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 천국’ 고아 팔로렘 해변
강행군으로 만신창이, 마음 밥보다 몸 밥 우선
싼 민박 찾아든 게 보배…게·새우 한솥단지씩
인도에서 돼지 신세만큼 서러운 것도 드물다. 인도의 도시는 사람만 넘쳐나는 것이 아니라 소와 개, 돼지들이 함께 넘실댄다. 그런데 소와 개는 도로위에 버티며 사람과 맞먹으려 드는데 반해 돼지들은 제 신세를 아는지 주로 시궁창을 헤매고 돌아다닌다.
소는 힌두교에서 브라만의 권위를 상징하면서 가장 신성시하는 동물이다. 그렇다고 인도의 소 신세도 생각만큼 좋은 것은 아니다. 젖으로 인도 백성의 주린 배를 채워주면서 죽도록 짐실어 나르고 밭가느라 실은 고생보따리다.
삼겹살에 소주 한잔? 인도의 돼지는 시궁창!
개는 혓바닥과 꼬리를 비장의 무기로 친밀과 충성을 과시하며 부스러기라도 얻어먹을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그래서 소나 개는 돼지만큼 배를 곯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도 돼지는 저 먹을 것을 스스로 찾아내지 않으면 누가 따로 먹을 것을 챙겨주지 않는다. 소는 초식성이어서 먹을 것으로 사람과 경쟁하는 상대가 아니지만, 돼지는 잡식성으로 사람과 식성이 같다. 사람 먹을 것도 부족한 인도에서 돼지 먹을 게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허구한 날 주린 배를 시궁창 바닥에 깔고 그래도 음식 냄새가 배어 있는 시궁창 물을 마시곤 하는 것이다. 기차 여행을 하다보면 철로엔 늘 돼지들이 코를 킁킁대고 있다. 승객들이 먹다가 차장 밖으로 던진 음식물과 과일 껍질들이 제 앞으로 떨어지는 날이 돼지우리에 볕드는 날이다.
그러나 돼지 숫자가 워낙 많다보니 기차 창문에서 제 입속으로 음식 떨어지는 것도 골프에서 홀인원만큼이나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철로 위 돼지들은 거의 예외 없이 아이 열 명 낳은 여인의 젖가슴처럼 배가 축 쳐진 채 힘없는 걸음을 옮긴다.
내가 인도에서 10년 넘게 살고 있는 한국인 집에 방문했을 때 “삼겹살에 소주 한 잔 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그는 “인도 돼지들은 부패한 음식들과 비닐 등 잘 소화도 안 되는 것들을 마구 먹어 한국 돼지 고기맛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했다.
포르투갈 1961년까지 450년간 지배해 가장 서구화한 곳
내가 그렇게 불쌍한 돼지들을 기아선상에서 구제해 준 것은 고아 팔로렘 해변에서다. 내가 여행자에서 돼지 자선가로 바뀐 것은 아니다. 내 배가 뜨뜻해지면서, 내 주변의 돼지들도 자동으로 배가 뜨뜻해진 것이다.
고아는 지상 천국으로 알려진 곳이다. 1510년 들어와 1961년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포르투갈의 장기 지배로 인도에서 가장 서구화한 곳인데다 기독교 인구가 38%로 인도에서 기독교가 주요 종교인 유일한 주다.
그래서 서양에서 온 여행자들이 많이 찾았고, 1970년대엔 히피들과 젊은 여행자들, 마리화나 애연가들의 낙원으로 여겨졌다.
무려 100km의 아라비아해안을 따라 수십여곳의 천연 해수욕장이 있는 고아에서 내가 가장 남쪽편에 있는 팔로렘으로 간 것은 아직까지 여행자들에게 가장 덜 알려져 조용한 곳이란 점 때문이었다.
이곳도 안내 책자들이 ‘파라다이스’로 소개하면서 단 2개 뿐이던 해변 식당이 20여개로 늘어가는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해변에서 남녀가 키스하는 장면 하나 볼 수도 없고, 밤이면 너무나 조용했다.
