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대장경 쳔년의 해
종적 묘연했던 대장경, 1/3 오롯이 보존돼 있어
독서인구 늘리려한 노력의 결정체 여전히 유효
일요일 오후 느긋한 걸음으로 삼청동을 걸었다. 북촌이라고 불리는 아기자기한 골목과 나지막히 소박한 기와집이 어우러진 독특한 분위기로 인하여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 서울의 또 다른 명소이다. 구석구석 자리한 소규모 박물관은 문화마을을 채워주는 양념노릇을 하고 있다. 터가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한 어느 개인박물관으로 이끌리듯 들어갔다. 진열된 유물을 관람하다가 꽂히듯 멈추어 선 곳은 초조본 고려대장경 두루마리 한 축이 펼쳐진 곳이었다. 은은한 묵향이 베어 나올 것 같았고 목판 옛체 글씨가 주는 따스함을 가득 머금은 채 그야말로 ‘천년의 세월’을 한 몸에 안고 있었다.
고려대장경 첫 인쇄본 일본 남선사에 보관
태백산의 주목(朱木)군락의 고사목 곁을 지나가면서 누구나 한마디씩 주워들은 풍월로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이라는 말을 내뱉는다. 그 나무는 무쇠기둥에 꽃이 피고 열매가 맺을 시간인 천세(千歲)를 누린다고 여겼다. 또 흔히들 ‘천년 학’이라고 했다. 그래서 일본 북해도의 학이 많이 살았다는 어느 지역은 도시 이름마저 천세(千歲;지토세)시라고 붙였다.
이래저래 ‘천년’이란 숫자는 사바세계에서 기념비적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지난 1월말 ‘대장경 천년’을 기념하여 일본 교토에 있는 남선사(南禪寺)를 참배했다. 서지학자 그리고 대장경과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뜻을 함께 했다. 더불어 서보전(瑞寶殿)에 비장(秘藏)되어있는 최초로 찍은 고려대장경 인쇄본을 친견하는 안복(眼福)을 누렸다. 팔만대장경을 봉안하고 있는 해인사로 출가한 인연 때문에 필자 역시 대장경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지라 그 일정은 설렘의 연속이었다.
뜻있는 문화인들 사이에서 이미 오래 전에 천년행사를 기획해왔다. 이어령 선생은 2007년 4월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고려대장경 천년의 해’ 선언식에 좌장 격으로 자리를 함께 했다. 당시에 인용했던 고려가요는 정말 현재를 예언하는 주문(呪文)이었다. 그런 까닭에 오늘 다시 환청처럼 들려온다.
“구슬이 바위에 떨어져 흩어졌다고 하더라도 그 끈이야 끊어질리 있겠습니까? 천년을 혼자 외롭게 지낸들 님과 나와 맺어진 그 사랑의 끈이야 끊어질 리가 있겠습니까?”
그 노래가 말한 것처럼 천년 전에 처음 새긴 대장경 6천여판은 전란으로 소실되면서 산산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천년 이후 또 다른 존재감으로 우리 앞에 이렇게 환생한 것이다,
과거 천년의 지혜 모아 천년의 미래로
이미 오래 전에 의천(義天 1055~1101)국사는 그 끈을 다시 매며 “과거의 천년지혜를 모아 미래천년으로 넘겨주는 일”이라고 했다. 이어 수기(守其)대사는 만주와 중원 땅의 대장경까지 함께 수집하여 팔만장의 목판에 새겼는데, 이는 당시 동아시아 문화역량을 결집한 완결판이었다. 두 스님 모두 기존 초조본을 근간으로 했다. 원판은 없어져도 고려말까지 찍어놓은 인쇄본이 있었던 덕분이다. 3번 정도 인출(印出)했다는 기록이 있는걸로 봐서 수리적으로 2만장은 남아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후 그것마저 흩어져 아예 종적마저 묘연했다. 그렇게 몇백년이 흘렀다.
