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목산 장도릉터의 얼음인.
[하늘이 감춘 땅] 중국 선 원류의 사찰 순례
화두선-묵조선, 서로 “고목”-“주물” 비판 치열 수행
천년의 시간과 한국-중국 공간 초월해 이심전심 참선
지난 10~13일 한국의 선객 108명이 중국의 사찰 순례에 나섰습니다. 조계종중앙신도회 부설 불교인재개발원이 마련한 프로그램인 ‘선(禪)의 원류를 찾아’ 나선 이들입니다. 이번엔 불교인재개발원 강좌에서 고우 스님(경북 봉화 금봉선원장)과 무비 스님(부산 범어사 승가대학원장)으로부터 ‘화두선의 지침서’격인 <서장>과 <선요> 등을 배운 이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따라서 선의 시조인 달마대사로부터 6조 혜능대사까지 유적을 돌아본 1년 전 순례에 이어 이번엔 <서장>의 원저자이자 화두선이란 독특한 수행법의 문을 연 대혜 종고(1089~1163)와 화두선의 요체를 간명하게 보여준 <선요>의 원저자이자 우뚝 선 봉우리인 고봉 원묘(1238~1295)가 머무르던 옛터전을 찾아 나섰습니다.
고통의 시대 함께하며 15년 동안 귀양살이도
순례단은 중국 동남부 상하이에서 멀지 않은 영파에 도착해 대혜가 머물던 아육왕사와 천동사를 찾았습니다. 37살에 견성(見性·깨달음)한 대혜는 사실상 화두선이란 수행법의 창시자입니다. 화두선은 “이 뭣고?“, “마른 똥막대기” 등 스승이 던져주는 한마디를 의심하고 의심해서 생각과 분별이 나오기 이전의 근본 존재를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어떤 번뇌나 사리분별조차 용납하지 않고 오직 화두에 일심을 모으는 화두선은 특유의 집중력으로 인한 강력한 에너지와 활발한 기상을 불러오는 듯합니다. 이에 반해 가만히 앉아서 오직 마음을 돌이켜보는 묵조선은 고요하기 그지 없습니다.
대혜는 40대 때 그런 묵조선을 고목나무선이라면서 가차 없이 비판하곤 했습니다. 이에 대해 묵조선 수행자들은 화두선에 대해 주물로 똑같은 모양을 찍어내는 것과 같다면서 주물선이라고 맞받아쳤습니다.
북송에서 남송으로 전환되고, 남송도 금나라의 외침으로 고통받던 와중에 살았던 대혜는 견성 뒤에도 시대와 동떨어져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전파였던 제자들을 둔 때문에 53살부터 15년간 귀양살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귀양살이를 마치고 돌아와 69살에 주지를 맡은 곳이 아육왕사였습니다. 그는 화두선으로 묵조선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묵조선 선사인 인근 천동사의 천동굉지 선사와 상당한 교분을 쌓았습니다. 대혜는 묵조선에 대해 잘못하는 것을 비판한 것이지, 묵조선이라도 제대로 하는 것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순례단을 이끈 고우 스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고봉 선사가 은거하던 천길 낭떠러지 위의 ‘죽음의 관문’ 사관
양의 창자 처럼 끝없이 돌고 돌아 하늘로 올라가 듯
순례단이 이틀째 간 곳은 <선요>의 저자인 고봉 선사가 머물다가 열반한 항저우 인근 천목산이었습니다. 천목산으로 가는 길은 마치 하늘로 올라가는 길인 것만 같았습니다. 양의 창자처럼 끝 없이 돌고 도는 산길을 버거워 하는 소형 버스를 타고 오르고 또 오르다 보니 ‘천목’(天目·하늘의 눈)이란 그 이름이 허언일 것이라고 한 생각은 어느새 뚝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중국 동남부 항저우가 낙원으로 불리는 것은 단지 미인 서시와 서호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이처럼 능히 호랑이가 살 만한 깊고 높은 산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해발 1500미터 고지에 오르니 아직도 눈이 쌓여 있어 완연한 봄날인 산 밑과는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700여년 전에 말년 15년을 이곳에서 살다 간 고봉과 이들은 숨을 나누었을까요. 정상에서부터 걸어 내려가는 오솔길 인근엔 수령 500년이 넘은 삼나무와 전나무들이 하늘에 닿을 듯 솟아 고봉의 기개를 보여주는 것만 같았습니다.
정상에서 20여분을 내려오니 고봉이 머물렀던 개산노전(開山老殿)이 있었습니다. 산도 같은 산이 아니요, 눈도 같은 눈이 아닐 터입니다. 수억년 동안의 무정물이 고봉의 ‘개산’(산문을 열다)으로 이처럼 순례객이 찾는 빛이 되었습니다. 개산노전엔 고봉과 그의 수제자인 중봉선사와 단애선사의 상이 불상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육근(눈, 귀, 코, 혀, 몸, 생각) 경계 밖의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인가요. 고봉의 손엔 보검이 쥐어져 있습니다. 날 선 검엔 귀신은 물론 석가조차 붙을 곳이 없습니다.
고봉 중봉스님앞의 고우스님
자 법명도 중봉이니 수백 겁의 인연 쌓였나
고봉의 수제자 중봉(中峯)은 바로 제 법명이기도 합니다. 6~7년 전 태백산 서암에 홀로 머물고 계신 고우 스님을 찾았을 때 스님께서 제게 준 법명입니다. 불교에선 옷깃만 스치기 위해서라도 5백겁의 인연을 쌓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 분의 법명을 쓰게 된 것도 어찌 인연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가파른 산길을 따라 내려가니 거대한 나무에 둘러싸인 중봉 묘원이 있었습니다. 그 묘를 지나 한참을 다시 내려오니 천길 절벽 위에 한 동굴이 있었습니다. 사관(死關)이었습니다. 그 사관 옆에는 도교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장도릉이 머물던 토굴이 있었습니다. 천하의 고승들이 은거할만큼 기막힌 곳이었습니다.
