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는 없지 않은가?(요한 7,40~53).”
출조를 앞둔 어떤 어부는 아침식사를 마쳤는데 아내가 실수로 넘어져 밥상을 엎었습니다. 밥그릇이 깨지는 것을 본 어부는 갑자기 배를 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어 안가겠다고 했습니다. 뱃꾼이 부족해서 임시로 누군가를 데리고 떠난 고깃배가 그만 뜻밖의 풍랑을 만나 전복되어 모두 변을 당하고 말기도 합니다.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특별히 그런 금기시 하는 일들이 아주 많습니다.
어떤 이는 관광을 떠나는 날 아침 시집 간 딸이 병원에 입원했다는 연락을 받고 관광을 못가게 되었는데 그날의 관광버스가 낭떠러지에 전복되어 큰 사고를 당한 일을 경험한 이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꿈자리가 너무 사나워서 그날 할 일에 신중을 기하거나 뒤로 미루거나 하기도 합니다.
도모하려는 일을 앞두고 금기시 되어 온 사물을 대하거나 혹은 평상시에는 흔하지 않은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경우로 있고 그것이 내 판단에 영향을 주어 생사가 갈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지하철 공사로 도심 한 가운데 도로가 푹 꺼졌는데 그 순간에 그곳을 자나던 단 한 대의 승용차가 떨어져 사고를 당했습니다.
어쩌면 그럴 수가 있을까요? 집에서 조금만 일찍 나가거나 늦게 나갔어요, 오던 중에 잠시 구멍가게만 들렸어도 그 순간을 면할 수 있었는데 딱 그 순간을 만난 것은...물론 우연이지만, 그러나 그에게 그 순간을 피할 수 있게 하는 어떤 것들이 한 두가지 이산 개입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참 이상합니다. 사람의 운명에는 어떤 것들이 개입해 들어와서 운명을 바꾸어 놓습니다. 죽게 되어 있는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멀쩡한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징표! 일상의 삶 안에서 사소한 일에서 자신도 알 수 없는 어떤 징표를 본다는 것은 영적인 감성이 예민한 이들에게 특별히 드러납니다. 사람마다 감성과 신비적 영감의 영접력이 다릅니다. 그래서 똑같은 사물을 보고 느끼는 감수성이 다릅니다.
그런 일들에 대하여 우연에 대하여 너무 소심한 생각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과학주의로 살아가는 이들도 어떤 불길한 예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신적 생각으로 무시하고 자기 경험과 신념에 따라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일반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인에게는 미신이 아니라 하느님의 어떤 개입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한 마음과 겸손함을 지닌 신앙인은 자신을 믿기 보다 자연의 섭리와 초월적 세계의 차원을 존중하는 겸손함이 있기 때문에 신비적 감성에 예민하고 겸손되게 판단합니다.
예수님을 재판하던 날 아침 빌라도의 아내는 “어제 밤 꿈자리가 너무 사나왔으니 그 예언자의 일에 개입하지 마세요” 하고 남편에게 충고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면서도 자꾸 아내의 말이 생각나서 극형에 처하는 일은 피하고 싶어 하는 장면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빌라도에게 개입해 오는 하느님의 손길이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사형을 선고해 놓고서는 손을 씻는데 하느님의 징표를 씻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을 기소한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 은 예수님을 체포하여 오라고 보낸 병사들이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과 인품에 감화되어 그냥 돌아왔는데 “왜 잡아오지 않았느냐?” 하고 묻는 말에 “그분처럼 말하는 이는 지금까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의회의원 니코데모도 “예수란 사람의 말과 그가 한 행적들을 좀 더 알아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다.”고 제안했으나 대사제들은 갈릴래아에서 메시아가 나온다는 예언서는 없다고 일축했습니다. 인간의 잘못된 신념이 하느님을 죽이게 했던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예수님을 기소하여 제거하려던 대사제와 율법학자들의 모사에 대한 제동을 거는 하느님의 개입이었고 징표였습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하느님의 징표를 보지도 느끼지도 못하고 자신들의 신념만을 믿고 관철했기 때문에 그만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처형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저지르고 말았던 겁니다.
세상은 우주의 원리에 따라 운행되며 우주만물은 서로 유기적 관계로 존재합니다. 세상 모든 일들은 칼로 쪼개 놓듯이 단절적으로 일어나는 독립적 현상이 아닙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저것이 되고 그 저것이 또 다른 원인이 되어 이것이 됩니다. 세상의 모든 행복과 불행, 슬픔과 기쁨이 그렇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인드라망’이라고 합니다.
나에게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은 내 주변에 얼쩡거리는 일들 가운데 예시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내가 생각하고 도모하는 일의 성공과 실패가 이미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이 운명으로 이미 결정되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징표를 읽고 느끼고 그에 따라 신중하고 과감하고 물러서고 파악(把握)하는 형태에 따라 수정이 되고 확대가 됩니다.
세상은 겸손하게 그리고 하느님의 의지에 합일되어 살아가는데 오류를 피할 수 있습니다. 일어나는 일에 대해 겸허히 바라보고 징표를 느끼면서 그 결과를 섭리로 고백하는데 천상의 지혜를 만날 수 있게 됩니다. (2012. 3. 24) *
박기호 신부
* 이 글은 박기호 신부의 산위의 마을(http://www.sanimal.org)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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