하지만 끈은 결코 끊어지지 않았다는 말처럼 1967년 한국학계에 첫 인쇄본 1700여장이 남선사에 보관되어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더불어 국내외 사찰, 박물관, 도서관 등에도 300여장 정도가 남아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전체의 1/3정도가 현재까지 오롯이 보존되고 있었던 것이다. 고려대장경연구소 종림스님은 서보전(瑞寶殿)에서 처음 마주한 남선사본에 심장이 멎을 지경이었다는 당시의 감격을 일행에게 눌변으로 말했다.
그런데 남선사본은 이제까지 보아오던 두루마리본이 아니라 병풍처럼 접힌 책의 형태였다. 장소도 바뀌었고 모양도 바뀌었다. ‘사랑은 움직이는거야’라는 광고처럼 사랑받을 수 있는 곳으로 대장경 역시 끊임없이 이동한 탓이었다. 400년동안 남선사에 보관되어 왔지만 알고 보니 이곳도 본래자리가 아니었다. 1614년 남선사로 모시기 전에는 고베의 선창사(禪昌寺)에 머물렀다. 당시 무견(無見;무켄)·경안(慶安;케이안)스님이 3만리 발품을 마다하지 않은 결과였다. 나라의 보물인 대장경을 보다 안전한 큰절로 이운토록 주도한 이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였다. 정치인이 끼어들만큼 이운 자체가 국가적인 사업이었던 것이다.
자국 학자들에게도 공개 않던 초조본을 우리나라에 공개
옮겨가기 전에 그 절의 대중들은 이를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권권마다 “우리 꺼”라며 ‘선창사본’이라는 도장을 꾹꾹 눌러 두었다. 남은 이들은 이후에도 장서인을 통해서 아쉬움과 서운함을 달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찰 부설유치원 뒤편 우거진 숲 속이 장경각 자리였다. 대장경이 옮겨가니 그 역할이 없어졌고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히 건물은 흔적마저 사라졌다. 반면에 일찌기 조선통신사로 다녀갔다는 설봉(雪峰)이 남긴 ‘선창사’ 현판은 오늘도 제 위치를 지키고 있었다. 그 옛날 한일교류를 말없이 보여주고 있는 또 다른 상징물이다. 얼굴에 주름이 유난히 굵어 마음씨 좋게 보이는 곤도(近藤利弘)주지화상은 우리들 앞에서 옛날부터 글로벌한 생각을 가진 스님들이 머물러 왔던 사찰임을 은근히 그러면서도 연신 자랑했다.
그동안 남선사는 자국인 일본 학자들에게도 공개하지 않았을 만큼 초조본을 애지중지했다. 하지만‘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다. 한국의 고려대장경연구소의 정성에 감동한 나머지 디지털 작업을 할 수 있도록 공개하고 또 배려했다. 그리하여 대장경을 통해 한일양국이 함께 살아가는 미래의 모델을 만들었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일본에서 대장경을 달라는 요구를 조정에 자주해 왔다고 기록한 것에서 보듯 이는 동아시아적인 가치가 대장경을 매개로 오랜 교류와 협력이라는 역사적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대장경의 나라 고려는 문화국가로서의 위상을 주변에 드높이고 동아시아 인쇄출판문화대국을 지향했다. 대장경과 판전이 ‘세계문화유산’이라는 레테르가 붙은 손댈 수 없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도서관이며 또 출판사인 까닭이다. 당시에 많은 사람에게 경전을 읽도록 하려면 기존의 손으로 베끼는 작업은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대량으로 찍어내기 위해 목판에 새겼던 것이다. 당시 독서인구의 저변화를 위한 노력의 결정체인 셈이다. 지금도 한 달에 책 한 권 제대로 읽지 않는 사람이 전 국민의 반이라고 하니 여전히 그 정신은 유효하다고 하겠다. 언젠가 해인사 도서관장을 찾아 온 어느 방문객이 ‘관장스님께서 장경각도 같이 관리하느냐?’고 물었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닿아오는 여행길 이었다.
문화가 국격(國格)인 시대가 되었다. 20011년은 고려대장경 탄생 천년의 해이다. 내년에는 팔공산 부인사, 가야산 해인사를 중심으로 ‘대장경 천년’축제가 열린다. 단순한 기념행사가 아니라 문화강국 그리고 출판대국으로 대한민국이 한 단계 더 도약하는 계기가 된다면 제대로 된 천년맞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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