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리 허공 외줄 케이블카는 더더욱 아찔 ‘사양’
어떻게 건넜는지 팔순 할머니는 넉넉한 미소만
어렵게 출입 허가까지 얻어왔는데. 어떻게 온 길인데,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우리는 무너진 산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패인 산은 거대한 악어의 아가리같았다.
만약 오던 길로 되돌아가서 다른 길을 통해 레콩피오까지 가자면 밤낮으로 2~3일을 달려야 했다. 불과 무너진 4km 때문에 수백킬로의 절벽길을 또 돌고 돌아야 하는 것이다.
불과 4km 앞에 두고 돌아가면 다시 수백km 절벽길
결단의 순간이 다가왔다. 우린 무너진 산을 건너기로 했다. 비상 비행기나 헬리콥터가 있는 게 아니었다. 그냥 걸어서 넘어가보자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자일이나 로프와 같은 암벽 장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일단 청전 스님을 믿어보기로 한 것이다. 난 암벽등반가보다 약초꾼이나 나무꾼을 산사람에 가까운 이로 본다. 또 힘들게 에베레스트를 등정하는 등반가도 존경스럽긴 하지만, 히말라야의 구도자들에게서 더 산의 내음을 느낀다. 정해진 길, 준비된 장비 없이도 전인미답의 길을 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리 근육이 튼튼해서 산을 잘 타느냐 마느냐와는 별개의 문제다. 다람살라에서 라닥은 차와 비행기를 갈아타고도 며칠이 걸리는 곳이다. 그러나 청전 스님은 다람살라에서 라닥까지 히말라야의 큰 산 7개를 넘고 넘어 걸어다닌 기적의 사람이니.
우리는 무너진 길을 정면 돌파하고 차는 운전기사 혼자서 2~3일간 돌아 산 건너편으로 오라고 했다. 그런데 정작 운전기사 시티가 제동을 걸었다. 지금까지 상당히 용감해 보이던 그가 혼자서는 무서워 못가겠다는 것이었다. “밤에 도로에 호랑이나 표범이 나타나면 어떻게 하느냐”고 말했지만, 아무래도 혼자서 절벽 위를 달리려니 새삼 무서웠던 모양이었다. 저승길도 동행이 있다고 여기면 덜 무서운 법이니 이해가 갈 만했다.
그래서 고민 고민을 하다 이 절개지를 건너는 것도 위험 천만일 테니 두 사람은 차를 타고 함께 돌아오게 하기로 했다. 청전스님과 나, 그리고 두 노승만 건너기로 한 것이다. 그러자 시티는 오히려 하룻밤 새 마음을 다 잡았는지 혼자 돌아오겠다고 했다.
일단 먼 길을 떠나는 시티를 보낸 뒤 당카르곰파의 차를 빌러 타고 길을 떠났다. 타보에서 반나절 이상을 달리니 과연 큰 산 중턱에서 까마득한 아래 계곡까지 허물어져 내린 절개지가 나타났다.
그곳에선 인도 군인 100여 명이 있었는데, 이제 막 복구 작업을 시작하려는 듯 했다. 1년이 걸릴지 몇 년이 걸릴지 모를 복구공사가 끝날 때까지 양쪽 지역 주민들이 겪어야할 고통이 얼마나 심할까. 끊어진 도로 양쪽에 긴 케이블을 메달아 놓고, 그 케이블로 음식물과 공사 자재 등을 보급 받고 있는 중이었다.
이어 짐을 싣고도 아슬아슬해 보이기만 한 그 화물용 케이블카를 인도 병사가 타고 오는 게 보였다. 우리도 그 케이블카를 탈 수 있는지 인도 군인들에게 사정해 볼 생각을 안해본건 아니지만, 아무리 위험을 감수한 여행이라도 차마 한가닥의 줄로 10리의 허공에 매달려 있는 아슬아슬한 화물 케이블카를 타는 모험은 하고 싶지않았다. 차라리 저 계곡을 걸어서 건너는 게 그래도 생명을 더 연장하는 길인 듯 보였다.
기다리는 손자가 생각났을까, 감자 한 알 꼬깃꼬깃
우리는 무너진 계곡을 어떻게 건너야할지 넋을 잃고 바라보는데, 인도 군인들은 멀쩡하게 생긴 외국인들이 저 험고를 걸어서 정말 넘어가려는 것인가 궁금한 듯 바라봤다.
마치 눈사태로 무너진 것 같은 절개지 저 건너편 멀리서 한 사람이 이쪽으로 건너오려는 듯 무너진 절벽 밑으로 내려가는 게 보였다. 반가웠다. 그가 할 수 있다면 우리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쪽에서 저쪽으로 다람쥐가 다닌 것 같은 작은 발자국들이 있었다. 히말라야의 사람들이 길이 끊어졌다고 반대쪽을 바라보며 발만 구르고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선수’인 청전 스님이 두 노승의 바랑을 뺏어서 걸쳐 메고 앞장섰다. 두 노승도 아무리 노구의 몸이지만 평생 히말라야의 산 속에서 잔뼈가 굵은 몸이었다.
무너진 돌과 모래가 70도 정도의 급경사여서 만약 디딘 돌이나 모래가 미끄러지는 날이면 이 역시 49재가 필요 없는 일이었다. 수백미터 아래 계곡까지 굴러 떨어지던가 돌과 모래 무더기에 묻힐 게 뻔했다.
발자국은 밑으로 밑으로 나 있었다. 무너진 곳을 따라 가야 하니 이렇게 밑으로 갔다가 올라가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한 시간 가량 까마득한 계곡 밑으로 내려갔더니, 청전 스님과 두 노승은 벌써 한참이나 올라가고 있는 게 보였다.
긴장으로 온몸에 땀으로 목욕을 했다. 신발이 더욱 미끄러워 아찔아찔했다. 그런데 오직 한발 한발에만 집중한 순간 어느새 그 계곡을 건너와 있었다. 기적같은 일이었다.
우린 건너편에 서서 지나온 험로를 바라보면서 아침에 준비해온 삶은 감자와 계란을 꺼내 먹었다. 감자가 이렇게 맛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옆엔 80살도 넘어 보이는 할머니가 그 길을 어떻게 넘어왔는지 앉아서 쉬고 있었다. 평생 피죽도 못 먹은 것처럼 야위고 눈이 움푹 파인 할머니에게 감자와 계란을 주었다. 그런데 할머니는 자신은 입에도 대지 않고 저만치 떨어져 앉아있는 할아버지에게 계란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남은 감자는 헌 종이에 꼬깃꼬깃 싸서 주머니에 넣었다. 아마도 멀리 나간 할머니를 기다리는 손자가 생각난 것이리라.
새 것을 주면 할아버지를 주거나 주머니에 넣어 본인은 아무 것도 먹지 않은 할머니를 보니 하나 남은 감자도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았다. 먹다 반쯤 남은 감자를 할머니 손에 쥐어줬다. 할머니는 이번엔 어쩔 줄 몰라 하며 바라보기만 했다. 그랬더니 옆에 있던 사람이 “인도에선 먹다 남긴 것을 주면 큰 실례”라고 했다. 할머니는 결국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할머니는 넉넉히 웃고 있었다.
글 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동영상 장수경 기자
[이 기사의 자세한 내용은 <인도오지기행>(한겨레출판 펴냄)에 있습니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