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휴심정 벗님글방

새 피맛길, 세월 녹아든 도시의 뒷방 맛 가셔

등록 2009-12-22 00:49

[벗님 글방/원철스님]

사람냄새 가득했던 훈훈한 공간에 ‘인공 향기’

야사·뒷뜰·후문, 앞-뒤 조화로운 공존에 필수

 

 

아시다시피 피맛길이란 이름은 종로대로의 고관들이 탄 말(馬)의 행렬을 피해서(避) 다니던 길에서 유래했다. 따라서 종로가 양반길이라면 피맛길은 서민의 길이다. 대로는 큰길만의 몫이 있고, 골목길은 나름대로 실핏줄같은 역할이 있다. 본래 길이 있으면 길과 길 사이에 샛길이 생기고, 철조망을 쳐놓아도 필요한 곳에는 ‘개구멍’이 뚫리게 마련이다. 그리고 정문이 있는 큰 건물에는 으레 작은 후문을 두고 있다. 정사(正史)가 있으면 더불어 그만큼의 야사(野史)가 구전되어야 제대로 된 살아있는 역사가 되는 것도 같은 이치라 할 것이다.

 

격을 갖춘 가정집은  앞쪽에 정원이 있으면 뒤에는 후원이 있다.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서서〉라는 책으로 유명한 최순우 선생의 성북동 고택 뒷뜰은 그 집의 백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 시대의 획을 그은 저술을 남긴 미술사가의 사상적 원천을 찾아 오늘도 많은 방문객들이 그 집을 드나들고, 뒤란을 어슬렁거리면서 사색하고 차를 마시는 삶의 여유까지 누리는, 모두의 공간으로 변해 있었다. 이 집을 보면서 앞모습도 아름다워야 하지만 뒷태도 고와야 진짜 미인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앞모습도 아름다워야 하지만 뒷태도 고와야 진짜 미인

 

절집도 그랬다. 큰방이 있으면 뒷방도 있다.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공식회의인 대중공사가 있으면 항상 전날 저녁 삼삼오오 모여 의견을 조정하는 뒷방공사가 있었다. 뒷방공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큰방의 대중공사는 시간도 많이 걸리고 결론도 쉬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팽팽한 큰방문화와 느슨한 뒷방문화가 함께해 온 것이다. 대화와 소통은 큰방과 뒷방을 넘나드는 또다른 지혜를 필요로 한다.   

 

도시의 앞과 뒤의 조화로운 공존인 종로와 피맛길은 높은 빌딩 위에서 내려다보면, 이마를 맞댄 낡은 낮은 집 머리 위에 빛바랜 비닐과 페타이어, 줄달린 돌덩이가 얹혀 있어 눈에 퍽이나 거슬린다. 하지만 내려와 그 골목 안으로 들어서면 사람냄새 가득한 훈기있는 또다른 맛과 멋의 공간이 펼쳐진다. 그건 외형이나 숫자로 평가할 수 없는, 팽팽한 삶의 긴장감을 내려놓을 수 있는 세간의 ‘뒷방’구실을 하는 곳이다.

 

1973년 남북조절위원회 참석차 서울에 온 북한 대표가 ‘그 추어탕집 그대로 있느냐’고 물어 화제가 된 가게도 이 거리에 있었다. 그런 오래된 도시의 삶의 이야기가 켜켜로 쌓인 자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 것’이 막무가내로 들어서는 개발론에 밀려 우리는 그동안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피맛길도 경제논리에 밀려 속수무책으로 없어지는 것을 보다못한 뜻있는 사람들이 ‘보존’을 외치고 나섰다. ‘600년된 길’의 역사성과 삶이 숨쉬는 긴 사연들까지 깡그리 무시되고 있는 안타까움이 컸던 까닭이다. 오래된 골목의 정취는 그 자체가 문화재적 재산이다.  

 

그래도 개발과 보존이 이만큼이라도 타협했으니 다행

 

보존의 목소리는 피맛길 이전에도 많은 메아리가 있었다. 숨기고 싶은 가난의 속살까지 당당하게 드러내 오히려 보존되는 마을까지 생겼다. 통영의 ‘동파랑’ 마을은 철거 직전에 그 자연스런 아름다움을 발견한 이들에 의해 벽화작업이 더해지면서 색다른 지역명물이 되었다. 그리하여 보존은 물론 지방자치단체의 문화적 안목까지 가늠하는 사례가 되었다. 부산 감천동의 ‘태극도 마을’은 서민적이고 독특한 색감의 풍광으로 ‘한국의 산토리니’라는 과분한 별명까지 얻으며 디지털 카메라 대중화 시대의 혜택을 누리는 또다른 관광지가 되었다.          

 

종로에서 메밀국수로 유명한 그 집은 갈 때마다 가게 앞에 길다란 줄이 늘어서 있다. 어느 날 ‘오늘은 절대로 기다리지 않고 점심을 먹겠다’고 별러서 11시쯤 갔다. 하지만 그 날도 긴줄이 늘어져 있었다. 언젠간 점심 때를 놓쳐 2시쯤 갔는데 그 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피맛길의 맛집을 대표하던 가게 중의 하나인 그 집이 재개발로 헐렸다. 이즈음 쌍둥이 고층빌딩 두 채 사이에 인위적으로 만든 직선의 반듯한 골목거리 한 켠으로 옮겨졌다.

 

입구에는 없던 홍살문까지 세우고  ‘피맛길’이란 새로운 안내팻말도 붙였는데 뭔가 조금 어색했다. 그건 세월의 묵은 때까지 녹여낼 수 없는 까닭이다. 그 속에 감춰진 면피성 행정과 상업적 의도가 함께 읽혀졌다. 그래도 전통 흔적을 남겨두고자 나름대로 애쓴 모습이 역력했다. 인근에서 옮겨온 여러 전통맛집들은 유리문과 실내벽에 옛 가게사진을 걸어놓고 그 손맛의 역사적 지속성을 증명해 보이려고 했지만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은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래도 개발과 보존이 이만큼이라도 적당히 타협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오늘은 새골목 새집에서 오랜 손맛의 메밀국수를 줄서지 않고 먹을 수 있었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휴심정 많이 보는 기사

두번째 화살을 맞지않으려면 1.

두번째 화살을 맞지않으려면

홀로된 자로서 담대하게 서라 2.

홀로된 자로서 담대하게 서라

착한 일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3.

착한 일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천도재도, 대입합격기도도 없는 사자암의 향봉스님 4.

천도재도, 대입합격기도도 없는 사자암의 향봉스님

고통이 바로 성장의 동력이다 5.

고통이 바로 성장의 동력이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