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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벗님글방

내외의 체질 다른 산 반, 절 반 가야산

등록 2009-09-04 10:43

같은 산 두 모습, 한쪽은 ‘흙산’ 한쪽은 ‘화산’

‘장군젓가락’ 흔적만 남은 용기사 자취 아련

 

 

출가한 사찰인 탓에 가야산 가는 길은 늘 고향가는 기분으로 내달리는 길이다.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생긴 이후에는 성주IC를 자주 이용한다. 경남 합천 해인사 방향이 ‘내가야’라면 경북 성주 심원사 쪽은 ‘외가야’라고 이름붙여도 좋을 것이다. 내가야가 육산(肉山)이라면 외가야는 골산(骨山)이다. 같은 산임에도 불구하고 내외의 분위기가 판이하다. 흙산인 내가야와는 달리 외가야는 삐죽삐죽 바위로 된 탓에 화산(火山)으로서 기상이 더 살아난다.

 

터가 체질적으로 맞이 않으면 도인이라도 ‘안된다’

 

육산과 골산 이야기는 당나라 때 백장(749~814)과 위산(771~853)선사의 일화가 유명하다. 백장스님 문하에서 풍수를 좀 본다는 사마두타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가 호남성의 대위산에 들렀다가 수천명의 수도자가 함께 살 수 있는 명당터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 말을 듣고 백장선사가 그 터를 욕심내기 시작했다. 낌새를 눈치채고는 한마디로 ‘안된다’고 가차없이 자르니 스승이 그 이유를 물었다.

 

“선사께서는 골인(骨人)인데 그 산은 육산(肉山)인 까닭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도인일지라도 반풍수 눈으로 봐도 ‘터가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 곳’이라는 말이었다. 이에 마음을 돌려 뛰어난 제자인 위산선사를 분가시켰다. 이후 대위산은 날로 번창하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어쨌거나 가야산은 예로부터 ‘산(山)이 반(半)이고 절(寺)이 반(半)이다’라고 했다. 예전에 경주나 일본 교토(京都)는 ‘집반 절반’ 이라고 했다. ‘절반’이란 말이 여기서 기원한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내가야의 번창과는 달리 외가야는 거의 폐사지로 남아 있다. 용기사 법수사는 여전히 주초와 석조물 몇 점으로 옛 자취만 아련하고 심원사는 최근에야 복원의 손길이 닿아 옛모습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현재 성주 백운동은 잘 닦인 도로와 넓다란 주차장, 식물원, 호텔에 온천탕까지 갖추어진 관광지가 되었지만 20여년 전 학인시절에 가야산 등반을 마치고 이쪽 방향으로 내려올 때면 허름한 두부집 내지 할머니 칼국수 집에서 허기를 달랜 한적한 시골이었다. 비포장 길을 따라 두 눈은 골산을 바라보고 신발에 먼지 폴폴 날리며 경남북의 경계인 고개마루를 넘어 두 시간 거리쯤 걸어 합천 가야면의 삼거리에서 버스를 한참 기다렸다가 타고서 해인사로 올라가곤 했다. 

 

제 모습 찾아가는 심원사 그 위용 다시 떨칠까

 

용기사는 현재 해인사 큰법당의 삼존불이 모셔져 있던 절이었다. 불상 규모를 봐서도 작은 절이 아니었을 텐데 지금은 거짓말같이 아무 것도 없는 빈골짜기에 안내판만 한 개 덩그러니 놓여져 옛 흔적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법수사 3층 석탑은 지금도 훤출한 자태를 뽐내며 덕곡들판을 굽어보고 있고 근처에는 높다란 축대와 절 입구임을 알리는 단아한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경순왕의 막내아들인 범공(梵空)스님이 여기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당우가 1000칸을 넘었고 100여개의 암자가 딸린 대찰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동네사람들이 ‘장군젓가락’으로 부른다는 당간지주는 당산나무와 어우러져 그 본업을 잃고 서낭당이 되어 허리에 금줄을 두르고 있는 생경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그래도 절터가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골산(骨山) 속의 심원사는 이제 제대로 주인을 만나 그 옛날 위용을 되찾아가고 있다. 절입구에는 이 고장 출신이라는 이직(李稷 1362~1431)의 시조비가 본의 아니게 이정표 노릇을 하고 있다. 여러 선지식들이 일찍이 복원의 뜻을 가졌으나 시절인연이 무르익지 않았고 이제 터가 저 대위산처럼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나 얼기설기 남아있던 삼층석탑을 중심으로 차츰차츰 옛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골산에 어울리는 두상이 잘 생긴 창건주 화상은 눈썰미가 있고 미학적 안목이 뛰어난지라 여러 채의 당우들이 어울리는 크기로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조화로운 가람을 한 동씩 앉혀내고 있었다.          

 

‘외로운 골짜기’ 성석린, 나물과 옷 한 벌의 청복 누려

 

심원사에 대한 글을 남긴 성석린(成石璘 1338~1423)은 해서와 초서를 잘 쓰는 당대의 명필이며, 이성계와 친구인 인연으로 함흥차사로 가서 그의 마음을 돌려 한양으로 모시고 온 공로가《명신록(名臣錄)》에 기록되어 있다. 뒷날 성삼문까지 배출한 명문가이기도 하다. 호를 ‘독곡(獨谷)’ 즉 외로운 골짜기라고 할 정도였으니 그의 가풍은 집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고요한 승방에 낮잠 길었는데(寂寂高齊午睡餘)

 동자는 죽 끓이고 산나물을 삶는구나(侍童煎粥煮山蔬)

 선생(본인)이 배 두드리며 아이에게 말했지(先生鼓腹向兒道)

 향적세계(이상세계)의 진수성찬도 이보다는 못하리라고(香積珍羞也不如)

 

개인문집인 《독곡집》에  조선 초기 심원사의 선적(禪的)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시가 두 수 전해온다. 당두(堂頭:주지)스님이 선물로 보내 준 산나물을 받고 감동하며 지은 것인데 선기(禪氣)가 다소 묻어난다. 얼마간 절에 머물면서 나물 먹고 물 마시며 팔베개로 만족하는 안빈낙도의 삶을 추구했다. 구름 가득한 골산 속에서 세속적인 욕심을 모두 놓아버리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서 ‘한가한 도인’이 되어 한 벌 옷과 발우, 그리고 나물 한 그릇이 주는 청복(淸福)을 누릴 줄 알았다. 또 다른 작품 속에서 시대의 지성답게 ‘심여경(心如鏡:마음과 같은 거울)’이란 표현까지 등장하는 걸로 봐서 선어록이나 노장(老壯)사상에도 문외한은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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