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그대로 물…똑같은 물을 싫어하고 좋아하고
천만인파 해운대에 과도한 바닷물 쓰나미 온다면…
명당의 기본인 배산임수의 터를 서울에서 찾는다면 가장 먼저 손꼽히는 곳이 한남동이다. 남산을 등 뒤로 하고 한강수를 마주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가끔 잊을 만하면 부촌에 살고 있는 이름있는 이웃끼리 강물 조망권으로 인한 사소한 다툼이 언론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곤 한다. 이는 풍수에서 물을 재물로 보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호의 고수’인 조용헌씨는 진단했다.
강물 조망권으로 다투기도, 우울증에 걸리기도
그리고 풍수에선 물을 또 길로 본다. 그래서 물길이라고 부른다. 물길은 유통의 길이며 또 소통의 길이다. 모두가 함께하는 길인 것이다. 그래서 ‘친한 물(親水)’이 전제되어야 한다. 한강의 일부 시멘트 절벽 앞에 선 것처럼 누구나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는 물이 아니면 강물의 존재 가치는 반감되기 마련이다. 경부운하를 만든다고 했을 때 큰 저항에 부딪친 것도 생태파괴 및 오염의 가속화로 인하여 ‘싫은 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4대강 사업은 유난히 친수화(親水化) 를 강조하는 것 같다.
장마 때 홍수물은 집안의 유리창을 통해서 보거나 멀리 언덕 위에서 우산을 쓰고 흙탕물일 때 바라보아야 제격이다. 물의 과다 역시 가까이 접근할 수 없는 까닭에 친한 물이 될 수는 없는 까닭이다. 물과 나 사이에 뭔가 벽이 있다. 과도한 바닷물인 쓰나미는 해안주민들을 긴장시킨다. 이를 주제로 한 인기영화 ‘해운대’ 역시 영화관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싫은 물을 친한 물로 바꾸는 데 스크린도 기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하겠다. 반대로 오아시스 물은 너무 귀해서 경건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주변의 넓고 긴 사막길 때문에 쉬이 다가갈 수도 없다. 싫은 물은 아니지만 쉬운 물이 아닌 까닭에 친한 물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뭐든지 지나치거나 모자라면 문제가 된다.
강변의 아파트에 사는 주부들 중에 우울증이 많다는 의학보고서나 강가나 바닷가에 있는 절에 머물려고 온 스님네들이 습기나 염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걸망을 싸는 일이 흔한 것도 결국 스스로 친한 물로 만들어내지 못한 자기의 허물 때문이다. 물은 그대로 물일 뿐이다. 하지만 느끼는 물은 개인마다 상황마다 달라지기 마련이다.
치수의 어려움…4대강 살리기 사업, 과연 친한 물 만들까
그러나 자연적인 물길에 만족하지 못하고 좀 더 적극적인 의지로 인공적인 물길을 만들어 무관계한 물을 친한 물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시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사례가 적지 않았다. 6세기 무렵 수나라 양제는 북경에서 항주까지 1800km에 이르는 경항운하(京杭運河)를 팠다. 조선 태종은 용산에서 남대문까지 운하를 파자는 건의에 대해 ‘우리나라는 모래와 돌이어서 물이 머물러 있지 못하므로 중국을 본따 운하를 팔 수 없다’고 〈태종실록〉에서 잘라 말하고 있다. 운하를 파는 것이 친한 물이 되게 할 수 있다고 믿는 황제와 그냥 두는 것이 오히려 친한 물로 남겨둘 수 있다는 임금의 상반된 태도는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각각의 모습으로 되살아나 오랜시간 마찰음을 일으켰던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인류는 한 줄기 운하에 그치지 않고 여러 운하로 겹겹이 이어진 몇 개의 운하도시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남겨 놓았다. 유명한 이탈리아 베네치아는 13세기 무렵에 현재의 모습이 갖추어졌고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그는 17세기 피터 대제에 의해 완성되었다. 두 도시 모두 100여개의 섬과 섬 사이를 500여개의 다리로 이어 놓았고 또 그 사이사이 물길을 따라 집을 지었고, 집들이 모여 도시를 이루었다. 맨땅을 파서 없던 물길을 만든 것이 아니라 물 위에 다시 물길을 낸 것이다. 작은 배로 이동하는 베네치아의 경이로움만큼이나 차를 움직이며 다리를 건너다니는 상트페테르부르그 역시 그 못지않는 감동을 주었다. 전자가 물은 물로써 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반면에 후자는 물이 땅으로 인하여 친해질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였다. 그래서 지자요수(智者樂水)라고 한 모양이다.
치수(治水)란 싫은 물을 친한 물로 바꿀 수도 있지만 잘못하면 역으로 친하던 물을 싫은 물로 만들어버릴 위험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두 얼굴이다. 물을 잘 다스리면 부자가 되지만 물을 잘못 다스리면 사람도 잃고 돈도 잃는다. 물 정책은 성공하면 피터 대제처럼 성군이 되지만 반대로 실패하면 수나라 양제처럼 폭군으로 평가 받게 되는 양날의 칼과 같다고 하겠다.
오늘도 조계사 일주문 앞 뙤약볕 아래에는 4대강의 인공적 개발을 반대하는 천막이 뜨거운 열기를 뿜고 있고, 국정홍보채널은 그림같이 시원하고 푸른 성공한 강물 모습을 연일 비춰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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