중봉은 스승 고봉을 평하기를 “천목산이 높다고 하나 고봉에 비하면 오히려 낮고, 18지옥이 험하다고 하나 사관(死關)의 험준함에 비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고우 스님은 “직접 와서 보니, 중봉 스님의 말씀이 허언이 아니다”고 했습니다.
고봉은 천하 사람들이 자신을 떠받들며 찾아들자 천목산으로 숨어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불나방처럼 그를 찾아들었습니다. 고봉은 어찌해서 이 천길 낭떠러지 위로 숨어들어 ‘죽음의 관문’을 설치했을까요. 석가도 끊지 못하는 남의 업장을 어찌 고봉인들 끊을 수 있었겠습니까.
오직 스스로 생사의 사슬을 끊어낸 자만이 이 사관을 날아오를 수 있었을 터입니다. 이번 순례 길을 이끈 고우 스님은 폐의 대부분을 잘라냈으나 고산준령을 앞서 넘어서고, 무비 스님은 5년 전 온몸이 마비돼 깨어나 선(禪)·교(敎)를 초월해 사자후를 토하고 있으니, 어찌 죽고 사는 것이 옛글에만 있다고 할 것입니까. 그러니 스스로 내면을 돌이켜 살활자재(죽고 사는 것이 자유로움)함을 얻지 못한 채 오직 고봉의 빛만을 쫓아오는 불나방들을 고봉이 어찌 달려가 반겼을 것입니까.
천길 낭떠러지 위로 숨어들어 ‘죽음의 관문’ 설치
대나무숲속 경산사
하산만 세 시간 이상이 걸린 천목산 산행의 여독이 풀리기도 전에 오른 경산의 깊이도 천목산보다 오히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습니다. 고우 스님의 절친한 도반으로 천성산에 은거해 사는 상현 스님도 “평생 이렇게 험한 산은 처음”이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차밭 동산이 이어지더니 거대한 산등성이는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대밭 뿐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대밭 머리 800미터 고지에 경산사가 있었습니다. 고봉이 태어나기 75년 전 화두선의 개창자 대혜가 열반한 곳입니다. 대숲 바람 이는 경산사 선방에 들어서니 이 마음 속에 대혜가 깨어나는 듯 모골이 송연했습니다.
평평한 방에 앉아 좌선하는 한국의 선방과 달리 사방 벽 아래로 길게 놓인 마루 바닥에 앉도록 방석이 깔려 있었습니다. 천년 전 대혜의 체취를 그리는 순례객들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하나둘씩 좌정하고 앉았습니다. 그러자 경북 문경 대승사 선원장 철산 스님이 죽비를 잡았습니다. 1년에 두 차례씩 21일 동안 출재가자들이 일체 눕지 않고 참선하도록 용맹정진을 이끄는 투철한 선승의 죽비 소리에 천만 번뇌가 싹둑 잘려나갔습니다.
천년이란 시간과 한국-중국의 시공을 초월한 이심전심의 영롱한 물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참선을 마친 무비 스님은 20여분의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이번 순례 최고의 선물이었다”며 감격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대혜가 말년에 이 깊고 깊은 산에 은거했지만 그는 중생의 마음 길을 끊을 뿐 결코 공부 길을 막는 법이 없었습니다. 세간의 돈벌이와 벼슬길에 평생 찌들어 살면서도 수행해보겠다는 재가자들을 위해 보낸 편지 모음집인 <서장>이 이를 잘 말해줍니다. 대혜는 어떻게든 중생들을 공부길로 이끌기 위해 정성에 정성을 들였습니다.
화두법 수행법의 문을 연 대혜 선사가 머물던 경산사의 선방에서 순례객들이 참선하고 있다.
“내 눈 멀게 했다”는 배은망덕한 말에도 잔잔한 미소만
마지막 순례지는 대혜가 견성한 곳이자 고봉이 ‘잠이 깊이 들어 꿈도 생각도 없고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때에 주인공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결정적 화두를 받은 천녕사였습니다. 그런데 두 선사의 삶에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된 천녕사는 천목산이나 경산과 같은 산중이 아닌 수저우 인근 상저우 시내에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세간의 한가운데에 있었습니다.
견성 뒤에도 15년간 귀양살이를 할 만큼 동시대의 아픔에 함께 하면서, ‘만약 일상 생활을 떠나서 따로 나아갈 곳이 있으면 이것은 물결을 떠나서 물을 구하는 것’이라며 삶 속에서 단박 깨달음을 설파했던 대혜의 삶을 전해주는 상징적 장소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심산유곡도, 선사의 말씀도 마음 밖의 소음일 뿐일까요. 천녕사 순례를 마치고 버스에 오른 전재강 (동양대) 교수가 “큰스님(고우스님)이 내 눈을 멀게 했다”고 말했습니다. 고우 스님으로부터 선을 배워 <서장>과 <선요>의 주해를 단 책을 펴낸 그의 ‘배은망덕’한 말에 고우 스님이 미소 짓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천릿길임에도 털끝만큼도 떨어지지 않은 ‘지름길’을 열어준 경산(徑山·‘지름길’산)이 옛선사의 말처럼 드디어 천리의 시공을 넘어 ‘지금 여기’에서 보여주었습니다.
‘봄을 찾기 위해 세상을 다 돌아다니다 지쳐 돌아와 앞마당에 들어서니 뜰에 매화꽃이 활짝 피어 있구나.’
항저우·상저우/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이 기사의 자세한 내용은 <
하늘이 감춘 땅>(한겨레출판 펴냄)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