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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벗님글방

꾸미지 않아 아름답고 소박해서 마음 사로잡는

등록 2010-03-11 00:52

[벗님글방/원철스님]

남선사 모래·바위·이끼만으로 정원 꾸며

절제미로 옛 선사들의 삶 한눈에 그려져

 

 

명월(明月)은 암자를 비추고

암자(庵子)는 명월을 담았네.

 

 

일본 고베 선창사(禪昌寺)에 머물던 경안(慶安 케이안)스님이 당시에 주지이면서 동시에 그의 스승인 월암(月庵 겟간)선사 문집에 남긴 선시이다. 그는 650년 전 14세기 무렵에 부모 중생 국왕 삼보의 4가지 은혜를 갚기 위해 불경을 모으기 시작했다. 동시대 같은 사찰에서 함께 살았던 무견(無見 무켄)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중국까지 들어가 당시에 간행된 모든 경전을 수집하기 위하여 애를 썼다. 물론 많은 사재(私財)까지 털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뜻을 완전히 이루지 못하고 남의 나라에서 열반했다. 이 두 스님의 원력에 힘입어 이후 선창사 대중들은 고려와 중국각지에서 출판된 경전을 계속 모았고 원본을 구하지 못한 것은 필사(筆寫 :붓으로 베껴 씀)하여 추가하면서 일체경(一切經:대장경)을 구비하기에 이르렀다.

 

월암선사 영정의 찬 스스로 작성

 

선창사에는 월암선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었다. 그 영정의 찬(撰)을  당신이 스스로 썼다고 전한다. 남의 손에 나의 평가를 맡길 수 없다는 결벽증과 약간의 아만심 그리고 자신감이 겹쳐진 탓이다. 그려진 모습 속에서 선사다운 칼칼한 성품이 엿보였다. 따지고 보면 가끔 묘지문이나 제문을 자기 손으로 써놓고 시적(示寂)하는 선사들이 더러 있었으니 자찬(自撰) 정도야 거기에 비한다면 사실 별스러운 일도 아니다. 그런데 워낙 초서로 갈겨 쓴 탓에 해독력이 부족하여 의미파악을 제대로 할 수 없는지라 그의 내면세계까지 엿보지 못한 것이 다소 유감이었다. 

 

그를 포함한 제자와 주변인들이 애써 모은 그 일체경은 250년이 지난 1614년에 본산인 교토 남선사(南禪寺)로 옮겨지게 된다. 정치적 사회적 불안으로 인하여 보다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절이 필요한 탓이였다. 고베(神戶)에서 교토(京都)까지는 배를 이용했고 이후 절까지는 수레를 이용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도 강화도에서 배를 이용하여 고령 개경포(開經浦)까지 왔다. 그리고 수레와 사람의 힘을 빌어 해인사까지 이운했다. 삼재(三災)가 들어올 수 없는 곳이라야 비로소 법보(法寶)를 보관할 터가 될 수 있는 것은 선창사나 해인사나 같은 도리라고 하겠다.     

 

혹여 고향생각 날까 나무도 안 심어

 

선창사와 남선사는 모두 임제종 남선사파에 속하는 사찰이었다. 명암영서(明庵榮西 묘안에이사이 1141~1215)선사가 송나라에 유학한 후 일본으로 귀국하면서 임제선을 전했다.  두 절 모두 절 이름 속에 있는 ‘선(禪)’이라는 글자를 포함시켜 선종사찰임을 보다 분명히 했다. 남선사 스님들은 검은 장삼에 오조가사를 하고 나타났다. 특이한 것은 손에 모두 부채를 들었고 정삼 안으로는 흰 명주목도리를 받쳐 입었다. 송나라 때 선종승려들이 저런 복식을 하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조계종과 동일한 임제법손이 살고 있는 남선사라 동질감이 일어났다. 그리고 우리에게 더 의미가 있는 것은 고려대장경 초조본 1700여권을 소장하고 있는 까닭이다. 물론 선창사에서 옮겨온 일체경 속에 포함된 일부이다.

 

또 남선사에서 시선을 머물게 한 것은 석정(石庭:돌정원)이었다. 조경이 워낙 단출하여 일체 망상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선방에서 앉아 정진하는 대중들을 위한 정서적 배려와 함께 그 배려로 인하여 공부가 방해되지 않을 만큼의 중도(中道)적인 솜씨였다. 인내심의 덕장(德將)인 토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도 그는 부하들이 나뭇잎 떨어지는 걸 보며 혹여 고향생각을 할까봐 주변 정원에 나무를 심지 않았다고 한다.

 

남선사 ‘고산수(枯山水 가레산스이)정원’은 왕모래와 바위 그리고 이끼 만으로 정원을 꾸몄다. 정원석은 산이었고 모래는 바다였으며 이끼는 정원수였다. 선종의 융성에 따른 석정(石庭)과 같은 허식을 극도로 억제한 절제된 정원을 탄생시켰다. 선사상이 정원축조의 의도에 강한 영향을 끼쳐 기존에 유행하던 물과 호수 그리고 수목이 어우러진 화려한 회유식(回遊式)정원의 흐름을 일거에 바꾸어버린 절제미의 극치였다. 그야말로 선종정원이었다. 마루 위에서 한참을 내려다보며 옛선사들의 군더더기 없는 삶을 읽을 수 있었다. 그 고유한 조경적 가치를 인정받아 인근의 용안사(龍安寺) 석정 등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희라

일적해지정(一滴海之庭)이여

아! 한 방울의 물에서 바다까지 보는 정원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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