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교도인 듯 해 믿었더니 눈 뜨고 코 베여
슬리퍼칸을 2등석이라 속여 표값 6배 덤터기
그 때 비하르요가대학에서 함께 탈출했던 한국 청년이 있었다. 그는 인도가 초행길이어서 나의 공동체-종교 순례에 동행하고 싶어 했다. 난 ‘어서 그대 자신과 마주서라’는 카비르의 말대로 동반 여행이 주는 안전과 즐거움 등 많은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 뒤로 얼마나 처절한 고독이 기다리고 있는 줄 상상도 못한 채 난 그를 혼자 떨어뜨려 놓는다는 게 너무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그 시크교인에게 안내를 맡기기에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호객꾼에게 이끌려 간 곳 ‘아뿔싸’
마날리에 들어서니 볼만한 축제가 기다리고 있다. 구루 나낙의 사진과 꽃으로 장식한 차를 앞세우고 악단과 수많은 신도들이 온 거리를 뒤덮은 채 행진한다. 신도들은 시크의 찬송가인 샤바드를 노래하며 여자들은 꽃을 뿌린다. 곳곳에서 폭죽이 터진다. 차는 앞으로 갈 수도 없다. 모든 축제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나낙의 탄신인인 11월 25일을 맞아 3주간 경전인 구루 그랜트 사히브를 쉬지 않고 봉독하고 드디어 거리 축제에 나선 것이다.
이들은 주민들과 지나는 모든 이에게 자신들이 만든 식빵과 짜이 등 음식을 성대히 대접했다. 세 시간 동안 차분히 축제를 즐기며 음식을 즐겼다. 나낙 덕분에 배부르게.
내가 세 번째 시크교인을 만난 것은 다시 뉴델리였다. 드디어 히말라야 순례를 마치고 새벽 4시에 뉴델리에 도착해 간디아쉬람이 있는 인도 중부 와르다로 가는 기차표를 알아보고 있었다. 믿음직스런 시크교인 친구가 운영하는 여행사가 있는 메인 바자르가 10분 거리에 있었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어서 문을 열었을 리 없었다.
역 구내에서 표를 문의하니 바깥 창구로 나가보란다. 그냥 바닥에 앉아 기차표 안내 책자를 뒤적이는데 조그맣고 영리하게 생긴 20대 남자가 “이곳은 앉는 곳이 아니니 밖으로 나가”란다. 자기가 안내해주겠다고 했다. 안내원으로 보인다.
그가 나를 길 건너 식당 위에 있는 인터내셔널여행사로 안내했다. 또 ‘인터내셔널’이라니. 분명히 기차역 사무소가 아닌 사설 여행사였다. 안내 책자도 이런 호객꾼들에 의한 사기를 경고했다.
되돌아 나오려다 보니 사장인 듯 테이블에서 활짝 웃고 있는 이 앞엔 구루 나낙의 사진이 걸려 있는게 아닌가. 터번은 쓰고 있지 않았지만 시크교인인 듯 했다.
빨리 표 구해 김치하우스에서 라면 먹고싶은 마음에…
시크교인 중에는 터번을 쓰지 않는 이들도 있다. 1980년대 들어 시크교인들은 펀잡에서 분리 독립 또는 자치주 설립 운동을 벌였다. 1984년 6월 당시 인디라 간디 수상은 시크교인들이 생명처럼 여기는 성소인 암리차르의 황금사원을 군화발로 짓밟고 325명의 시크교인을 사살했다. 인디라 간디 수상은 4개월 뒤 자신의 경호원들에 의해 총에 맞아 암살됐는데, 그 경호원들은 황금사원 사건에 앙심을 품은 시크교인들이었다.
이 사건 뒤 성난 힌두교인들이 터번만 쓴 사람을 보면 잡아 죽여 무려 2만명의 시크교인들이 짧은 순간에 목숨을 잃었다. 이 때부터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터번을 벗는 시크교인들이 생겨났다.
30대 젊은 사장의 얼굴이 구루 나낙의 사진을 닮기까지 했다. 일단 요금이나 물어보자는 생각에 앉았더니 맛있는 짜이를 가져왔다. 900루피에 표를 구해주겠다고 했다. 예상보다는 비싸지 않은 가격이어서 안심했다. 한 참 있더니 대기 순서 109번이란다. 지금은 선거철이어서 하등칸 표가 모두 매진이니 1,2 등석 표를 사라고 했다.
표 값이 자그마치 2250루피란다. 너무 비싸다고 했더니 “지금은 가도 표가 없다”며 “어차피 표를 못 구해 델리에 머물려면 숙박비가 추가로 들지 않느냐”고 했다. 좀 비싸더라도 지금 가는 게 나을 거라는 것이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이 기회에 2등석도 타보자며 2250루피를 줬다. 기차 시간은 오전 11시30분. 4시간도 더 남았다. 어서 빨리 표를 받아 메인바자르의 김치하우스에 가서 신라면 한 그릇 먹을 생각이 굴뚝이었다.
출발 시간 임박해서야 갖다줘 후다닥 타고보니…
그런데 기다려도 기다려도 표는 오지 않았다. 표를 구하는 게 쉽지 않다는 게 시크 사장의 설명이다. 사무실엔 한 영국인 남자가 또 그 호객꾼의 안내로 모셔져왔다. 다람살라 가는 버스비는 300루피면 되는데, 1500루피라고 했다. 안내책자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나 같은 먹잇감들이 수도 없이 낚싯밥에 걸려들고 있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으니 돈을 돌려달라고 했다. 그러나 표를 구한 사람이 연락이 안 된단다. 곧 표를 구해서 올 테니 기다리란다. 시크교인 사장은 “당신은 생각이 너무 많아 의심한다”며 점잖게 충고까지 해준다.
배를 쫄쫄 굶고 기차 시간도 다 돼간다. 기차가 떠날 시간 20분 전 드디어 사장이 표가 들었다는 봉투를 내밀었다. 복잡한 델리의 기차역에서 인파를 비집고 기차를 타기엔 아슬아슬한 시간이었다. 그가 붙여준 사람의 안내로 기차가 떠나기 직전 간신히 기차에 올랐다.
기차에 앉아 표를 자세히 보니, 슬리퍼 클래스 표에 요금은 377루피라고 쓰여 있다. 377루피 표를 2250루피에 바가지를 씌운 것이었다. 그는 미리 표를 갖고 있었지만 내가 표를 살펴 볼 여유도 없는 때에서야 표를 준 것이다.
우호적인 편견도 편견이다. 편견의 대가였다. 어찌 어느 종교인은 신뢰할 수 있고, 어느 종교인은 신뢰할 수 없겠는가. 어찌 좋은 종교가 따로 있고, 나쁜 종교가 따로 있으랴. 어찌 힌두교가 따로 있고 이슬람이 따로 있느냐고 했던 나낙의 말처럼.
잠시 떠나는 기차에서 뛰어내려 나낙의 사진으로 얼굴을 쥐어박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이방인이 먼 미래에 델리에 와서 속임을 당할 것을 미리 알았을까. 카비르가 남긴 시로 위로를 삼고 약을 삼았다.
속이려 들지 말고 언제든지 속을 준비를 하라.
속는다고 해서 잃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지만 남을 속이면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이 기사의 자세한 내용은 <인도오지기행>(한겨레출판 펴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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