막 도착해선 해변의 식당만 보고 해변은 번잡스러울 것 같아 해변에서 50m 정도 떨어진 마을 안 민박집을 얻었다. 내가 고아에 간 것은 어린 시절 황룡강에서 배운 수영 실력을 뽐내려는 것도 아니고, 해변의 여인이나 마리화나를 구경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오직 쉬며 몸을 추슬러야한다는 절박함이 있었기에 조용히 쉴만한 곳을 물색했다.
가정부처럼 일만 해도 늘 성모 마리아처럼 미소
해변 게스트하우스들은 최소 300루피, 많게는 1천루피 이상을 요구했는데, 내 방은 175루피 짜리였다. 싼게 비지떡이라는데, 싼게 보배일 줄이야.
집 앞에 십자가가 세워진 민박집에서 가장 먼저 나를 반긴 것은 돼지들이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네 마리?. 집 주위를 오가는 돼지들은 이렇게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누운 어미돼지 배 위로 고물고물 모여든 새끼들만 여남은 마리나 됐다. 저쪽에서 또 여남은 마리의 새끼 돼지들이 어미 돼지의 젖을 빠는데 귀찮은 어미 돼지는 참다못해 얼른 바닥으로 엎드려 버렸다. 쥐방울만한 돼지 새끼들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이 엄마돼지를 원망스럽게 바라보더니, 곧 바로 집착을 떨구고 얼른 뒤돌아서 다시 쓰레기장으로 돌진했다.
야자수들 사이에 지어진 민박집의 본채는 1층짜리 콘크리트 양옥집이고, 바로 몇 발자국 오른쪽엔 고아식으로 야자수로 엮어 지은 부엌 채가, 왼쪽엔 물을 길어다놓고, 허드렛일을 하는 헛간채가 있다.
부엌에서 한 여인이 나오는데, 뚱뚱하면서도 평안하게 보였다. 프렝키다. 난 처음 프렝키의 나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항상 웃통을 벗고 사는 살 찐 남자와 다정스럽게 어울리기에 둘을 부부로 생각했다. 나중에 보니 얼마나 망측하던지. 웃통 벗은 남자는 그의 아버지고, 프렝키는 외동딸이고 이제 스물두살에 불과했다.
프렝키가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는 병으로 세상을 떴다. 그에겐 오빠가 둘 있는데, 큰 오빠는 외항선을 타고 있고, 둘째 오빠는 이곳 해변에서 식당을 한다. 그리고 둘째 오빠의 부인과 둘 사이의 한 살배기 아들 브레스톤 등 다섯식구가 함께 산다.
그의 새언니는 밖에 잘 나오지도 않고, 부엌일과 손빨래 등은 프렝키가 도맡아 했다.
“왜 혼자만 일해요. 프렝키?”
“언니는 브레스톤 외에는 관심이 없어요.”
가정부처럼 일만하는데도 프렝키는 늘 그가 모시는 성모 마리아 같은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홀아버지 밑에서 일찍부터 부엌살림을 도맡아 해온 그였다. 그래도 “빨리 시집 가서 나의 아이를 낳고 싶다”는 말로 이 곳 생활을 벗어나고 싶은 심경을 나타내기도 했다.
밥하고 빨래하고 남은 찌꺼기들을 돼지에게 주는 것도 모두 프렝키 차지였다. 그래서 돼지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사람도 단연 프렝키다. 그야말로 수많은 돼지들의 엄마였다.
프렝키가 부엌에서 나오면 돼지들은 금세 눈치 채고 그를 졸졸 따라 나섰다. 워낙 알뜰한 프렝키여서 실은 돼지들이 챙길게 별로 없지만.
눈 뜨면 가는 곳이 피시마켓, 신선한 생선들 어찌나 싸던지!
