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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은 신사를 안고, 신사는 절을 품은 일본

등록 2010-05-18 14:17

강원(승가대학)을 졸업한 지 어느새 이십여 년이 흘렀다. 해마다 한두 번 모임을 통해 동기들의 안부를 확인하고 회포를 나누곤 했다. 4년 동안 한방에서 자고 먹으면서 함께 공부한  까닭에 피차의 살림살이와 성격을 서로 훤하게 꿰고 있는지라 언제 만나도 편안하다. 이제 나름대로 위치를 가진 ‘중진급’이지만, 모였다 하면 귀밑털이 희끗희끗함조차 잊어버리고 학인시절로 돌아가 철딱서니 없이 키득거린다. 그때 있었던 이런저런 에피소드는 두고두고 얘깃거리가 되고 또 들어도 들어도 물리지 않는 우리들만의 ‘원형질’이었다.

 

우리들만의 ‘원형질’로 키득키득

 

올해 모임은 일본 교토(京都) 나라(奈良) 일원에서 가졌다. 졸업 후 처음으로 함께 해외로 나왔지만, 다른 일 때문에 서너 달 전(2010 1월 하순쯤)에 이미 다녀온 코스와 겹쳤다. 덕분에 그때 시간 부족으로 제대로 보지 못한 ‘절 안의 신사(神社)’를 유심히 살필 수 있었다. 신사 안의 절, 절 안의 신사는 흔한 풍경이었다. 가끔 외신에 일본각료의 참배문제로 동아시아가 시끌시끌한 ‘전쟁 신사’인 ‘야스꾸니(靖國) ’의 비장함 같은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절은 신사를 안고, 신사는 절을 품는 그런 모습으로 읽혀졌다.     

청수사( 淸 水 寺 기요미즈데라) 본당 뒤켠과 연이어진 지주(地主지슈)신사는 입구에 주련처럼 붙어 있는 ‘양년기원(良緣祈願:좋은 인연 만나기를  기원합니다)’의 네 마디 속에 모든 게 압축되어 있는 ‘사랑의 신사’였다. 좋은 사람을 만나게 해주고 또 연애운을 열어주는 곳인지라 여학생들과 젊은 연인들로 넘쳐났다. 무릎 높이 정도의 검은 연점석(戀占の石:사랑을 점치는 돌)은 가슴에 이름표를 달고 머리 부분에는 새끼줄을 두른 채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키며 청춘남녀의 영원한 사랑 고백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시키테이 산바(式亭三馬 1776~1822) 시인이 “신(神)은 현세를 밝히고 불(佛)은 내세를 구원한다( 〈 浮 世 風 呂 〉4)”라고 한 글에서 보듯 신사와 절의 역할분담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또 불(佛)은 신(神)의 본질이며 신(神)은 불(佛)의 현현이라는 본지수적설(本地垂迹說)도 등장하였다. 즉 신(神)은 중생구제를 위해 일본에 나타난 부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인도뿐만 아니라 일본도 신들의 나라였다.

   

선승의 일갈에 ‘신사 우위’ 꼬리 내려

 

하지만 이런 평화적 공존을 위해선  갈등의 역사도 있었다. 불교가 상대적으로 대접받을 때도 있었지만 신사가 더 존승받은 시절도 있었기 때문이다. 도꾸온 쇼오쥬(獨園承珠;1819~1895) 스님은 사찰과 신사의 갈등기를 온몸으로 견뎌낸 선승이다. 그 당시 신사 측에서 자기들 행사 때는 승려들도 복장을 신사의 법식대로 바꿔입고 참석케 해달라고 조정에 건의하고 또 스님에게도 통보를 해왔다. 물론 ‘신불협동(神佛協同)’으로 화합하자는 명분을 내세웠다.

 “아! 좋습니다. 그럼 앞으로 우리 승려들은 신사 쪽의 행사 때에는 신관의 복장을 갖추어 보좌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우리 불교의 법요식(法 要 式) 때는 신관들도 삭발하고 승복을 입으며, 또 채식을 하고, 그 기간만큼은 여색도 멀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차분한 일갈(一喝) 에 그 일은 없던 일로 정리되었다.  

  

나라(奈良)의 동대사(東大寺 도다이지) 권역의 춘일대사(春日大社 가스가타이샤) 신사는 사원의 수호를 위하여 절 근처에 세워진 신사로 출발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규모를 만만찮게 키웠다. 팔백 년 된 등나무가 유명한지라 여성관리인들은 등꽃을 형상화한 족두리를 쓰고 있는 것이 이채로웠다. 천 년 이상 벌채가 금지된 원시림과 함께 희귀식물을 많이 보유한 명품정원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마침 결혼식이 있는지라 경내가 분주했다. 더불어 오월의 룸비니 동산처럼 꽃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달마가 동쪽까지 오신 뜻 물어볼까

 

입구부터 본당까지 참배로에 석등 2000여기가 일렬로 서있는 장관을 연출했다. 또 회랑에는 크기가 만만찮은 구리로 만든 등(燈) 1000여 개가 줄을 지어 매달려 있다. 1년에 두 번, 밤에 불을 켜는데 그 행사는 만등축제(萬燈籠祭 만토로 마쯔리)란 이름으로 관광객을 모으고 있었다. 때맞춰 오면 돌과 쇠로 만든 도합 3천 개의 등불이 장명등(長明燈)불이 되어 세상을 밝히는 광경을 볼 수도 있는 곳이었다.

원오극근(1063~1125) 선사는 〈심요心要〉에서 “등(燈)에게 법을 물어라”고 했다. 그래서 고인은 ‘차라리 등이 성인들의 수준보다 더 뛰어나다(燈籠超佛祖)’고 하신 모양이다. 대위해평(大潙海評) 선사는 대자유인이 된다면 ‘(춤을 출 수 있을 만큼 면적이 넓지 못한) 등 위에서 춤을 추는(燈籠上作舞)’ 경지를 맛볼 수 있다고 했다. 만등축제날 이 신사 앞에서 춤을 추는 사람을 만난다면 말 없는 등불을 대신해서 ‘달마가 동쪽까지 오신 뜻’을 물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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