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휴심정 벗님글방

평등무차별 모든 것 덮은 눈, 여기가 바로 은색계

등록 2010-02-05 19:35

[벗님글방/원철스님]

인간세상서 볼 수 있는 천상세계, 보현보살 머무는 곳

 

 

 

 만리천위은색계(萬里天圍銀色界)

 찰라지설화만발(刹那枝雪花滿發)

 만리 먼하늘은 은빛으로 에워쌓여

 눈 깜짝할 새 가지마다 눈꽃 가득하네

 

 

신년 벽두부터 온 세상에 흰 눈이 가득 내렸다. 은세계의 나뭇가지 마다 눈꽃이 소담스레 피어난다. 올겨울 내내 참으로 눈이 흔하디 흔했다. 내린 이후에는 여기저기서 불편한 소리가 들려도 내릴 때만큼은 언어가 끊어지고 모두가 말없이 따스한 눈길로 그저 바라 볼 뿐이다. 한강이 얼어붙는 추위까지 겹쳐 장독대 위에 쌓인 백설이 그대로 굳어버려 기상대의 호들갑이 아니더라도 몇십년만의 기록적인 강설량임을 눈 앞에서 알게 해준다. 칼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종종걸음을 치긴 해도 오랜만에 겨울같은 겨울이 주는 청량함은 코끝에서 피어오르는 입김을 더 훈훈하게 만들어준다.  

 

오늘같이 몹시 추운 어느 날 스승인 위산선사는 제자인 앙산스님에게 물었다.

 

“날씨가 추운가? 사람이 추운가?”

 

눈은 얼었고 날씨는 춥다. 그래서 사람도 춥다. 날씨가 추운가 사람이 추운가 하는 상투적인 선문답은 그저 평범한 제자의 한 마디에 그대로 묻혀 버린다.

 

“모두가 그 속에 있습니다.”

추위를 만나 ‘날씨 탓 사람 탓’하고 있는 걸로 봐서  아직 덜 추운 탓이렸다.

 

그 때 눈이라도 덤으로 한번 더 내려준다면 ‘눈이 옵니다’라고 대답했을 것 같다.  

 

날씨가 추운가 사람이 추운가

 

그 날 두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설백(雪白) 그리고 천지백(天地白)의 은세계였다. 흰눈은 평등무차별의 세계를 만들어 주었다. 모든 세상의 허물과 더러움 그리고 잘난 것 까지 덮어버리고 오로지 은색계(銀色界)를 만들어 놓았을 뿐이다. 옛사람들은 이 풍광에서 불국토를 찾아냈다.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는 가와바다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설국〉의 첫 구절처럼 어두운 무명(無明)에서 벗어나 밝은 지혜의 광명을 상징하는  설경은 아무리 무딘 이라고 할지라도 감동으로 닿아올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은색계는 인간세상에서 볼 수 있는 천상세계인 것이다.   

 

사바세계에서 은색계는 아미산(峨嵋山 중국 사천성)으로 여겼다. 천상(天上)의 설역(雪域)세계가 땅 위에 현현했다고 여긴 까닭이다. 아열대 지역의 고산에서 볼 수 있는 적지않는 양의 눈이라 그 느낌이 모두에게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세계문화유산 지구인 이 산은 백설이 푸른 나무에 내려앉고 얼음이 붉은 꽃을 감싸는 빙설경치로도 이름을 함께 떨쳤다. 금정(金頂)의 눈구경은 정상에서 민산(閔山)의 천리에 펼쳐진 눈을 보는 것이라면 대평의 눈구경은 뭇산으로 둘러쌓인 곳에서 사면의 설봉에 매혹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후자의 광경을‘대평설제’라고 이름 붙여 아미산 십경 속에 포함했다. 몇 년 전에 필자가 아미산을 갔을 때는 한여름인지라 기록과 언어 속에서만 겨울의 눈풍광을 상상 속에서 그려내야 했다.  아미산은 보현성지다. 그 은색계에는 보현보살이 항상 머물고 있다. 

 

그 해 눈이 가득 내린 설날 새벽, 해인사 큰법당에서 산중의 모든 대중이 함께 모여 정초의 기도의식인 향수해례(香水海禮)’를 여느 해 처럼 올렸다. 운곡이 진중하여 신심이 저절로 우러났다. 이 구절에 이르렀을 때 그만 숨이 탁 막혔다. 내가 지금 서 있는 바로 이 자리가 은색계 보현성지임을 알아차린  까닭이다.

        

 나무 아미산 은색계 보현해회 제불제보살

  (南無 峨嵋山 銀色界 普賢海會 諸佛諸菩薩)

 눈 덮힌 아미산 은빛 가득한 세계에 계신 보현보살님과

 그리고 함께하는 모든 불보살님께 귀의 합니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휴심정 많이 보는 기사

왜 같은 불교인데도 어디선 육식 금하고 어디선 허용할까 1.

왜 같은 불교인데도 어디선 육식 금하고 어디선 허용할까

 장윤스님 ‘신정아씨 두둔’ 왜? 2.

장윤스님 ‘신정아씨 두둔’ 왜?

간디의 직업은? 3.

간디의 직업은?

그래도 해야한다 4.

그래도 해야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한마디로 빈말 5.

삼위일체 교리는 한마디로 빈말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