여러달 동안 거의 매일처럼 오토릭샤를 타고 인도의 시내를 누비던 나는 심한 기침이 벌써 한달째 떠나지 않고 있었다. 인도의 오토릭샤는 엄청난 매연을 뿜어대며 달리는데, 승객은 입마개를 하지 않으면 그 매연을 고스란히 마실 수밖에 없었다.
인도인들도 입마개 안하고 잘 만 사는데, 나라고 못할 것 뭐있느냐는 막연한 생각으로 입마개도 안하고 다녔다. 난 기관지쪽이 약해 서울에 살면서도 공기 좋은 산 밑만을 찾아 이사 다녔는데, 이곳에서 기어이 사고가 터진 것이다.
얼마나 기침이 심한지 결핵이나 폐병에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 정도였다. 이미 인도에 처음 올 때 73kg이던 몸은 63kg으로 빠져 있었다. 거의 끼니조차 제 때 잇지 않고 여행을 계속한 탓이었다.
우선 영양 보충이 시급했다. 팔로렘에 온 것도 그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아침에 눈을 뜨면 매일 오토릭샤를 타고 출근하는 곳이 30분 거리의 차우디에 있는 피시 마켓이었다.
처음 피시마켓에 가선 눈이 휘둥그레졌다. 신선한 생선들이 어찌나 싸던지. 150루피만 주면 주먹보다 더 큰 살아있는 게를 한 솥이나 살 수 있다. 또 100루피(2천5백원 가량)면 살이 손가락보다 큰 새우도 한 냄비를 주었다.
내가 이렇게 저렴한 값에 몸을 추스르고 다시 여행길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마음씨 착한 프렝키 덕이었다. 장삿속에 물든 사람 같으면 오빠네 식당을 이용하라고 할 법하지만, 그는 “차우디 피시마켓에서 생선을 사 자기 부엌에서 끓여서 먹어라”며, 솥단지를 빌려주고, 가스까지 쓰게 했다.
그렇게 착한 프렝키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 난 차우디에서 사온 게와 새우의 3분의1 가량을 프렝키에게 덜어주고, 나머지는 프렝키가 준 솥에 넣고 끓였다.
돼지들 눈치 보여 다 발라먹는 야박한 짓 못해
게살과 새우살을 고추장에 찍어먹는 그 맛이란!. 그 큰 솥단지를 방에 들고가면 프렝키는 아주 흥미로운 얼굴로 쳐다본다. 정말 그 많은 게와 새우를 혼자 다 먹으려느냐는 듯이.
그것을 한꺼번에 먹을 수는 없기에 남겼다가 오후에 먹고 솥단지를 갖고 나오면 프렝키는 다시 그 솥단지가 정말 비었는지 몹시 궁금해 했다. 내가 가지고 나온 솥단지에 대한 관심을 보인 것은 프렝키만이 아니었다.
돼지들이야말로 가장 큰 관심을 보였다. 늘 먹을게 없어 쓰레기통을 뒤지고, 흙을 파헤치는 일로 매시간을 소일하는 돼지들은 내가 솥단지를 갖고 나가면 거의 국빈대우였다.
돼지식으로 사열을 해서 나를 반겼다. 돼지식은 질서는 없고, 총 대신 주둥이를 앞 다투어 앞으로 빼는 것이다. 내가 먹은 잔재인 게와 새우 껍질은 각질이 단단해 먹을 게 없을텐데도 이들의 쟁탈전은 치열하다 못해 처절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뿐이었다. 곧 아무 것도 남아있지않은 것을 안 순간 돼지들은 배가 여전히 고픈데도 배고픈 철학자처럼 굴지 않고 배부른 돼지처럼 태평하게 노닐기 시작했다.
돼지들은 어디를 가나 방목돼 아무데나 다니지만 프렝키는 어느 돼지가 누구집 돼지인지 주인들은 안다고 했다.
나는 건질 것도 없는 쓰레기장만 뒤지는 돼지들에게 미안해 다음부터는 게와 새우의 살을 다 발라먹는 야박한 짓을 할 수 없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이 기사의 자세한 내용은 <인도오지기행>(한겨레출판 펴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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