직하고, 인욕의 힘을 기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한 그릇이 밥 속에서 당대를 같이 살아가는 민초의 배고픔과 핍박, 나아가 그들의 눈물과 염원까지를 온몸으로 담아내고 있다. 시인은 문명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온갖 모순과 억압, 분쟁과 불평등의 21세기 지구촌의 절규에서 가득 채워지지 않은 붓다의 밥 그릇 속의 눈물을 본 것이다.

 

 ‘한 알의 씨앗 속에 우주가 담겨 있다’며, 화엄의 일즉다(一卽多)의 중중무진한 법계연기를 운운하는 우리지만, 농부가 피와 땀으로 만들어내는 밥 한 그릇에서 그들의 고단한 삶과 바람을 절실하게 읽어내는지를 물어본다. 온갖 이론과 학설을 끌어들여 연기법의 심오함을 말해도 어찌 이 시 한편이 주는 설득과 감동에 미치겠는가.

 

 문풍지 우는 겨울밤이면/ 윗목 물그릇에 살얼음이 어는데/ 할머니는 이불 속에서/ 어린 나를 품어 안고/ 몇 번이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네/ 오늘 밤 장터의 거지들은 괜찮을랑가/ 소금창고 옆 문둥이는 얼어 죽지 않을랑가/ 뒷산에 노루 새끼들은 굶어 죽지 않을랑가/ 아 나는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낭송을 들으며 잠이 들곤 했었네 (후략)

 - 그 겨울의 시 -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익숙하게 한다. ‘중생이 부처다.’ ‘중생이 아프니 보살이 아프다.’ ‘세간이 곧 출세간이다.’ ‘중생공양이 제불공양이다.’ 이렇게 대승경전을 능숙하게 인용하면서 보살의 위대함을 찬탄한다. 그러나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느끼는 것은 다르다. 비록 학습 받지 못한 시골의 우리 할머니들이었지만 생명에 대한 안쓰러움에 차마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는 보살의 절절한 동체대비심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한다. 이에 비해 복잡한 교리체계로 대승과 보살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우리가 너무도 부끄러울 뿐이다.

 

  그리고 ‘감사한 죄’에서 시인의 팔순 어머니는 새벽녘에 혼자 흐느끼신다. 젊어서 홀몸이 되어 온갖 노동과 가난으로 살아왔지만, 어려움 속에서 도움을 주는 이웃이 많았음에 감사의 마음으로 살아왔노라고. 그리고 자식들이 정의롭게 살아가고 파출부 일자리라도 끊이지 않았음에 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살아왔노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렇게 착하고 착한 팔순의 노모가 새벽녘에 참회의 흐느낌을 토해낸다. 연유는 다름 아닌 자기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만족과 감사의 기도만 드리고 산 것이 크고 큰 죄란다.

 

 ‘다른 사람들이 단속반에 끌려가 벌금을 물고/ 일거리를 못 얻어 힘없이 돌아설 때도/민주화운동 하던 다른 어머니 아들딸들은/ 정권 교체가 돼서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어도/ 사형을 받고도 몸 성히 살아서 돌아온/ 불쌍하고 장한 내 새끼 내 새끼 하면서/ 나는 바보처럼 감사기도만 바치고 살았구나/ 나는 감사한 죄를 짓고 살았구나.’

 

 시인의 어머니는 새벽녘 묵주를 손에 쥐고 이렇게 ‘감사한 죄’를 고백하고 있다. 아, 보살은 인욕과 자족을 넘어 자신의 곁과 자신의 아래를 살펴 같이 아파하고 위로하고 힘이 되어야 하는 것임을….

 

 그렇다면 오늘 나는 어떤 죄를 고백해야 하는가? 삭발과 독신이라는 형색으로 권위를 누린 죄, 몇 가지 계율을 지키고 수행한다는 형식과 명분으로 존경을 받은 죄, 권력과 재물에 욕심 없이 살아간다고 청정함을 자부한 죄, 설법과 수련회 지도로 나름 밥값을 한다고 자위한 죄, 남보다 열린 정신으로 시대와 호흡한다고 자만한 죄. 시인의 어머니의 새벽녘 흐느낌을 들으며 나는 공허한 관념에 묶이고 하심과 자족에 안주한 내 삶의 소승을 보았다.

 

  박노해 시인의 시에서 나는 붓다의 속울음을 들었으며 보살의 뜨거운 비원의 손길을 체감했다. 하여, 말이 울음이 되고 다순 체온이 되어 사람에게 위로와 꿈을 주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모두가 공감하고 감동하는 말은 복잡하고 정교한 이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그 사람의 삶의 모든 과정에서 탄생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울림을 주는 말은 짐짓 생각하고 꾸며낸 것이 아닐 터! 그래서 모두가 행복한 길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서, 뭇 생명의 소리를 듣는 현장에서, 그들에게 응답하는 길을 모색할 때 말의 씨앗은 움틀 것이다. 그리고 그가 가고 있는 길 위에서 말은 탄생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참삶이 터를 잡기 위해서 우리의 말이 혁명을 준비해야 할 때가 아닌가? 사회와 역사에 응답하는 말의 탄생을.

 

  ‘목마르면 물마시고 졸리면 잠자는 것이 도이다’라고 말한 옛 사람의 말을 이어 대승보살의 말을 출생 시키자. ‘자유와 평화에 목마른 자에게 자유와 평화를 주고, 잠이 부족한 노동자에게 달콤한 잠을 주고, 일 하고자 하는 자에게 일자리를 주는 것이 도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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